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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87화 (87/95)

[87화]

좌대장인 곤과 귀물경비대를 땅에 남겨두고, 가비는 연화와 함께 경계를 넘었다. 주막으로 찾아가자, 주인이 난색을 표했다.

이틀 전. 태황궁의 경비대가 찾아와서 ‘천자비’를 납치한 귀물경비대에 관해 물었다. 주인은 직감적으로 천자비가 가비인 걸 알았고, 귀물경비대가 납치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곤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던 가비가 너무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해서 저도 모르게 온 적이 없다, 시침을 떼버리고 말았다.

그 후 괜한 거짓말을 했나 노심초사하던 중 오늘 새벽, 우대장인 풍과 귀물경비대 몇 명이 와서 말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들이 두고 갔던 말을 고스란히 내어주자, 풍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왔었다는 걸 주인이 말하지 않은 게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만약 말했다면 그들이 두고 간 말을 경비대가 모조리 수거해갔을 것이었다.

‘고맙네. 내 이 보답은 반드시 하지.’

그렇게 풍과 귀물경비대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천자비인 가비와 그녀의 시종인 듯 보이는 여인 한 명이 찾아온 것이다. 이러다 무슨 사달이 나는 건 아닌지 주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말을 빌릴 수 있을까요?”

“예, 예. 암요.”

주인이 얼른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끌고 나왔다.

가비가 연화와 함께 말에 올랐다. 말고삐를 쥐는 게 서툴다는 걸 느꼈는지, 말이 알아서 얌전히 굴었다. 그런 말의 등을 가비가 다정한 손길로 토닥여주었다.

“이 뒤에 귀물경비대가 한 번 더 올 거예요. 그들에게도 말을 내어주면 고맙겠는데….”

“또요?”

주인이 저도 모르게 정색하며 되물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갚을게요.”

“아니 뭐…. 두고 간 말을 내어주는 것뿐이긴 한데….”

“부탁드려요.”

가비가 주인을 향해 활짝 웃었다.

이내 출발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천자비로 치면 세상 평범하게 생각됐던 그 얼굴이, 불현듯 반짝 빛이 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노을이 질 무렵. 가비는 쉼 없이 말을 달려 태황궁에 당도했다. 궁 벽을 둘러싸고 있던 보초병들이 가비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 들썩였다.

곧바로 소식을 전해 들은 천태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게 사실이냐?”

뜻하지 않은 횡재였다. 허나 의구심이 들었다.

그걸 잠재우듯 시종관이 말을 이었다.

“야왕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함께 온 친우도 무사히 의궁에 복귀하길 바라고요. 귀물경비대의 안위까지 보장하랍니다. 그것만 약속하면 순순히 천자비로 살겠답니다.”

모두의 목숨을 담보로 천자비가 되겠다?

눈물 나는 희생인 건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당장은 상관없었다.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해라.”

“예.”

시종관이 나가자, 천태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어때. 그 귀한 것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반소를 죽이고 관련된 자들을 숙청하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현과 가비의 합방이 이루어진 직후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끼이이익-

천태비의 허락이 떨어지자 궁 문이 열렸다. 가비가 당당하게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천태비의 시종관이 가비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제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채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친우분께선 의궁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비와 눈을 맞춘 연화가 시종의 뒤를 따라 의궁으로 향했다.

연화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시종관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천자비님께선 일단 단장부터 하시지요.”

가비가 대답 없이 서 있자, 친절하게 말을 보탰다.

“천태비님께서 오늘 밤, 천자님과 천자비님의 합방을 원하십니다.”

예상한 일이었다. 그게 제일 시급한 문제일 테니.

“그럼 그전에, 반소를 만나게 해줘요.”

시종관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길로 가비는 시종관을 따라 목간으로 갔다. 따뜻한 욕통에 몸을 담그고 시종들이 씻기는 대로 몸을 맡겼다.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단장을 마쳤다.

시종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야왕께선 밀궁에 계십니다. 먼저 천태비님부터 뵙고 가시지요.”

끄덕.

가비가 시종관의 뒤를 따랐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모든 게 명료해진 지금, 더는 거리낄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 시각. 연화는 의궁 명의당, 제 방으로 돌아와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가 두고 간 머리 장식. 내가 갖고 있어. 일이 끝나면 돌려줄게.’

태황궁에 도착하기 직전, 가비가 제게 했던 말이었다.

가비야…. 괜찮은 거지?

우리 다 무사할 수 있는 거지?

입술을 꾹 물며 마음속으로 빌 때였다.

