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86화 (86/95)

[86화]

황폐하고 삭막한 땅에 우뚝 솟은 초록색의 나무 한 그루는 무척이나 기이했다. 기이한 것을 떠나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 주변으로는 푸른 잔디가 자잘하게 돋아 있었다.

가비는 그 가운데 앉아 제 곁에 엎드려있는 귀물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끄극, 끅-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편안해하는 것도.

“…그래.”

가비가 그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힘들었겠다.”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내느라.

폭염이 오면 오는 대로, 혹한이 불면 부는 대로.

그러다 배가 곯아 죽게 생겼으면 하는 수 없이 경계를 넘어.

그런 고통을 이 땅이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 반복해 왔다. 불쌍하게도.

“…생각보다 순하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연화가 쭈뼛쭈뼛 다가와 가비의 곁에 앉았다. 처음 볼 땐 징그럽기만 하던 귀물의 생김새가 자꾸 보니 익숙해졌다. 그건 아마도 귀물들의 태도가 온순하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긴 더듬이로 가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턱을 비비는 모습은, 마을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나 참, 살다 살다.”

광경을 지켜보던 곤과 풍 그리고 귀물경비대도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공격을 받은 직후 꼬박 하루가 지나서까지 귀물들은 가비의 주변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긴 건, 다른 귀물들까지 몰려들어 이 일대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나같이 평온한 기색으로 얌전하게 굴었다.

“그동안 배가 너무 고파서 힘들었대요. 죽을 만큼.”

그건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생존이, 가비에게서 해결됐다. 가비가 가진 힘이 나무를 건강하게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나타난 생명의 근원.

그것만으로도 귀물들이 가비에게 순종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파리가 울창한 나무에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들이 잔뜩 열려 있었다. 귀물들은 그 열매를 씹어 삼켰다. 한두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른지 더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이 정도로도 충분한걸.

그마저도 없었기에 경계를 넘어 사람을 공격했을 녀석들을 생각하니 입안이 씁쓸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 역시 안타까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답은 공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귀물들의 감정과 언어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언어를 귀물들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러한 매개체가 된다면 공생과 공존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러한 능력은 천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나무 몸통에 두 손을 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맥으로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으드드드드-

저만치 떨어져 있던 검은 나무가 커다랗게 진동하며 진갈색의 몸통으로 변화했다. 이내 곧 푸른 잎사귀가 돋아나며 커다란 열매가 열렸다.

“미, 미친…!”

놀라운 광경에 곤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남발했다.

눈을 뜬 가비가 장하다는 듯이 나무를 토닥이며 쓰다듬었다. 각성한 순간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조절해야 할지에 대한 모든 정보가 일깨워졌다. 마치 어딘가에 각인되어있던 것들이 튀어나오듯, 장막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느낀바, 이 땅의 혈맥은 하나였다. 하여 모든 나무의 뿌리가 하나로 연결돼 있었고, 느리지만 시간만 충분히 들인다면 메마른 대지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불로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비님! 그러다가 몸 축나십니다! 그만하십시오!”

곤이 뛰어와 만류했다.

“괜찮아요.”

가비가 곤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건…, 육체적인 힘이 아니에요. 비워도 계속해서 채워지는, 무형의 힘에 가까워요.”

가비가 불그스름해진 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제 뒤를 졸졸 따라온 귀물들을 돌아보며 자세를 낮췄다. 반들거리는 두 눈을 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너희들의 우두머리는 누구야?’

반소에게 들었던 귀물의 제일 큰 특징은 두 가지였다.

귀물들은 동족을 먹지 않는다.

귀물들은 서열로 움직인다.

귀물들이 무어라 답을 전했다. 가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전에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던 귀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하더니 다시 답을 전했다.

“…….”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이었다.

천태비….

역시 사람이 아니었어.

귀물이었다. 그것도 제일 높은 서열의 우두머리.

가비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윤을 비롯한 죄 없는 희생자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용서할 수 없었다. 천태비가 귀물이라면 천자 또한 귀물이었다. 이제야 그 원인 모를 병증들이 이해됐다. 인두겁을 쓴 괴물들.

당장 귀물경비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빨리 태황궁으로 돌아가야 해.

