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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79화 (79/95)

[79화]

잠깐의 침묵. 그 팽팽한 긴장감을 끊으며 현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삶을, 뒤엎어요? 지금 역모를 저지르겠단 말씀입니까?”

현의 말을 들은 장곡이 피가 흐르는 팔을 부여잡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역모다! 역모가 일어났다!”

장곡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양궁 전체로 울려 퍼졌다.

뒤를 힐끔 돌아본 반소가 무표정한 얼굴로 뇌까렸다.

“그렇다는군.”

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대관절 반인반귀 주제에. 더러운 피를 갖고 태어난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나서.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감히…, 천자인 내게 칼을 겨누겠다는 것이냐?”

감히…. 감히!

“네깟 게 내 것을 탐내?”

“누가 네 것이냐. 가비는 내 사람이다. 군자의 탈을 쓰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네 놈 것이 아니라, 내가 연모하는 여인. 내 사람.”

자격지심이란 말에 분노한 듯 현이 온몸을 떨었다.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 벽에 걸린 제 검을 뽑아 들었다.

챙-!

부딪친 쇠붙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스아악-

반소의 반월도가 미끄러지듯, 현의 검 위를 긁었다. 현이 뒤로 물러나자 카앙! 힘있게 내리찍었다.

“…읏!”

현이 칼을 놓치며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잘못 놓친 탓에 손을 베었다.

뚝. 뚝.

바닥으로 피가 떨어졌다. 헌데 그 빛깔이 붉은색이 아닌 거무죽죽한 색이었다. 그걸 본 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소도 미심쩍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 틈을 타, 가비가 반소의 손을 낚아챘다.

“가자!”

먼저 잡아끈 건 가비였지만, 앞서 달린 건 반소였다.

둘은 곧장 입구로 향했다. 장곡의 외침을 들은 경비대들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반소가 가비의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막다른 곳, 후미진 장소로 내몰렸다. 덩그러니 뚫린 창문으로 반소가 발을 올렸다. 달빛조차 숨어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날 믿고 뛰어내려.”

반소가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반소!”

놀란 가비가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파사삭-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했다.

“잡아라! 역적이다!”

경비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가비가 다시 창문 아래로 시선을 돌렸을 때,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반소가 있었다. 무사히 착지한 그가 가비를 올려다보며 두 팔을 벌렸다.

입술을 꾹 다문 가비가 창문에 발을 걸쳤다. 사방이 무간지옥이라 해도 저 품만은 자신을 지켜줄 것이었다.

결심이나 각오 따윈 없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일순- 조금 커진 반소의 눈과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아주 느리게 두 눈에 들어와 박혔다.

풀썩-!

가슴과 가슴이 부딪치며 단단한 두 팔이 자신을 온전히 감쌌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 달렸다.

반소의 손을 잡은 가비가 그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굵은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태황궁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멈춰라!”

하지만 양궁을 벗어나자마자 깔린 경비대가 길을 막았다.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매서운 눈으로 반소를 향해 칼을 뻗었다. 더는 야왕이라는 신분으로 그를 보지 않음이었다. 하여 단칼로 벨 듯이 소리 질렀다.

“천자님을 공격하고 천자비님을 납치한 역적 놈이다! 잡아라!”

불같은 외침에 경비대들이 달려들었다.

챙! 챙! 카앙! 챙!

비수처럼 날아오는 은빛 칼날에 반소의 반월도가 빠르게 회전했다. 가비를 등 뒤에 붙여놓고 뇌수처럼 움직였다. 가비 역시 한 몸처럼 그에게 붙어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서슬 퍼런 반월도가 섬광처럼 움직이니, 근접전으로는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포하라 하였으니 살려만 놓으면 될 터. 나가떨어지는 경비대를 보며 경비대장이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활! 활을 준비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활을 겨눴다. 경비대장이 손짓하자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반소에게로 향했다.

쐐애애액-

카카카캉-!

대부분은 반월도를 맞고 튕겨 나갔으나 그중 하나가 가비의 왼쪽 팔뚝에 꽂혔다.

“…흡!”

가비가 비명을 삼키며 비틀거렸다. 반소가 놀란 얼굴로 가비를 받쳤다.

“…괜찮아.”

가비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가비로 인해 반소의 움직임이 멈추자 경비대장이 손을 올려 공격을 중지했다. 그의 입가로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천자비님까지 다치시게 하다니. 네 놈 죄가 무척이나 크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하면 내 선처를 베풀어-”

“역시 네 놈은 입만 살았군.”

반소가 가비를 뒤로 감추며 나직이 내뱉었다.

“나와 겨뤄서 이기면 항복해 주마.”

반소의 반월도가 경비대장을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경비대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주춤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망신살이었다. 허나 반소를 일대일로 상대할 배짱은 없었다.

“이, 이 괴물 놈이 지금 날 뭐로 보고…,”

때마침, 가비를 찾느라 퍼져 있던 주경대와 그 경비대장이 자리에 당도했다. 덕분에 난감한 상황을 모면한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천자님을 해하고 천자비님까지 위협하는 역적 놈이요!”

그 말에 경비대 모두가 다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수가 너무 많아. 그리고 가비는 다쳤다.

