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너랑 싸우면 내가 질 걸?
“쿨럭쿨럭! 우에엑!”
아픈 몸으로 끌려간 곳은 대학교 안에 있는 운동장이었다. 오전이나 오후엔 축구부 같은 운동부 사람들이 뛰어다녔지만, 점심시간엔 킥보드에 끌려가는 나밖에 없었다.
처음엔 주변 사람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마왕에게 멈춰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생명의 위험을 느껴져, 멈추라는 목적이 달라졌다.
마왕이란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운동장을 열바퀴 넘게 달렸고, 만약 어제 킥보드에 충전을 해두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멈추지 않았다면 사극에서 보던 죄인들처럼 그녀에게 묶인 채 온몸으로 운동장 바닥을 끌려 다녔을 것이다.
이렇게 무식한 달리기가 끝나자, 난 바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들어간 게 없어서 위장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와중, 마왕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런 걸 위해서 운동하지 않나? 용사여.”
“무슨, 우웩, 개소리냐.”
“역시 스트레스 푸는 데엔 운동 만한 것도 없구만! 음!”
뭐가 음! 이냐! 난 뒤질 뻔했는데!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 신체가 따라주지 않았다. 몇 분간 앉아서 쉬자, 일어설 수 있는 정도로 체력이 돌아왔다. 갓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다리를 부들거리며 마왕에게 걸어갔다.
“야.”
“오, 충분히 쉬었는가? 그럼 다음 운동으로 가지 않겠나?”
“안 가!”
“아핫핫! 농담일세! 이제 점심을 먹으러 가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허리에 묶은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아까 같은 꼴을 보기 싫어서 내가 직접 풀었다. 밧줄을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풀려고 해도 손가락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결국 짜증이 나는 바람에 안 될 걸 알면서도, 밧줄을 찢으려 양쪽에서 잡아당겼다. 역시나 밧줄을 끊기지 않았고, 나는 더 힘을 줬다. 혈압이 올라가 얼굴이 터질 것 같을 때.
뚝!
뭐, 뭐야 이거.
마왕이 준 밧줄은 평범한 나일론 밧줄이었다. 밖에서 빨랫줄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얇은 두께였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 손으로 찢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찢어진 밧줄을 잡고 멍하니 바라보는데, 마왕이 그런 내 모습을 발견했다.
“오! 짐의 생각대로군!”
그 말에 나는 밧줄을 마왕에게 들이밀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황당한 게 더 컸다.
“야, 이거 뭐냐.”
“놀라지 말게.”
“어제 나한테 나한테 뭘 먹인 거야.”
“그건 좀 억측일세. 짐도 같이 먹지 않았나. 말 좀 들어보게.”
마왕이 밧줄을 떨어뜨리며 내게 다가왔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푸른 눈을 나와 마주치며 말했다.
“영혼이란 게 쉽게 물과 같은 액체로 비유되지만, 실은 아닐세. 비슷한 부분도 없는 건 아니네만.”
“그래서?”
“저번 세계와 이번 세계에서 자네가 가진 차이는 오직 육신뿐이라네. 영혼은 동일하지. 자네 영혼은 그동안 자네가 겪었던 훈련과 고난을 기억하고 있단 말일세.”
“그런 것치곤 많이 약했는데?”
처음 돌아온 날 옷을 벗고 몸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선 근육질이던 몸이, 이제는 마르고 군살투성이가 되어버린 게 충격적이었다.
“그랬겠지. 자네, 이 말 들어본 적 있나? 몸이 기억한다는 말. 실은 몸이 기억한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걸세. 자네 힘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도 그것 때문이지.”
“아니, 어제나 그제도 이렇게 힘이 세지 않았다니까?”
“당연하지 않나. 지금은 짐이 조금 자극을 줬을 뿐이라네. 너무 조금이라서 이런 힘도 일시적이지. 그리고 자네 지금 고통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나?”
확실히 그녀 말대로였다. 달리기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쑤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런 반면 지금은 온몸이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릴 뿐, 어제 맞은 데가 아프진 않았다.
잠깐만, 혹시 어제 날 뒤져라 때린 것도……?
“그래서 어제 날 그렇게 팬 거였냐?”
“그건 그냥 짐의 취미였네만?”
“야!”
“농담일세. 그저 확인하려 했네. 예상대로 많이 쇠약해졌더군. 오늘 자네가 강해진 걸 보고 짐의 가설에 확신을 얻었지.”
“그런데 너 이런 걸 어떻게 알았냐?”
