〈 24화 〉내가 이런 여자애를 좋아했구나
흰색 데님 자켓 위로 빛나는 듯한 은발을 휘날리며 마왕이 떠났다. 찜찜함을 느끼면서도 난 바지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강의 시간까지 1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차피 나중에 만나기로 했으니 정말 죽으러 가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런 걸 위안 삼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해, 저번에 마왕이 찾아왔던 강의실로 들어갔다.
목요일에도 왔던 곳인데, 주말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런 낯선 분위기에 강의실 문에 서서 안을 둘러봤다.
친구 두세명이서 같이 앉은 사람도 보였고, 나처럼 친구가 없어 홀로 앉은 사람도 보였다. 그런데 강의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과대 무리였다. 그는 잘생긴 면상으로 미소를 날리면서 주변에 앉은 동기 여자애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있잖아. 어?”
그는 날 보자 마자 웃던 얼굴을 굳혔다. 그 얼굴을 본 주변에 앉은 동기들은, 고개를 돌리며 날 쳐다봤다. 그런데 그 여자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야, 진짜 왔어!”
“쓰레기……”
“쟤는 체포 못 해?”
모두들 날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날 보고 있었다. 게다가 과대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뻔하지, 뭐. 과대 놈이 동기들한테 헛소문을 퍼뜨렸겠지. 나중에 진실을 알려도, 나에 대한 신뢰성을 낮춰서 믿지 못하도록.
물론 난 저 표정을 보고 화가 난다거나 짜증나진 않았다. 저 놈이 헛소문을 나불댈수록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그걸 믿은 사람들도 그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을 뿐이었고, 그들이 진실을 알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칠판에 가까운 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뭔가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목요일에 있었던 것과 아주 큰 차이. 과대 옆에 유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뒤를 봐도, 당당하게 웃는 과대새끼만 보이고 유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강의실에 안 올리 없었다. 내가 유리와 같은 시간이 되도록 신경 썼고, 더군다나 이 강의는 1학년이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에서 1분 넘은 시간이었다. 왜 안 오는 거지, 하는 생각으로 강의실 문을 쳐다봤다.
끼익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하지만 유리가 아니라 교수님이었다.
다시 한 번 시간을 보니 2분이 넘었다. 저 교수님은 10분 내에 오지 않으면 수업을 듣더라도 결석처리 하시는 분이었다.
끼익!
다시 한 번 문이 열리더니, 이번엔 유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발목을 드러낸 검정 슬랙스를 입고, 영화관에서 봤던 회색 블레이져 차림이었다.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쉬면서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유리는 급하게 들어오고는, 교단 앞에 선 교수님을 보고 놀란 듯 발걸음을 멈췄다. 교수님은 가져온 교재를 정리하다가, 그녀를 곁눈질하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지각처리는 안 할게요. 어서 자리에 앉아주세요. 수업 시작합니다.”
무관심하게 보이는 말투로 말하고는 교재를 뒤적였다. 그런 교수님에게 유리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다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때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건지, 싶어서 그녀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과대가 있었다. 저번주 목요일에 유리가 앉았던 자리엔 다른 여자애가 있는 것이었다.
그걸 본 유리는 패닉이 온 것 같았다. 과대 같은 놈 주변에 안 앉으면 될 것을, 주위를 둘러보며 빈 자리를 찾고 있었다.
난 당황한 얼굴로 눈치를 보는 듯한 유리가 조금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내 첫사랑인데, 저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날 본 그녀는 순간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과대 쪽을 향해 한 번 힐끔 보고 옆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유리는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벗어 두며 작게 속삭였다.
“안녕”
얼마나 뛰어왔는지, 내 옆에 앉자 후끈한 땀냄새와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아, 응.”
그런데 전보단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만약 전이었다면 바로 옆에 붙은 것만으로도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만 신경 쓰였다.
“유리야, 이거.”
작게 말하면서 내 뺨을 가리켰다. 이쪽에 머리카락이 묻었으니 치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유리는 “뭐?”하며 날 쳐다봤다.
“아니, 뺨에 뭐 묻었다고.”
“뭐, 뭐가?”
