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둘이, 사귀는 거에요?
-다행이다.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
“지금?”
-응, 나 네 자취방 건물 바로 앞이니까. 방에서 기다려.
유리의 말을 듣고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보라는 듯이 피자 조각을 들어서 늘어난 치즈를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피자를 높이 들어 광고처럼 과장스럽게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마왕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유리에게 마왕과 단둘이 있는 걸 보여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미안한데.”
-나 거의 다 왔는데?
그 말대로 현관문 너머로 유리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게 있잖아, 사실 나 좀 있으면 씻을 거라서.”
-좀 나중에 씻으면 되지. 아, 그리고 너 점심 먹었어? 샌드위치 사왔는데.
“어어.”
이 상황을 모르는 마왕은 베어 먹은 피자를 들고 남은 손으로 피클통을 집었다. 그걸 들어 피자 소스가 묻은 입가에 가져다 대더니, 입을 우물거리다 말고 피클통에 붙은 비닐뚜껑을 앞니로 벗겨내려 했다.
……다른 의미로 유리에게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똑똑
마왕을 보는 사이 벌써 유리가 문 앞에 온 모양이었다. 노크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직접 유리 목소리가 들렸다.
“지헌아, 나 왔어. 문 좀 열어줄래?”
들여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그녀가 안을 볼 수 없게 조금만 열고 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 유리야.”
“지헌아!”
역시 유리가 흰색 비닐 봉투를 들고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청바지에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들어간 분홍색 맨투맨 차림이었다. 신입생 티가 풀풀 나는 복장에 보니, 항상 추리닝을 차림에 입가에 피자 소스를 묻히며 먹는 마왕이 비교됐다.
문을 살짝 닫고 뒤를 돌아봤다. 마왕은 앞니로 여는 걸 포기하고, 피자 조각을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비닐을 뜯었다. 그러다 국물을 흘릴 것 같았는지, 피자를 다시 들고 통을 입에 대서 피클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뭐, 취향이니까.
다시 문을 열고 유리와 눈을 마주쳤다. 유리는 유명 샌드위치 프랜차이즈인 지하철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투를 들어 보였다.
“이거 사왔지롱!”
이런 발랄한 모습에 내가 반한 거였다. 그런 걸 떠올리면 가슴 설레기도 했지만, 그녀가 과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떠올라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내 심정보다 내 방에 온 마왕을 숨기는 게 먼저였다.
“아, 그래?”
“너 점심 안 먹었을, 킁킁, 너 피자 먹어?”
“피자? 아 피자 먹고 있지!”
“너 혼자 먹냐! 치사하게. 나도 같이 먹자, 응?”
“지금 다 먹어서! 다 먹어서 없는데!”
“그래? 너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왔는데. 안 되겠네?”
“안 되겠네. 어쩔 수 없네. 미안, 다음에 같이 먹자. 잘 가.”
대충 말하며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누가 온 것이냐?”하고 뒤에서 마왕이 소리쳤다. 나는 망했다, 하는 생각으로 찡그렸고, 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얼굴을 굳혔다.
“안에 누구 있어?”
“어, 그”
“소희 선배야?”
“……응.”
“문 좀 열어줄래?”
물어봤으면서 유리는 문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 문고리를 놓쳐버렸고, 그녀는 내 자취방 바닥에 있는 마왕을 발견하게 됐다. 마왕은 유리와 눈을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유리 아닌가! 자네도 어서 와 들게나! 같이 먹지!”
굳은 얼굴을 한 유리를 보고도, 마왕은 뻔뻔하게 한입 먹은 피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유리도 나처럼 어이가 없는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네?”
“같이 먹자꾸나! 피자도 많이 남았으니!”
그렇게 말한 마왕은 다시 피자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도 뭐해서 유리에게 물었다.
“같이 먹을래?”
“……”
유리는 말없이 방에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유리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마왕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고, 내가 앉을 자리는 그녀를 양 옆에 끼는 곳 밖에 없었다.
“음! 냠냠냠! 아작아작”
옆에 포크가 있는데도 굳이 맨손으로 피클을 집어먹는 마왕. 그런 그녀와 마주 앉아서 정색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유리. 그 둘 사이에 껴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받는 내가 있었다. 방 안에 울리는 게 마왕이 먹는 소리인 것처럼, 먼저 말을 꺼낸 것도 마왕이었다.
“자네, 손에 그건 무엇인가?”
그녀가 피클 국물이 묻은 손으로 가리킨 건 유리가 가져온 비닐봉투였다. 유리는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말 걸어온 게 당황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저, 샌드위친, 데요.”
“샌드위치라고? 혹시 먹어도 되는 겐가?”
“아, 네.”
“3명이면 피자가 모자랄 것 같았는데, 다행이군.”
마왕이 유리에게 받은 봉투를 뒤적이다가 말을 이었다.
“2개밖에 없으니 3명이서 나눠 먹기에 좀 그렇군. 지헌이여, 집에 가위는 있는가?”
나는 이 자릴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일어나려 했다.
“있지! 내가 가져올게!”
