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현이 달려들었다. 가비가 아슬아슬하게 손길을 피했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움켜쥔 채 재빨리 탁자가 있는 곳으로 줄행랑쳤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현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렇게 재밌다니.
어쩐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심심치 않게 하는 아이였다. 평생이 즐거울 것 같았다. 때때로 무료하게 느껴지던 궁 생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있어야 할 천자로서의 가면도. 그 모든 걸 가비 앞에서는 죄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탁자를 방패 삼아 서 있는 가비를 향해, 현이 천천히 돌아섰다.
형님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과연 제 밑에 깔려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또 그런 널 형님이, 아니 그놈이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지도.
현이 음침한 얼굴로 가비를 바라봤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눈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가비는 현의 눈빛에서 또 다른 눈빛을 보았다.
마치 데자뷔를 보듯, 또는 파노라마가 연상되듯. 가비의 눈앞으로 어떠한 장면이 빠르게 펼쳐졌다. 그 까마득한 찰나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었다.
장소는 이곳, 현의 침소였다.
‘놈은 오지 않는다.’
눈 밑이 검게 변한 현이 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비는 이것이 자신의 전생, 과거임을 알았다.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머리카락 색은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현은 지금보다 어둡고 암울한 얼굴이었다.
과거 속의 현이, 과거 속의 가비를 향해 말했다.
‘놈이 택한 건, 네가 아니라 이 자리. 천자니까.’
‘아니…, 아니야.’
가비가 고개를 저었다. 태황궁을 도망친 건 반소, 그의 뜻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밀려 위험에 처한 그를 곤과 풍이 데리고 달아난 것이었다.
하지만 현은 그것을 부정했다.
‘그래. 그리 믿고 싶겠지.’
현이 비소를 날리며 중얼댔다.
‘헌데 꼴을 봐라. 어찌 되었는지. 반역을 일으켜서 태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그건 너와 네 어미가 욕심을 내었기 때문이다!’
가비가 반소를 두둔하듯 소리쳤다.
‘해서 나와 내 어미가 기회를 준 것이다. 피차 쓸데없는 살상으로 피를 보느니 타협을 하자고.’
조건은 하나였다. 모두 내려놓은 채 가비만 데리고 태황궁을 떠나는 것.
그건 현과 천태비의 입장에서도 큰 손해였다. 불로초인 가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었으니.
허나 이미 터지기 시작한 반소의 주술력은 시간이 갈수록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었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다 다시 놈을 공격하고 죽인 뒤, 불로초인 가비를 차지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가비를 그토록 사랑한다던 놈은, 가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역모를 일으켰다.
‘하긴. 어떤 사내가 권력을 놓칠까. 그것도 하늘이 내린 자리, 천자를. 결국 놈에게 넌, 권력보다도 못한 계집이고 욕망이다.’
가비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간절히 바랐다. 단 하루만이라도, 제발 단 하루만이라도 반소와 평범한 하루를 살아보기를.
천족과 천자, 불로초라는 모든 허울을 벗어던지고 그저 사내와 여인으로 부부의 정을 나누며 살아보기를. 그렇게 부탁했었다.
훗날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와 생을 위협한다 해도, 그리 살다 가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허나 반소는 단호했다.
‘둘 다 갖겠다. 너도. 천자의 자리도.’
처음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그런 욕망을 본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고, 무엇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과욕이었다. 그것이 어떤 상황을 초래한다 해도. 마치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역모를 준비하는 그의 눈에 이미 이성이란 없었다.
‘이제 놈이 다시 오겠지. 허면 여긴 폐허가 될 테고.’
이미 피 냄새가 가득한 태황궁에 또 한 번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달아난 반소는 몸을 추스른 후 지방 도시 원들을 소집해, 현과 천태비의 정체를 알리고 다시 쳐들어올 것이었다. 그땐 제아무리 천태비라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을 예견한 것처럼 현의 입매가 비틀렸다.
‘놈은 다 가질 수 없다. 태황국을 얻는 대신 널 잃게 되겠지. 난 태황국을 잃는 대신 널 가질 테고.’
현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가비를 응시했다.
‘어쩌면 널 미끼로 놈을 죽일 수도 있고 말이야.’