유리는 숨을 헐떡이며, 고양이처럼 주먹 쥔 손으로 뺨을 닦았다. 그런 걸로도 머리카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나는 손을 들었다. 땀으로 촉촉히 젖고 부드러운 뺨에 검지를 만지며, 수분 때문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내가 만졌던 곳을 만지던 유리는 잠깐 뒤 쪽을 향해 힐끔 바라보다가, 자기 얼굴을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고마워.”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고는 내게 떨어졌다. 게다가 그런 움직임에 당황한 날 보며 약간 웃기까지 했다.
“어, 어어. 그래.”
지금까지 유리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적은 없었다. 평소엔 동성친구처럼 친한 친구처럼 지내는 게 다였다. 그런데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만 했던 거였다. 차라리 아까 마왕이 두근거리냐고 물었을 때가 더 설레었다.
내 옆에 앉은 걸 보고 과대가 그녀한테 헛소리하지 않은 걸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니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그 놈이 시킨 건가 싶어서 돌아봐도, 그는 옆에 앉은 여자애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혼란한 와중에도 수업이 시작했다. 교수님이 칠판에 분필로 오늘 배울 걸 설명하며 그 내용을 적었다. 그때 갑자기 유리가 종이쪼가리를 건넸다.
오늘 끝나고 뭐해?
강의가 끝나고, 난 바로 마왕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대학교 앞인데도 사람이 적은 피시방에 들어가니 은발머리를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쉽게 발견하는데, 이러면 문자로 보냈던 좌석 위치가 쓸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걸 머릿속에 떠올리며 마왕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는 우리가 온 줄도 모른 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채팅에 집중한 거였다. 이미 죽어서 회색 화면이 뜨는데, 키보드를 두드리며 어떤 말을 계속해서 보내는 중이었다.
뭘 쓰는 건지 궁금해서 소리를 죽이고 몰래 그녀 뒤로 돌아갔다. 마왕이 치고 있는 건 자음 4개에 불과했다.
ㅈㄱㅊㅇ
ㅈㄱㅊㅇ
ㅈㄱㅊㅇ
ㅈㄱㅊㅇ
ㅈㄱㅊㅇ
ㅈㄱㅊㅇ
ㅈㄱㅊㅇ
계속해서 정글 탓만 하는 마왕을 보니 조금 안심했다. 아까 봤을 땐 어디 죽으러 가는 것처럼 비장했으면서, 지금은 자기가 잘못한 걸 남 탓으로 돌리니 황당하기도 했다. 안심과 황당한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물었다.
“너 뭐하냐?”
“오! 왔는가!”
정치질 하는 걸 들켰는데도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들어 날 쳐다봤다. 흐뭇한 듯 눈웃음을 치면서 바라보다가, 내 옆을 보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유리도 왔는가?”
“안녕하세요, 선배님!”
눈이 마주친 유리가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마왕은 얼떨결에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라면서도 날 쳐다봤다.
이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데려왔냐는 눈빛이었다.
안 데려올 수가 없었다. 병문안 올 때마다 마왕을 의식해서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마왕과 같이 피시방에 간다는 말을 하자, 눈에 힘을 주면서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고 안된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녀를 데려오고 말았다.
내가 마왕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유리가 활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선배님. 지헌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따라왔는데, 같이 놀아도 될까요?”
뻔뻔스럽게 굴던 마왕도 웃는 얼굴엔 침 뱉지는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네 마음대로 하게.”
“네! 알았어요!”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유리는 마왕의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마왕과 1대1을 해야 했기에, 그녀 왼편에 앉았다.
“지헌아!”
그때 유리가 날 불렀다. 마왕의 은발 너머로 쳐다보니, 그녀가 날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래?”
그러고보니 그녀는 피시방에 온 게 처음이었다. 전원 켜는 거나 로그인 하는 방법을 알리 없었다.
근데, 나 마왕이랑 한판 붙어야 되는데……
“괜찮네. 가서 알려주게.”
인형같이 예쁜 얼굴을 컴퓨터 화면에 고정한 마왕이 말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텀 미스포츈 시체 위에 물음표 핑을 마구 찍으며 말을 이었다.
“자리가 좀 떨어져도 붙을 수 있지 않나. 어서 알려주게.”
“괜찮아?”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짐이 끝낼 동안 유리나 도와주게.”