하지만 마왕은 엄청난 힘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며 말했다.
“됐네. 집주인이 그래선 안 되지. 짐이 가져오겠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내 뒤를 지나쳐 주방으로 가는 사이, 유리가 내게 물었다.
‘소희 선배랑 사귀어?’
마왕에게 들리지 않게 입모양으로 내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엔 당혹감과 당황함이 피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부정하려고 하다가 아까 일이 떠올랐다. 과대한테 사귄다고 하니까 맞았고, 안 사귄다고 하니까 더 세게 맞았다.
“음, 가위가 안 보이는구만. 이걸로 해도 되겠지!”
게다가 지금 마왕의 손엔 식칼이 들려 있었다. 설마 찔리지는 않겠지만 왠지 모르게 섣불리 대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
‘썸이야?’
‘그건 절대 아니고.’
“무얼 속닥속닥하는지 모르겠지만, 짐의 욕은 하지 말아 주게나.”
!
놀라서 마왕을 봤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며 샌드위치를 썰고 있었다. 우리는 입이나 표정을 통해서 대화했을 뿐,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마왕은 마왕이었다. 아까 피자 먹는 모습은 아저씨 같았지만.
“자, 다 됐다네! 먹게나!”
마왕은 흰색 포장지 채로 자른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내 팔을 깔끔하게 자른 솜씨대로, 모든 조각의 크기가 똑같았다. 그걸 가져와서 우리 앞에 하나씩 두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겨서 먹는 마왕을 보고, 유리가 아까처럼 굳은 얼굴로 비꼬듯이 물었다.
“맛있으세요?”
“음! 맛있구나! 프로틴보다는 아니지만 말일세! 후하하하하!”
진짜로 맛있냐고 물어본 건 아니었을 건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마왕. 그런 마왕을 보고 유리는 또다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마왕은 뻔뻔하게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이렇게 맛있는 건 오랜만에 먹는구나. 어디서 산 게냐?”
“지, 지하철이요.”
“지하철? 지하철에서 이런 것도 파는 게냐? 게다가 역에서 거리가 꽤 멀 건데, 용케도 가져왔구나!”
“아, 아뇨, 그 지하철이 아니라 다른 지하철이요.”
“다른 지하철? 짐이 모르는 사이에 다른 선로가 열리기라도 한 게냐?”
자꾸 엇나가는 대화로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느슨해진 틈을 타 이제는 식어버린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즈가 굳은 피자를 한 입 물었을 때, 유리가 입을 열었다.
“소희 선배.”
“음?”
마왕이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문 채 대답했다. 이제는 그런 마왕의 모습이 익숙한 유리가 말했다.
“지헌이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당사자가 있으니까 직접 물어볼게요.”
“음, 물어보거라.”
“아까 복도에서, 하준이가 선배한테 말 걸었죠.”
“그랬다만.”
“그때 뭐라고 했어요?”
“흠…… 우물우물”
마왕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입에 문 샌드위치를 씹었다. 샌드위치 조각을 천천히 입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동시에 날 쳐다봤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복도엔 나와 과대만 있는 게 아니라 마왕도 있었다. 거짓말을 할 거였으면 적어도 그녀와 말을 맞췄어야 했다.
“우물우물…… 좋다.”
마침내 샌드위치를 다 먹은 마왕이 말했다.
“그 놈이 무슨 말을 했냐고 하면, 같이 피시방에 가자는 이야길 하더구나.”
마왕이 내 말에 맞춰줬다!
“자네와 같이 간다고 하더군. 허나 짐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거절했다만. 왜 물어보는 겐가?”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유리의 눈엔 안심과 불안이 같이 담겨 있었다. 마왕이 한 말을 믿고 싶지만 믿기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선배.”
“음!”
“그럼 하준이한테 다가가지 말아주실래요?”
“짐이 말인가? 하!”
기가 찬지 마왕이 크게 비웃었다. 나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같은 생각이었다.
“그 놈이 멋대로 다가올 뿐이라네. 이게 아름다운 자의 숙명이지!”
마왕이 손을 들어, 어깨에 얹힌 은색 머리카락을 쳐냈다. 안그래도 인형 같은 외모에 그런 행동까지 하지 예쁘긴 했다. 입가에 묻은 피자 소스만 빼면.
“게다가 말일세, 짐은 지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네.”
아니, 마지막 말도 빼고.
“네?”
유리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와 마왕을 번갈아 봤다. 외모만 보면 내가 마왕이랑 어울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리가 그렇게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거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유리는 계속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되물었다. 그걸 본 마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엇이 그리 납득되지 않은 겐가?”
“둘이, 사귀는 거에요?”
“사귀다니! 짐과 지헌은 더 가까운 사이다만!”
마왕이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 소스 묻잖아!
은근슬쩍 내 옷에 피자 소스를 묻히던 마왕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짐과 지헌을 그런 단순한 사이로 봐주지 않았으면 좋겠군. 짐은 전생에서부터 지헌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잘 듣게. 짐과 지헌은, 전생에서 몸을 섞은 사이일세!”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