“연화야!”

창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야아!”

오정이었다. 연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오정과 겸복이 열린 창을 보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화가 부리나케 명의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연화를 발견한 오정과 겸복이 두 팔을 벌렸다.

“연화야!”

와락!

세 사람은 한 몸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연화야,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 갔다….”

오정이 말을 흐리며 눈물을 삼켰다. 참지 못한 연화가 울음을 터트렸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친우들의 얼굴을 보자 서러운 마음이 북받쳤다.

한차례 오열이 지나간 후. 서로의 얼굴에 남은 건 안도뿐이었다. 세 사람은 인적이 드문 뒤뜰의 구석진 곳으로 갔다. 오정이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요즘 궁 안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야. 서문님도 의궁에 안 나오시고, 천자님도 양궁 밖으로 안 나오셔. 역적으로 오해받을까 봐 다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고 있어.”

당분간은 궁 밖으로 우편물도 보낼 수 없고 출궁도 불가하다 했다. 말이 좋아 태황궁의 안위를 위해서라지, 실제로는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잠자코 있던 겸복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정말이야? 은갑이가 여인이라는 게.”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정이 놀란 표정을 감추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진짜 은갑이가 천자비님이란 말이야?”

연화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확인받고 나자 오정과 겸복이 잠시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미 궁 안으로 소문이 파다했지만,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긴급해서 다 말할 수 없지만,”

그 말에 오정과 겸복이 연화를 바라봤다.

“나 퇴궁한 거 아니고 끌려가서 죽을 뻔했어. 그걸 은갑이랑 귀물경비대가 구해준 거고.”

“뭐어?”

벌떡 일어나는 오정을 겸복이 황급히 끌어앉혔다.

“그게 사실이야?”

“응.”

연화가 그동안 겪었던 일을 짤막하게 간추리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은갑이가 준 거야. 너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같이 보라고.”

세 사람이 함께 종이에 적힌 내용을 바라봤다. 알고 있는, 또는 처음 보는 약초의 이름이 수십 가지 적혀 있었다. 종이에 적힌 건 다름 아닌 처방전이었다.

“이게 뭐야? 어디에 쓰는 약인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연화가 불안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곧 일이 생길 거야. 그럼 여기에 적힌 대로 약초를 찾아서 배합하래. 꼭 우리보고 하랬어.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말고.”

눈을 맞춘 세 사람이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종이를 접어 내용을 감추었다.

* * *

분노는 언제나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그걸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

반소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비참한 말로를,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내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전신을 갉아먹었다. 덕분에 고약의 효과는 반소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아래로 푹 꺾인 반소의 시선이 차가운 감옥 바닥을 응시했다. 어떠한 장면이 눈앞을 자꾸 어른거렸다.

이건 뭘까.

현재 나의 기억?

그도 아니면…, 전생?

꿈에서 보았던 붉은 머리칼의 여인.

그 붉은색이 달빛 아래 잠들었던 가비의 머리칼 위로 겹치던 것이 떠올랐다.

난…,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잊어버린 건가?

“…으으.”

반소가 낮게 신음했다. 찡그린 눈앞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가물거렸다. 흐릿한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나와 나가자. 지금이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익숙한 목소리. 가비였다.

아니, 그보다 가냘프고 유약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여인의 말투엔 불안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부탁이야, 반소….’

…날 알아?

‘너와 단 하루라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

여인의 음성에 물기가 어렸다.

‘반인반귀나 불로초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단 하루를 살아도 평범한 부부처럼….’

무슨…, 소리야.

반소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이건 현재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도 아니었고, 전생에 일부도 아니었다.

그럼 이건 대체…….

‘반소, 제발…….’

여인의 손이 제 옷깃을 잡는 게 느껴졌다. 아니, 보였다. 환상처럼. 아니, 아니다. 실제처럼.

혼란한 가운데 시선 끝으로 여인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자수가 놓인 신발과 비단 치마를 걸친 마른 몸. 어깨를 감싸고 길게 흘러내린 붉은색의 머리칼. 살짝 드러난 쇄골. 그 위의 가녀린 목. 갸름한 턱. 그리고……,

마침내 얼굴을 확인한 반소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때, 감옥 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환청이 아니라 현실의 소리였다.

터벅, 터벅, 터벅.

느린 걸음이 철창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미 고약에 절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철컹-

감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치며 부드러운 손길이 반소의 뺨을 감쌌다.

망상 또는 환각, 그 어디쯤에서 방금 본 얼굴.

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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