“훌륭한 피험자가 여기 있지 않나?”
마왕은 엄지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초등학교 때였나, 짐이 전생한 뒤부터 남들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걸 깨달았지. 걸음마도 빨랐고 이도 빨리 난 데다, 중고등학생 네다섯명을 혼자서 쓰러뜨렸으니 말일세.”
……마지막 말은 무시하자.
어쨌든 확실히 그녀 말대로 마왕이 가진 힘은 심상치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날 껴안 자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받았다. 게다가 날 팼을 때도 3시간동안이나 죽도를 휘두른 건 평범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의문점이 들어 마왕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왜 날 단련시키는 건데. 무슨 이익이라도 있냐?”
내 말에 마왕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어제 말하지 않았나! 전생에서 제대로 못 마친 대결을 끝내고 싶다고 말일세. 그것도 전성기의 자네와!”
“뭐야, 너 나 그러려고 만나는 거였냐?”
“부정은 하지 않겠네. 그렇다고 자넬 친구로 생각하는 건 거짓이 아닐세.”
자기 진심을 보이려는 듯, 마왕은 눈에 힘을 주고 날 쳐다봤다. 커다란 푸른 눈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자 부담감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쳐다봐.”
“짐의 진심을 알아줬으면 됐네.”
눈에 힘을 풀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점심이나 먹으러 가는 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마왕이 날 만나러 온 목적을 깨달았다. 나랑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내가 있는 강의실로 온 것이었다.
“아 맞다. 너, 맛있는 걸로 사줘야 한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뭐라도 있어야지.”
“걱정말게! 짐이 좋은 걸로 생각했으니!”
마왕은 당당한 얼굴로 킥보드를 끌며 운동장을 나갔다. 둘을 묶었던 밧줄은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녀 뒤를 따라갔다.
난 그녀가 학생식당만큼은 아니더라도 주변 음식점에 데려가길 바랬다. 그런데 킥보드를 둔 속은 식당이 아닌 근처 학교 건물이었다.
“야, 여기 맞아?”
불안감에 물어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당당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대로 왔다네. 걱정말고 따라오게.”
그런 말을 믿고 도착한 곳은, 학교 건물 내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를 따라 그 안으로 들었다. 마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음료수가 진열된 판매대로 향하고, 무언가를 집었다.
“자! 운동했다면 이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건 초콜릿 맛 프로틴이었다.
“그, 그거라고?”
“맛이 마음에 안 드는 겐가? 걱정말게. 초콜릿 맛 말고 바나나, 곡물맛도 있다네.”
“갑자기 몇 키로를 강제로 달리게 해놓고. 딸랑 그거 하나로 퉁친다고?”
“짐이 과연 이거 하나로 퉁치겠는가? 명색이 마왕인데.”
“그렇지? 이거 말고 다른 것도 있는 거겠지?”
“다름아닌 3개나 사주지! 고르고 싶은대로 고르게!”
“안 먹어!”
“뭐, 뭣이?”
당황하는 그녀는, 마치 마왕을 꼬시려다 실패한 과대 같았다. 실패를 감안하지 않고 확신에 찼다가, 내 거절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 이 프로틴을 거절하는 것이냐? 마, 맛있단 말일세……!”
“그렇게 개고생을 시켜놓고, 기껏해야 프로틴이냐!”
“기껏이라니! 프로틴이 몸에 얼마나 좋은지 모른단 말인가?”
그 말을 듣고 난 기가 막혔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잘들어. 몸에 좋은 건, 맛이 없어. 몸에 안 좋은 음식일수록 맛있는 거지.”
“프, 프로틴도 맛있네만.”
“그건 그저 거짓일 뿐이야. 말했잖아. 칼로리가 높을수록 맛있다고. 그러니까 고열량 피자 먹으러 가자.”
“피자말인가? 그런 탄수화물 덩어리말인가?”
“그럼 어제 먹었던 떡볶이랑 피시방에서 먹었던 건 뭔데.”
“자넬 만난 기념이었네. 게다가 어제는 치팅데이였단 말일세. 오늘은 소식하는 날이네만.”
“치팅, 뭐?”
순간 눈동자에서 봤던 female: cheating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마왕을 설득하는 것에 집중했다.
“괜찮아. 먹었으면 그만큼 빼면 되는 거야.”
“그렇다면, 오늘 대련에 어울려 주겠다는 겐가?”
“어…… 그럴까?”
“좋네! 어서 피자 먹으러 가도록 하지!”
