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반소….”
가비가 사슬에 묶여 축 늘어진 반소의 몸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여기저기 피가 굳은 상처 위로 무언가가 발라져 있었다. 사지를 마비시키는 고약이었다.
자신의 정체성과 그 힘을 모두 각성한 가비의 눈엔 그에 관한 약초의 배합이 모두 읽혔다. 그리고 정화하는 방법까지도.
자신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정신이 혼미한 건지.
흐릿하게 풀린 반소의 동공이 힘겹게 가비를 향했다.
그 뺨을 두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 어루만졌다.
시간이 없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만났던 천태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요, 천자비. 정말 잘 왔어요.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더는 병약한 척도, 쇠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살기를 품은 탁한 눈동자로 자신의 욕망을 선뜩하게 드러냈다. 그 얼굴을 직시하며 내쏘았다.
‘원하는 대로 살아줄 테니, 약속은 꼭 지켜.’
‘걱정말아요. 그리만 살아주면 관련된 자들의 목숨은 반드시 보장할 테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런 사악한 존재가 사람 간의 신의나 약속 따위를 지킬 리 없었다.
가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반소와 친우들의 목숨으로 협박하고 현과 합방을 강요할 게 틀림없었다. 목숨을 보장한다고 했지, 어떤 방식으로 살려둘지에 대한 확답은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날 지키는 일이야.”
반소의 얼굴을 감싸 안은 가비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넌…, 널 지켜.”
이제는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직면한 거라고.
때론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기도 하지만, 운명이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정해지는 거라고.
가비의 입술이 반소의 입술에 닿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스으으읍-
따뜻하고 온화한 기력(氣力)이 반소의 몸으로 흡수됐다. 마치 습자지가 물을 머금은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고약의 힘을 정화시켰다.
가비…….
사슬 끝에 매달린 반소의 손끝이 움찔했다. 뿌옇게 안개가 낀 듯 어지러웠던 정신이 조금씩, 개이는 게 느껴졌다.
조금, 조금만 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정인의 입술이었다.
정인의 손길이었다.
정인의 얼굴이었다.
가비, 가비야…….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었다.
그토록. 그토록.
두근.
순간 심장이 크게 반응했다.
두근. 두근.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가비가 한 걸음 멀어졌다. 가비가 미소 짓는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다려. 반드시 돌아올게.”
아니. 싫다.
이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그토록 오래 참아왔는데.
말을 남긴 가비가 감옥 밖으로 나갔다.
…가지 마.
반소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기다림’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이 반소의 심장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가지 마, 제발!
꼼짝할 수 없는 몸과 달리, 반소의 내면은 가비를 향한 몸부림으로 격분한 채 울부짖었다.
“…으으으윽.”
불현듯 왼쪽 가슴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통증이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흐헉, 헉, 헉,”
가쁜 숨이 토해졌다.
-번쩍!
부릅뜬 눈으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화아아악-
그 기억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갔다.
가비. 가비의 모습이 보였다.
태황궁에 발을 디딘 가비의 모습이-
태황국에서도 후미진 곳.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가비는 가족도 없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가비를 동정했다. 그러면서도 불길하다며 꺼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이 본 적 없는 붉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하늘이 내린, 천녀의 색이었다. 하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천족이란 하늘이 내린 혈통으로 보통의 인간과는 급이 달랐다. 사람들에게 태황궁은 단순한 궁이 아니라 천족이 머무는 무릉도원 같은 공간으로 여겨졌다. 해서 그들의 특징과 실물을 본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어쩌지? 오늘은 이것밖에 줄 게 없는데.’
가비가 씁쓸한 얼굴로 집에 찾아온 개와 고양이를 바라봤다. 간혹 떠돌이 동물들이 가비의 집을 찾아왔다. 허드렛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지만, 동물들이 찾아오면 꼭 먹을 걸 챙겨주었다. 그러다가 제 배를 곯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매혈꾼이 찾아왔다. 이렇게 구석진 곳까지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매혈꾼들은 젊은 여인들을 상대로 매혈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선 가비가 유일했고, 가비는 망설이지 않고 매혈을 했다. 그리고 받은 돈으로 오랜만에 동물들과 든든히 배를 채웠다.
그 후 보름 뒤.
이번엔 태황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천태비가 보냈다는 사람들은 그녀를 ‘천자비’가 될 천녀, 불로초라고 말했다.