얘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마왕을 지나쳐 유리 옆자리에 앉았다. 내 컴퓨터를 먼저 키면서 그녀에게 피시방에서 알아야 할 걸 알려줬다.
“전원버튼은 그거 누르고, 화면은 원래 켜져 있으니까 안 건들어도 돼. 아 그리고 이거 선불이라 가입하던가 비회원으로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할래?”
“뭐가 다른 건데?”
그녀는 순수한 눈을 반짝이면서, 나로써는 약간 이해되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살짝 짜증이 날 것 같았지만 참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가입해서 돈을 넣으면, 언제든지 와서 할 수 있고. 아 돈 낸 만큼만. 그리고 비회원은 아무리 돈을 넣어도 한번 끄면 끝이야.”
“아 그래?”
“응. 그럼 어떻게 할래?”
“그럼…… 지헌아. 너 여기 자주 와?”
“가끔씩은 오지.”
“그럼 가입할래.”
“알았어. 그럼 이거 먼저 하자.”
의자에서 일어나 유리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그녀 자리에 있는 마우스를 편하게 잡으려고 한 건데, 의도치 않게 유리 오른쪽에 있는 마왕에게 등을 돌린 자세가 됐다.
“……자네.”
마왕이 나지막하게 날 부르기에 고개를 돌렸다 챔피언이 살아나서 집에 있는데, 상점에서 뭘 사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나만 보고 있었다.
“왜?”
“자네, 혹시.”
“뭐가.”
“……”
그녀는 말없이 날 쳐다봤다. 어두운 피시방 조명 아래로 마왕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진 게 보였다.
“왜 그래. 뭐가 문젠데.”
말없이 계속해서 나만 바라보길래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화면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닐세.”
아무 것도 아니면 왜 저런데.
아니, 오늘따라 마왕이 좀 이상했다. 옷 차려 입은 것도 그렇고, 비장한 모습을 보이지 않나, 이제는 그냥 이유도 없이 날 불렀다. 혹시 나 모르게 뭔가 짜고 있는 거라도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녀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유리가 날 불러 그러지 못했다.
“지헌아. 왜 그래?”
“어? 아니, 아니야.”
어차피 이따 게임하기로 했고, 지금 이것만 하고 따로 물어보기로 했다.
유리에게 회원 가입하는 걸 도와주고, 그녀는 돈을 넣으러 키오스크로 갔다. 그것도 도와주려 했지만, 이건 할 수 있겠다며 거절했다.
이제 유리도 갔으니 질문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지만 누군지 감이 와서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아 네, ●●신문산데요. 혹시 이하준의 실체란 메일 보내신 분이 맞으실까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성의 말로 인해 내 짐작이 맞은 걸 확인했다. 신문사 측에서 내가 보냈던 이메일을 보고,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한 것이다.
“네, 저 맞습니다.”
-여기서 이하준이 영웅이 아니고, 진짜 영웅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사실이 맞나요?
“사실 제가 그 사람입니다.”
-사진도 보내셨는데, 가지고 있죠?
“다 있죠. 그때 입었던 옷이나 치료기록, 그때 오셨던 경찰관 번호랑 다 있어요.”
-그래요……
그녀가 말을 흐리며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혹시 지금 인터뷰 가능할까요?
“네! 아니, 지금은 좀 그렇고요. 10분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아요. 조금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네!”
그렇게 외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날 보지도 않고 게임하는 마왕에게 말했다.
“야, 나 신문사에서 연락왔다!”
그 말을 듣고 마왕이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오오! 그럼 기사 나오는 겐가!”
“그럴 거야! 아마 저녁쯤에나 나오겠지!”
인터넷 신문이라서 발행까진 오래 안 걸릴 거니까.
“나 이제 인터뷰하러 갈 거니까, 게임은 나중에!”
“알았네!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게!”
“그래! 이따 보자!”
나는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자취방으로 가게 준비했다. 그 사이 계산을 끝낸 유리가 다가왔다.
“지헌아, 어디 가?”
준비를 끝내고 그녀에게 대답했다.
“미안한데, 나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나 가볼게!”
“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유리를 뒤로 하고, 난 서둘러 피시방을 나갔다. 하지만 난 이때 마왕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어야 했다. 그녀는 좋은 소식 기대하겠네, 가 아니라 기대하게, 라고 말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