가비를 천자비로 두려는 목적은 하나였다. 아마도 아이. 불로초의 능력은 핏줄로 이어지니까.

게다가 나흘째인 오늘까지도 반소의 소식은 없었고,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요.”

가비의 말에 연화를 비롯한 귀물경비대 전원이 모였다.

가비가 차분하게 모든 상황을 전달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했다.

곤이 발끈했다.

“안 됩니다! 혼자 가시겠다니요! 절대로 안 됩니다!”

“혼자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적당히 시간을 두고 따라와 달라는 얘기예요.”

“어쨌거나 궁에는 혼자 들어가시겠다는 거 아닙니까! 무슨 일을 당하실 줄 알고요!”

곤이 흥분하며 펄쩍 뛰자, 주변에 있던 귀물들이 흠칫했다.

가비가 안심하라는 듯 그들을 보며 웃어주었다.

“…앉아.”

잠자코 있던 풍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무튼 난 반댑니다! 안 돼요, 안돼!”

곤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풍이 침착한 눈길로 물었다.

“가비님의 말씀대로라면…. 천태비, 아니 그 귀물들이 가비님은 해치지 않는다는 겁니까?”

“절대로요. 장담할 수 있어요.”

자신을 통해 불로불사를 이루려는 자들이었다. 위험한 건 자신이 아니라 반소였다.

“들어가자마자 반소의 안위부터 확인할 생각이에요.”

“그렇다 해도 저희만으로는 버겁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풍은 현실을 직시했다.

“가비님이 반소님을 운 좋게 구하신다고 해도, 그걸 받쳐줄 병력이 저희에겐 없어요.”

“야아! 너 귀물경비대 맞아?”

곤이 다시 발끈했다.

“우대장이란 놈이 왜 이렇게 약해빠진 소릴…!”

“앉아.”

풍이 무겁게 경고했다.

“…우라질,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투덜대며 앉는 곤을 두고, 풍이 진지한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자칫,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알아요.”

가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우대장님께선 가장 먼저 가까운 지방 도시로 가서 원(元)들을 유인해주세요. 직접 와서 봐야 믿을 테니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법이다. 그럼 이 사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태황국 전체에 퍼뜨릴 수 있었다.

“그 후 좌대장님과 나머지 귀물경비대들은 제가 태황궁에 들어간 뒤, 시간 차이를 두고 공격해 주시고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수적으로 불리…,”

“괜찮아요.”

가비가 미소지었다.

“우리 편은 충분하니까.”

의도를 알아챈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가비가 드넓은 땅과 주변을 가득 메운 귀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내가 이 땅의 주인, 이 서열의 우두머리예요.”

천태비가 간과한 게 있었다. 천녀로서 선택받은 불로초의 힘은, 단순히 불로불사만이 아니라는 것.

과거의 은수만이 썼던 그 기록서는 지극히 평면적일 뿐이었다.

가비는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 * *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우대장인 풍과 몇 명의 귀물경비대는 가까운 지방 도시로 향했고, 가비와 곤은 귀물들을 선별했다. 귀물들의 급수는 제각각이었다. 그중 자기방어가 가능하고 공격 능력이 있는 존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서열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도움이라니. 귀물들에겐 다소 낯설고 생소한 명령 방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귀물들은 자발적으로 가비를 따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 때문에 기대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추려졌다.

“난 뭐 도울 게 없을까?”

상황을 지켜보던 연화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가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연화야. 나랑 함께 태황궁에 가줄 수 있어?”

“태황궁에?”

“겁나면 안 가도 돼. 그냥 주막에 남아있어도.”

“아니야.”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갈래. 나도 뭔가 하고 싶어.”

벌써 가비에게 여러 번 목숨을 빚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거라도 하고 싶었다. 빨리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다시 어의로서 태황궁에 머물고 싶었다. 동생들도 보고 싶었고.

연화의 단호한 눈빛에 가비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네 등분으로 접은 종이였다.

“그럼 이걸 맡아줘.”

“이게 뭐야?”

종이를 펼쳐본 연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비야, 너…….”

가비가 연화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잘 부탁해.”

연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가비의 결심이 너무도 완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