믿을 수 없게도 가비는 그 길로 태황궁에 들었다. 동물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떠밀리듯 오게 되었다.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두려운 마음이 컸지만,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그녀에게 깍듯했다. 제 낭군이 될 거라는 천자는 금백색의 머리칼과 금안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대가 불로초군요. 내 짝이 될 사람. 어머니의 별점 이후로 난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려왔어요.’
천자의 말투는 다정했으면 눈빛은 따사로웠다. 하지만 가비는,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려워서 눈을 마주치는 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정체성을 깨닫자마자 휩쓸리듯 혼례를 올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런 생각이 커질 무렵. 반소를 만났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회색 눈.
사람들은 그를 반인반귀, 불길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비는 그가 두렵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언뜻 보면 무서웠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불쾌하군. 그 눈빛 말이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가비에게 그가 뱉은 첫마디였다. 경고성이 다분한 그 말에도, 가비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깊게 팬 그의 미간이 되레 한줄기 남아 있던 공포심마저 앗아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귀물경비대의 수장도, 결국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에.
그게 시작이었다.
한두 번 겹친 우연한 만남이, 어느 순간 필연이 되어버린 것은.
가비의 눈길이 그를 좇고, 그의 눈길이 가비를 좇았다.
가비의 걸음이 그를 찾고, 그의 걸음이 가비를 찾았다.
그러는 사이 우연은 인연이 되었고, 인연은 운명이 되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랑은 깊어졌다.
그리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황은 뒤틀렸다.
끝내 가비는 천태비를 찾아가 천자와 혼인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천태비는 분노했고, 가비를 자신의 밀궁에 가두었다. 길일을 택해 혼례 날짜를 잡아두었지만, 그보다 일찍 합방을 추진했다.
그곳에서 가비는 불로초의 쓰임새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천태비의 손아귀를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가비는 내 것이다. 네 것이 아니라.’
반소가 감쪽같이 사라진 가비의 행방을 쫓던 중, 현을 만나 뇌까렸다.
현은 코웃음을 쳤다.
‘형님으로 대우를 해주는 건 여기까집니다. 감히 천자비를 넘보다니요.’
‘가비는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럴까요? 반인반귀의 짝과 천자비 중 무얼 택할지 두고 보면 알겠죠.’
‘당장 가비를 내놔라.’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역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가비를 사이에 둔 싸움은 누구 하나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쉬이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반소는 밀궁에 갇힌 가비를 찾아냈고, 그곳에서 자신이 잊고 있던 기억에 일부를 끄집어냈다. 바로 제 어머니의 죽음과 천태비의 정체를.
‘으아아악!’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반소를 덮쳤다. 그 길로 귀물경비대를 소집해 천태비궁으로 쳐들어갔다. 분노는 반소의 두 눈을 멀게 했다. 만류하는 가비조차 보지 못했다.
위기를 느낀 천태비가 협상안을 내놨다.
가비 하나만을 얻고 태황궁을 떠나라고 했다. 천자의 자리를 포함해 모두 버리고 나가라고.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더는 두 사람을 찾지도 속박하지도 않겠다고. 그런 구질구질한 회유책에 조소를 날렸다.
필요 없었다. 한 발짝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내가 왜!
하늘의 혈통이자 태황국의 천자가 바로 나인데!
생각해보면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천자임을 증명하고 지방 도시에 있는 원들을 모아 천태비를 무너뜨릴 시간이. 허나 성급했다. 그걸 알았기에 가비도 애원한 것이었다.
‘부탁이야, 반소…. 나와 나가자. 지금이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아니.’
반소는 단호히 말했다.
‘둘 다 갖겠다. 너도. 천자의 자리도.’
위험하고 오만한 자신감이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결국 분노는 화를 불렀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치달았다.
반역을 일으킨 역적으로 몰려, 부상을 입은 채 도망치듯 태황궁을 달아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비는 천자에게 시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다시 태황궁을 찾았을 때.
지방 도시의 원들과 합심하여 궁 벽을 무너뜨리고 궁 문을 부수었을 때.
가비는 꺼져가는 생명으로 원기둥에 매달려 반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두 눈을 가린 분노가 서서히 걷히는 걸 느꼈다.
‘가비……,’
반소의 부릅뜬 눈이 가비를 바라봤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와 까칠한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제 그만해 반소…. 내 목숨은 이걸로 다했으니.’
위태로운 목소리. 사그라드는 숨결.
‘……가비야!’
반소는 눈앞에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비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부디 현명한 천자가 되어,
부서지고 망가진 태황국을 재건해 주길….
자애로운 여인을 만나 네가 입은 상처가 치유되길.
날, 잊어주길…….