어차피 고생하는 건 미래의 나였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단 배고픈 현재를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마왕은 들었던 프로틴을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하나 더 집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무인 계산기에서 결재하는 걸 보며 물었다.
“아니, 피자 먹는다니까?”
“자네는 그것도 모르는 겐가? 운동하고 30분 내에 단백질을 섭취해야만 근손실이 안 온다네. 자, 먹게!”
마왕은 내게 프로틴을 건네고, 킥보드에 타기만 했으면서 자기도 프로틴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조금 황당하면서도 나도 뚜껑을 뜯고 프로틴을 먹었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폰을 꺼내 온 게 있는지 확인했다.
유리한테 메시지가 와있었다. 내용은 복도에서 과대와 이야기한 게 피시방가자는 얘기가 맞냐는 거였다. 온 시기는 대충 마왕에게 끌려간 직후였고, 그걸 제외하면 다른 문자는 온 게 없었다.
솔직히, 뭐라고 보낼지 고민했다.
마왕이 알려준 대로 과대는 그런 놈이 맞았다. 유리와 친한, 아니 아는 사이인 내 앞에서 대놓고 마왕에게 접근하려 했다. 퇴짜를 맞았지만 쓰레기인 건 확실했다.
과연 그런 놈이 유리를 만나게 해주는 게 좋은 건지 의문이 생겼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인 건 감안하더라도, 초중고를 같이 나온 친구한테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진실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세계에 가기 직전 상황이 떠올랐다. 가로등 아래에서 과대와 키스하는 유리, 그런 그녀의 손에 들린 내 선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제 유리가 내게 했던 말도 떠올렸다. 왜 자기한테 마왕이랑 이야기 한 해줬냐고, 서운다하고.
지헌: 피시방 같이 가자고 한 거 맞는데?
지헌: 왜?
이렇게 보내면 안되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대를 만난 건 유리 선택이었다. 자기 선택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화면을 보는데, 갑자기 내 메시지에 1이 사라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왕을 힐끔 쳐다보니 그녀는 이미 내용물을 다 마시고 프로틴 페트병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나는 마왕에게 “잠깐만.”이라고 말하며 편의점을 나갔다. 편의점 안에 서 있는 마왕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헌아. 나야, 유리.
“나도 알지. 네 번호 저장했는데.”
-아, 그런가?
폰 너머에서 유리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침울해진 말투로 물었다.
-저기, 있잖아
“왜?”
-진짜로 하준이가 너한테 피시방 가자고 한 거 맞아?
“……응, 그랬지. 나랑 마, 아니 선배랑 같이 가자고 하던데. 너도 끼고.”
-그래? 너 나 피시방 안 가는 거 알잖아.
“과대가 그렇게 말하던데?”
-잠깐만, 나중에 전화할게.
뚝
뭔가 놀란 것 같은 말투였는데,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끊어버렸다. 언제 전화할지 몰라 폰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전화는 잘 마쳤는가?”
마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당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마왕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제 가세! 피자 먹으러! 그런데 어디서 먹을 겐가?”
“글쎄다. 듣기로는 과실에서 자주 먹는다고 하는데.”
“오오! 역시 인싸구먼!”
“무슨 인싸야! 시끄럽고. 어디서 먹는 게 좋을까.”
밖에서 먹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바로 철회했다. 오늘 마왕한테 이끌려서 뛰어다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의를 끌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먹는 방법이 있을까? 아 맞다!
“너 내 자취방에서 먹을래?”
“자네 자취방 말인가? 그곳에서 뭔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겐가!”
마왕이 과장스럽게 몸을 움츠렸다.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너랑 싸우면 내가 질 걸?”
“하긴, 그렇지!”
역시나 당당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마왕.
“자! 그럼 자네 자취방으로 가세.”
“잠깐만, 잠깐만. 여기서 시키고 가는 게 도착하고 시키는 것보다 좋지 않을까?”
내 생각에 마왕이 동의하고 같이 자취방으로 향했다. 이세계에서 겪었던 군대 이야기를 나누며 가니 순식간에 자취방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가자 마자 피자가 도착했고, 나와 마왕은 바닥에 앉아 피자를 먹을 수 있게 준비했다. 그 순간 다시 유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세요!”
내가 전화 받던 말던 마왕은 박스를 열고 피자를 먹었다.
- 지헌아.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나 자취방인데?”
-다행이다.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
“지금?”
-응, 나 네 자취방 건물 바로 앞이니까. 방에서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