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얼마나 달렸을까. 피부에 닿는 바람결이 사뭇 달랐다.
가비가 가는 눈을 떴다. 가물거리는 눈앞으로 멀리, 북쪽 땅의 경계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곤이 물었다.
“괜찮아요…. 어서 가요.”
가비가 힘겨운 목소리로 답했다.
곤이 가비를 추켜 안았다. 더는 가비를 망아지로도, 은 어의로도 보지 않았다.
반소가 연모하는, 반소의 정인으로 추대할 뿐이었다.
잠시 멈췄다 가야 하나?
가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미 몸은 힘없이 기울어져 간신히 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맞닿은 등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풍과 함께 말을 타고 있는 연화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는 수없이 말을 세울까 손을 올리는데, 가비가 속삭였다.
“좌대장님….”
가느다란 손가락이 곤의 옷소매를 당겼다.
“그냥, 가요….”
반소의 뜻대로. 그가 말한 대로.
금방이라 의식을 잃을 듯 나약한 음성과 눈빛인데도, 따를 수밖에 없는 무언의 힘이 있었다. 곤은 하는 수 없이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빨라진 곤을 따라 풍과 귀물경비대도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해가 질 무렵. 경계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에 들러 주막을 찾았다. 귀물경비대가 경계에 있는 동안 말을 맡아주고 관리해주는 곳이었다. 태황궁에서 일어난 소란이 제일 늦게 당도할 곳이기도 했다.
주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경계에 들른 귀물경비대에게 쉴 곳을 내주고 식사부터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귀물들이 활개를 치려면 초가을이나 돼야 할 텐데.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몇 달씩이나 일찍 어쩐 일이람?
주인이 긴장한 얼굴로 오가며, 곤의 무릎을 베고 누운 가비를 힐끔거렸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밥상 십수 개를 방으로 들여보낸 주인이 문을 닫고 나갔다.
무거운 침묵 끝에, 풍이 먼저 밥상을 제 앞으로 끌었다.
“든든히들 먹어라. 새벽에 나가야 하니.”
밤을 지새우고 동이 틀 무렵, 경계를 넘기로 했다.
태황국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그곳.
귀물의 땅에서 반소를 기다려야 했다.
허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풍은 조용히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반년을 머물 작정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도 힘든 곳이었다. 헌데 지금은 각자가 가진 무기와 말, 식량을 조금 살 수 있는 돈 몇 푼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귀물의 땅은 사면초가에 몰린 막다른 선택지였다.
하지만 반소가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명확했다. 제아무리 태황궁의 경비대라도 귀물의 땅은 쉽게 들어올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간혹 목숨을 걸고 그곳에 묻혀 있는 보석을 캐려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수도에서 벌어지는 귀물 사건으로 씨가 말랐다고 했다.
결국, 죽음의 땅으로 불리는 그곳을 제일 잘 아는 것도 귀물경비대였고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귀물경비대 뿐이었다. 그건 귀물경비대를 향한 반소의 믿음이기도 했다.
“그래. 먹자. 먹어둬야 한다.”
곤도 애써 밥상을 끌어당기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 말에 모두 밥상머리 앞으로 다가앉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벽 쪽에 기대앉아 있던 연화도 겨우 한술 떠 입에 넣었다. 그러다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듣고 냉큼 가비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마를 짚어보니 아까보다 열이 심했다. 화살을 맞은 부위에 염(炎)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약이 필요해요.”
연화가 곤과 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러다 일 나겠어요.”
사람 몸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을까 싶게 뜨거웠다. 연화의 다급한 요청에 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한테 약이 있는지 물어보고 오겠소.”
그때 가비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아니야….”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가려는 풍을 만류했다.
연화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은갑아. 너 큰일 나. 네 몸 지금 불덩이란 말이야.”
“괜…, 찮아. 연화야…. 나 지금….”
몸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마치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몸속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고통이, 제 몸에 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자가 치유되는 과정이야.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고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은데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걱정마.”
가비가 애써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날 믿어…. 나 정말, 괜찮아….”
톡. 톡.
가비의 손가락이 연화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가비의 속삭임을 듣고 있던 귀물경비대가 놀란 숨을 삼켰다. 특히 곤은 제 무릎을 베고 까무러친 가비를 보며 하얗게 질려버렸다.
“서, 설마 죽…,”
“입방정 좀.”
풍이 보기 드물게 곤을 노려봤다.
“이, 이보시오. 어의님. 진짜 괜찮은 거요?”
곤이 묻자, 모두의 시선이 연화에게 쏠렸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연화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몰라요.”
“아니, 어의님이 모르면 누가…!”
퍽!
풍이 팔꿈치로 곤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곤이 애가 타는 얼굴로 ‘아호!’ 속 터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화가 방금보다 침착해진 눈길로 가비를 바라봤다. 가비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 불로초.
그런 게 정말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비라는 것도.
“널 믿어, 은갑아….”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연화의 따스한 손이 가비의 이마를 짚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가비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에 아주,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의 장소는 서재였다.
어린 가비를 책상에 앉히고 할아버지 은수만이 약초도감을 펼쳤다.
가비가 눈을 반짝이며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갈 듯 집중했다.
‘할아버지. 이건 무슨 뜻이야?’
‘골절. 그러니까 뼈가 부러졌다는 뜻이지.’
‘으, 아프겠다.’
몸을 부르르 떠는 가비의 머리를 은수만이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도 가비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책이 그렇게 재미있어?’
‘응! 신기해.’
‘뭐가 그렇게 신기해?’
‘그냥 풀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게. 종류도 엄청 많고. 그래서 재밌어.’