무언으로 전한 말은 그대로 가비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툭, 떨구어진 얼굴에 반소가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안돼애애! 안돼! 안돼! 안…!’
앙상하게 마른 가비의 몸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창자가 끊어지고 폐부가 꿰뚫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으흐흐흑.’
정인의 몸은 빠르게 식어갔다. 더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날, 천태비와 현은 참형에 처했지만, 반소는 삶을 잃었다.
자신의 정체성도 찾고 천자의 자리도 찾았지만, 가비를 잃음으로써 모든 걸 잃어버렸다.
나는 왜…. 널 보지 못했을까.
네 눈에 담겨 있던 간절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평범하게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다던 너의 바람을.
나는 왜…….
피폐해지는 반소와 달리 태황국은 시간이 흘러 재건되고 풍족함을 영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물었다.
-소원이 무어냐.
이는 수백 년간 사람을 해친 존재들을 몰아내고 태황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상이자, 대가라고 하였다.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하고도 자신만은 속 빈 강정으로 살아가는, 그런 반소가 안쓰러워서 주는 하늘의 자비이기도 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시간을…, 가비를 돌려주십시오. 제발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제발, 제발…….
반소는 바닥에 웅크린 채 숨죽여 울었다.
그 눈물이 오장육부를 녹일 듯이 아파, 하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허나 모든 일엔 대가가 따랐다. 반소의 눈을 가린 분노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듯이.
-천신으로 살아가거라. 그렇게 또 다른 세계의 태황국으로 가, 그곳을 지키는 네 명의 영물들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일깨우거라.
그것이 회귀를 조건으로 하늘이 내린 과제였다.
하여 지금의 시간을 멈추고 과제를 풀기 위한 천신이 되려면, 그걸 향한 관문을 넘어야 했다.
죽음.
인간이 가진 제일 큰 두려움이자 공포심이었다.
그걸 깨기 위해 반소는, 하늘이 내려준 십(十)자 형태의 검을 제 왼쪽 가슴 심장 위에 댔다.
관문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하늘이 물었다.
-지금의 기억을 갖고 회귀할 순 없다.
‘…상관없습니다.’
-기억이 없는 상태로 회귀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텐데도?
그걸 타파할 만큼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이는 이미 회귀라는 기회를 얻을만한 자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반소는 대답 대신 제 심장에 검을 꽂았다. 삼생을 걸고 회귀를 약속받아, 과제를 수행하겠다는 맹세였다.
간절히 염원했다.
부디 다시 시간이 돌아온다면, 내가 널 먼저 찾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널 먼저 보기를.
그동안 넌…,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네가 꿈꾸던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를.
불로초로서 각성하는 일이 없기를.
날 만나기 전까지는…….
오직 지켜주기 위해 그것만을 바랐다.
널 갖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널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 남기겠다고.
반소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심장이 뚫리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침내 반소는 천신으로 태어나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또 다른 태황국에 떨어졌다.
그곳은 아직 태황국이라는 이름도 없는, 그저 땅덩어리에 불과한 곳이었다.
사방위로 나뉜 그 땅은 네 명의 영물들이 다스리고 있었고, 천신이 된 반소는 하늘과 약속한 대로 그들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일깨웠다.
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과제를 완수한 뒤 소원을 이뤘다.
회귀.
반소는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다시 생(生)을 시작했다. 날 때부터 있던 왼쪽 가슴의 흉터는 기억에 대한 봉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바람대로 가비는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불로초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두 사람은, 강력한 운명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반소는 가슴에 봉인의 표식을 새긴 채, 가비는 초경을 통해 불로초로서의 각성을 앞둔 채.
그렇게 이 땅에서 다시 재회했다.
누구도 찾지 않는 귀물의 땅에서.
서로가 서로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
“…가비.”
봉인이 풀리고 모든 기억이 살아난 반소가 가비를 불렀다.
“가비, 가비야…….”
이토록 아픈 가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가비를 볼 때마다 욱신댔던 심장을 그 반응을.
뜨거운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을 때 흘리던 차가운 분노의 눈물과는 달랐다.
지켜야 한다.
그 한 가지 열망이 반소의 전신을 불태우듯 달구었다.
“…으아아아아!!”
밀궁을 울리는 사자후와 함께 팔목을 옥죄고 있던 사슬이 터져나갔다.
콰창-!
“…하아, 하아.”
사슬의 잔해를 벗겨낸 반소가 어깻숨을 몰아쉬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끝이 금백색을 띠었다.
철창 너머를 노려보는 눈이, 금안으로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