가비가 뒷걸음질 쳤다.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안…, 돼.’
가비가 고개를 저으며 달음질쳤다.
‘…악!’
머리채가 잡혔다. 붉게 일렁이는 머리카락을 현이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대로 침상까지 끌고 갔다.
‘제발…!’
가비가 애원했다.
‘안돼…, 안…!’
옷이 뜯기고 몸이 짓눌렸다. 엄청난 압박과 통증이 느껴졌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방안을 울렸지만 가비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깨달은 순간, 반항하던 몸이 축 늘어졌다. 공허한 가비의 눈이 흔들리는 천장을 바라봤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허억, 헉!”
현실로 돌아온 가비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 이곳,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생생하게 보았다. 두 눈으로 확인했다.
가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현을 바라봤다. 자신이 꾸었던 꿈은, 모두 그 밤과 연결돼 있었다.
잔인하게 짓밟힌 밤.
이곳에 갇혀 하루하루 능욕을 당하며 반소를 기다렸다. 기다리며 죽어갔다. 이미 피폐해진 마음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렇게 생명이 꺼져갈 때, 미끼로 던져졌다. 원기둥에 묶여 전쟁의 참상을 겪고 있는 태황궁을 바라봤다.
이제 그만해 반소….
내 목숨은 이걸로 다했으니.
자신을 구하려는 반소를 보며 마지막으로 바랐다.
부디 현명한 천자가 되어,
부서지고 망가진 태황국을 재건해 주길….
자애로운 여인을 만나 네가 입은 상처가 치유되길.
날, 잊어주길…….
가물거리는 시선 끝에 잡힌 건 자신을 바라보는 반소의 얼굴이었다. 절망한 얼굴이 처참하게 우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화염(火焰). 부옇게 솟아오르는 먼지바람. 비명. 혈투.
다른 것은 후회가 없었다. 반소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 것.
죽음을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허나 생(生)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두 눈이, 끝내 연모하는 사내의 절망 어린 표정과 불타오르는 태황국의 전경이라는 게 못내 가슴 아프고 슬펐다.
“아…, 하아,”
가비가 가슴을 뜯으며 거칠게 호흡했다. 심장이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과거 자신이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는지, 눈물이 나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거가 왜 다시 반복되고 있는지.
“아니…, 아니야.”
가비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절대로 아니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전생인지, 회귀인지, 그도 아니면 환생이나 시공간의 뒤틀림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하나였다.
“…달라. 난.”
자신은 과거의 은가비가 아니었다. 연약하게 꺾이고 무너지지 않았다. 반소 역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결코, 그럴 리 없어.
가비가 젖은 눈에 힘을 주고 현을 직시했다.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관망하는 그를 향해, 낮게 씹어 뱉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가비가 뒤로 물러나 창문에 엉덩이를 걸쳤다.
“…하.”
현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경멸하는 얼굴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가비가 놀랍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그래. 이래서 더 갖고 싶은 거다. 뭘 해도 기대 이상이니까.”
저벅-
현이 한걸음 다가왔다.
가비가 입술을 물며 창밖을 힐끔 돌아봤다. 역시나.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질 수 있겠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되면 시간은 벌 수 있을 테니까.
각오하며 뛰어내리려던 그때,
콰앙-!
무언가 부서지는 굉음이 들렸다. 가비와 현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반으로 쪼개진 문짝이 쓰러지고 장곡이 밀려 들어왔다. 그 뒤에는 반소가 서 있었다.
“반소!”
가비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반소의 무감한 시선이 창문에 걸터앉은 가비를 향했다가, 느리게 현에게로 향했다.
뒤로 자빠져 있던 장곡이 반소를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감히 천자님의 침소에 무기를…!”
스악-
서슬 퍼런 반월도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끄, 끄악!”
순식간의 일이었다. 당한 사람조차도 뒤늦게 반응할 정도로.
왼쪽 팔이 잘려나간 장곡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금세 바닥은 피바다가 되었다.
반소의 싸늘한 눈이 현을 응시했다.
“선을 넘었다.”
여러 번 경고했다. 눈빛으로. 무언으로.
그걸 알고도 무시한 건 현이었다.
“해서, 내가 살아온 삶을 뒤엎기로 했다.”
결심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더는 두고 보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