‘누가 한의사 딸 아니랄까 봐.’
‘한의사 손녀이기도 한데?’
‘하하! 그렇지. 우리 똘똘한 은가비는 이 은수만이 손녀지.’
‘헤헤.’
바라본 할아버지의 눈은 다정하고 따스했다. 애정이 가득한 그 눈 속에서, 가비는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바로 할아버지의 아주 오래전의 전생을-
은수만은 태황궁의 초대 태어의였다. 그가 연구한 약초와 개발한 약재가 태황국의 약초도감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태황국의 의술은 가히 은수만을 기점으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뛰어난 업적과 달리 은수만의 개인사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 내외가 일찌감치 죽고 손녀 은가비만이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가비는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하여 은수만은 생각했다. 잘하면 태황궁에서 최초의 여자 태어의가 될 수도 있겠다고.
꿈은 행복했고 가비는 그의 바람대로 의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모든 게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날, 그 장면만 목격하지 않았다면.
‘가비야!’
놀란 은수만이 마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가비에게 뛰어갔다. 어둑한 저녁이었다. 가비가 눈물 젖은 얼굴로 은수만을 돌아봤다.
‘할아버지….’
가비의 앞에는 가비가 그토록 예뻐하던 개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떠돌아다니던 개를 어여삐 여겨 키웠는데 나이가 많아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벌써 자리보전하고 누운 지 열흘째.
그런 개에게 가비가 제 손가락에 피를 내어 먹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은수만이 호통을 치자 가비가 눈물을 보이며 훌쩍였다.
‘앞집 사는 경천이가 그랬단 말이야. 아픈 개한테 사람 피를 먹이면 산다고.’
은수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서, 네 손가락에 피를 낸 것이야?’
그런 터무니 없는. 말도 안 되는 장난질에 놀아날 만큼, 제 손녀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측은지심이 너무 강했다. 좀 더 강단 있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강한 아이면 좋겠건만.
‘그래도 그렇지. 이 귀한 몸에.’
은수만이 얼른 피가 방울져 있는 가비의 엄지를 제 옷자락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때, 축 처져 있던 개가 사지를 부들거렸다.
이제 숨이 끊어지려나 하고 돌아보는데, 별안간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은수만이 놀란 얼굴로 개를 바라봤다.
개가 푸르르르- 머리를 털더니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는 헥헥거리며 가비를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바둑아!’
가비가 개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은수만을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 진짜 살았어! 우리 바둑이 살아났어!’
가비의 품을 벗어난 개는 마당을 활보하며 뛰어다녔다.
‘이게 대체…….’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현상에 은수만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은수만이 가비의 손가락에서 피를 조금 채취했다.
이게 정녕 사실이라면…….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보름이 넘은 시점, 가비와 함께 마당을 뛰놀던 개가 다시금 시름 거리며 앓기 시작했다. 마치 회춘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늙어 죽을 때를 맞은 것처럼 그랬다.
은수만이 떨리는 심정으로 채취해둔 가비의 피를 개에게 먹였다.
…맙소사!
다시금 생생하게 일어나는 개를 보며 은수만은 뒤로 무너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어린 가비를 제품에 꼭꼭 숨겨두고 키운 것은.
그러면서도 때때로 가비의 피를 채취하여 그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혹여 이러한 능력이 가비의 몸에 해를 줄까 봐서였다. 그렇게 수시로 가비의 몸 상태를 확인하며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비야. 넌 보통 사람이 아니다. 허니 네 능력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선 안 돼.’
불로불사(不老不死).
영생은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누구나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꿈이었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 누가 마다할까.
허나 비밀은 곧 들통났다. 금이야 옥이야 품 안에서 애지중지 키웠지만, 성년이 된 아이를 언제까지 묶어둘 수만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가비는 그와 혼인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은수만은 그걸 말릴 수 없었다.
‘가비야…. 이 할아버지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알아, 할아버지. 걱정 마요. 평생 들킬 일 없을 거야.’
그렇게 다짐처럼 뜻대로 흘러갔다면 좋으련만. 집을 짓는 게 업(業)이었던 사내는 어느 날 무너지는 기왓장 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점심을 챙겨주러 갔다가 그 모습을 목격한 가비는 아연실색했다.
겨우 구조한 사내는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바닥을 적셨다. 사람들은 의원이 올 때까지 발을 동동 굴렀고, 울부짖던 가비는 망설임 없이 제 몸에 피를 내었다.
단도로 긁은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떨어지는 피를 사내의 입술에 갖다 대어 먹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가비의 기구한 삶은.
사람들은 더이상 가비를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생각했다. 그건 가비가 사랑해서 살린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가비를 사랑한다기에 믿고 혼인시켰지만, 결국 가비를 데리고 장사를 했다. 먼 지방 도시로 가비를 데리고 가 종일 방에 가둬놓고 피를 뽑아 부자들에게 팔았다. 그렇게 남자의 재산이 부풀수록 가비는 말라 갔다.
그리고 결국…….
은수만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가비의 굳은 몸을 부여잡고 목이 쉬도록 통곡했다.
아가…. 가비야.
할아버지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할아버지를 용서하거라….
훗날 다시 태어나면 이 할아비가 널 꼭 지켜줄 테니….
그러니 다시 한 번만 내 손녀, 은가비로 태어나 주거라.
부디…. 부디…….
은수만의 바람은 시공간을 초월한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지금의 은수만과 은가비로.
깊은 새벽녘. 하룻밤을 꼬박 앓고 난 가비가 조용히 눈을 떴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꿈의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