반소의 눈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저 멀리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떼를 바라봤다.

반소가 반월도에 제 손바닥을 긁어 피를 냈다.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그것을 보고 기겁했다.

“노, 놈이 주술력을 쓴다!”

주경대의 경비대장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야경대의 경비대장을 돌아봤다.

“놈이, 저놈이 주술력을 쓸 수 있단 말이오!”

“지금 무슨 말을-”

순간, 반소의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올라왔다. 새어 나온 핏방울과 기묘하게 엉기더니, 사아악- 반월도로 스며들었다.

번쩍-

주술력을 머금은 반월도에서 날 선 쪽빛이 감돌았다.

“…허억!”

경비대장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경비대 모두가 그 광경을 목도하고 놀란 숨을 들이켰다.

“자, 잡아라! 놈을 잡아야만 한다!”

먼저 정신을 차린 주경대의 경비대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쐐애액-

화살이 다시 날아들었고 뒤이어 날붙이도 떼를 지어 덤벼들었다.

우우웅-

반소의 반월도에서 기괴한 진동이 울렸다. 주술력까지 머금어 몇 배로 무거워진 반월도를 반소가 낮은 신음과 함께 힘있게 들어 올렸다.

후아앙-!

허공을 가르자 그 주변까지 힘이 뻗어 몰려드는 경비대를 한꺼번에 쳐냈다.

“으아악!”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경비대를 보며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나, 반소는 알고 있었다. 이 힘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주술력은 제가 가진 힘의 수십 수백 배를 끌어 올려 폭발적으로 사용하면 빠르게 소진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채워지지만,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찰나의 순간이 생(生)과 사(死)를 결정지었다.

마침내 저 멀리 보이던 검은 그림자 떼가 가까워졌다. 말을 탄 귀물경비대였다.

“반소님-!”

곤이 다급하면서도 우렁찬 음성으로 반소를 외쳐 불렀다.

반소의 반월도가 커다랗게 반원을 그렸다. 힘의 파장으로 잠시간 벽을 세워 경비대들이 쉬이 들어올 수 없게끔 결계를 쳤다.

그리고 말을 탄 귀물경비대가 그 벽을 훌쩍 뛰어넘어 반소가 있는 영역으로 들어왔다. 마치 말들이 연달아 날아오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타다닥-!

숨 가쁘게 달려온 귀물경비대가 반소를 보호하듯 진(陣)을 쳤다.

안돼. 주술력은 곧 꺼지고 경비대의 수는 아직 많다. 제아무리 귀물경비대라 해도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어. 게다가……!

반소가 옆에 있는 가비를 돌아봤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애써 두 눈을 부릅뜬 채 꼿꼿이 서 있었지만 거듭된 체력 소모에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 보였다.

“가비야.”

나직한 부름에 가비가 반소를 돌아봤다. 입술이 부딪쳤다. 반소가 고개를 꺾어 입술을 깊게 맞물렸다.

“……읍!”

벼락같은 통증이 왼쪽 팔에서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반소의 입술을 깨물었다.

서서히 물러난 반소가 잘했다는 듯이 가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가비는 팔뚝에 꽂혀 있던 화살이 뽑혀 나간 것을 알았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

반소가 틈을 주지 않고 가비를 번쩍 안아 말에 태웠다. 곤이 탄 말이었다.

“가라.”

북쪽 땅으로.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가.”

제일 위험하지만, 그래서 안전한 그곳으로.

“명령이다.”

가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가비뿐 아니라 귀물경비대 전원이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허나 수장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뜻을 이해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해서 말고삐를 쥐었다.

“잠깐만!”

가비가 놀라 소리쳤다.

“안돼, 혼자 갈 수 없어!”

“네가 왜 혼자야. 귀물경비대가…,”

“네가 없으면 혼자야!”

가비가 소리 질렀다. 목구멍으로 울음이 차올랐다.

“네가 없으면 난……,”

이 땅에 떨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반소가 있었기에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널 두고 어떻게 가…….

말 대신 눈물이 떨어졌다. 어깨를 잠식한 통증마저 잊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허물어진 가비를 추스르며 반소가 두 손을 꼭 잡아 왔다. 소중히 감싸 입을 맞췄다. 팔찌를 주던 그날 밤처럼.

“난 죽지 않는다.”

널 지키기 위해 날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허니 반드시 살 것이다. 살아서 이 상황을 타파하고 가비를 다시 볼 것이었다.

반소의 확고한 결심에, 가비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너와 내가 과거에 어떤 인연을 맺었든, 우린 우리야. 반드시 살아 돌아와.”

반소의 입가로 설핏 미소가 어렸다. 가비의 손을 놓은 반소가 곤을 올려다봤다.

“지켜라. 내가 연모하는, 내 정인이다.”

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옆구리를 찼다.

“이렷!”

투다다다-

곤을 필두로 연화를 뒤에 태운 풍이 출발했고, 그 뒤를 귀물경비대 전체가 따랐다.

어둠 속으로 서로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비와 반소는 서로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내 주술력으로 세운 결계가 사라지고 벽마저 허물어졌다.

무심한 얼굴로 돌아선 반소에게 올가미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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