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여기저기서 횃불이 타올랐다. 야심한 밤.
천자의 명을 받은 주경대와 야경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라진 천자비를 찾기 위해서였다.
조심한다고 한들, 밤을 가른 움직임과 소란은 태황궁 전체를 들쑤시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궁 안에 무슨 사달이 난 것이라 짐작했지만, 섣불리 상황을 살피러 나와보지 못했다.
경비대와 시종들이 태황궁을 뒤질 때, 반소는 그에 앞서 가비를 찾고 있었다. 가비가 천태비의 시종관을 따라나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난 후였다.
오늘따라 천태비궁의 보초는 삼엄했다. 어둠에 의지해 그림자처럼 잠입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천태비궁은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가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결국,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돌아섰다. 반소의 낯빛이 차게 식었다. 가비를 조용히 탈출시키겠다는 생각을 바꾸었다.
더는 숨죽여 행동하지 않겠다.
결심을 굳히자, 거리낄 게 없었다. 들어올 땐 몰래 숨어들어왔던 천태비궁을, 나갈 땐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정문을 나서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감히 막아설 생각도, 추궁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치 귀물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반소는 그 길로 음궁으로 향했다. 이미 궁 전체를 돌고 온 곤과 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소에게 다가왔다.
“지금 궁이 난립니다. 망아지…, 아니 은 어의를 찾으려고요.”
곤 옆에 있던 풍도 말을 덧댔다.
“혼자 궁을 빠져나가진 못했을 텐데요. 어디에 숨은 걸까요?”
그래. 어딘가에 숨었을 것이다.
보통 여인들보다 담력도 세고 배포도 크니까.
그대로 순순히 끌려갔을 리가 없었다.
허면 어디로. 어떻게.
태황궁이 아무리 넓다지만 주경대와 야경대를 더불어 귀물경비대와 시종들까지 쑤석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는 건…….
“설마…. 아직도 천태비궁인 건가?”
“예? 거긴 반소님이 직접…,”
반소가 급히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반소님!”
귀물경비대 중 한 명이 여인 한 명을 끌고 왔다.
“음궁 뒤뜰에 있는 걸 잡았습니다. 반소님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반소의 눈이 여인에게로 향했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 수풀이라도 헤치고 온 건지 여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지저분한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반소의 눈길을 받은 여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도, 도와주세요, 안 그러면 은갑이가…, 은갑이가…!”
은갑이란 말에 반소가 여인 앞에 몸을 낮췄다. 겁에 질려 사색이 된 여인의 얼굴을 반소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묻지도 않았는데 여인이 고개부터 끄덕였다.
“연화라고 합니다. 의궁에서 은갑이와 함께 일했던 의궁 어의입니다.”
반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움켜쥔 주먹에 힘이 실렸다.
“그래. 은갑이가 어찌 되었다고?”
“끄, 끌려갔습니다. 천자님께 바칠 거라고 했어요. 절 도망시키고 은갑이가…,”
연화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밀궁에서 도망친 후 정신없이 내달렸다. 경비대와 시종들의 눈을 피해 궁의 뒤편, 산길을 택해 돌아왔다. 목적지는 애초부터 음궁이었다.
언젠가 가비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난 반소님과 귀물경비대를 좋아해. 믿고 있고.’
그래서 연화도 믿었다. 가비의 그 말을.
믿었기에 망설임 없이 반소를 찾아온 것이었다.
“도와주세요, 반소님…. 도와주세요.”
흐느끼는 연화를 두고 반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돌아서 제 침소로 향했다. 침상 옆 벽에 걸어둔 반월도를 꺼내 들었다. 태황궁 안에서 무기를 들고 활보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
네 놈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으니까.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반월도를 들고 나가자, 곤과 풍의 얼굴이 굳었다. 반소의 의중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수장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를 수밖에.
“연 어의를 잘 추스르고 보호하라.”
반소가 나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난 양궁으로 간다.”
곤과 풍이 예를 갖추며 음궁을 나서는 반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서둘러 연화를 부축하고 귀물경비대를 소집할 준비를 했다. 곧 태풍이 휘몰아칠 것이었다.
* * *
헝클어진 머리칼이 대충 정돈되고 찢어진 치마 대신 새로운 치마가 걸쳐졌다. 가비가 제법 싸울 줄 안다고 판단했는지 시종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여러 명이 똘똘 뭉쳐 가비를 에워싼 채 양궁으로 향했다.
현의 침소 앞에는 장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을 보니 이미 가비가 불로초인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역시 다 한통속이야.
얼핏 시종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가비를 찾기 위해 경비대까지 나섰다고 했다. 이쯤 되면 태황궁 사람들 대부분이 알게 됐을 것이다. 자신이 천태비에게 간택된 천자비라는 걸.
엉망진창이야.
상황이 딱 그랬다. 이렇게 되면 반소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섣불리 나서는 순간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그러길 바랐다. 안 그럼 반소뿐 아니라 귀물경비대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무척이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소 후줄근한 가비의 차림새에도 장곡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천자비를 대하듯 가비를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침소의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가비가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섰다. 떠밀리듯 발을 딛자, 지체 없이 문이 닫혔다.
쿵- 철컥.
문이 잠겼다. 저번처럼 달아날 수 없도록.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문가에 선 가비가 아릿한 제 팔목을 조용히 매만졌다. 양궁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포박돼 있던 손목엔 밧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 몰골을 보고도 현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너와 내 인연이 보통은 아니었구나.”
현이 가비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렇게 지척에 너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이걸로 다 되었다. 찾았으니 됐어.”
“뭐가 다 됐다는 거야.”
가비가 코웃음을 쳤다. 더는 현을 천자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예를 갖추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어차피 불경죄를 저지른다 해도, 함부로 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니들이 생각하는 불로초가 진짜 나라면 말이야.
가비의 냉소적인 반응에 현이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대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아. 허나 받아들여야만 해. 우리가 서로의 짝이고 반려라는 사실을.”
“그 사실은 누가 정한 건데?”
“그건 하늘이……,”
“하늘이고 나발이고, 난 널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네가 내 짝이라고? 아니. 이곳에 내 짝이 있다면 그건 네가 아니고 반소야. 인연이란 게 있다면, 내 인연은 네가 아니라 반소라고.”
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난 그대를 연모해. 그대가 여인이고 불로초라는 사실이 더없이 기쁘다. 헌데 그대는 왜 그 입에서 다른 놈을 운운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니까.”
가비가 덤덤하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반소에게도 직접 말하지 못한 마음을.
“난 반소를 좋아해.”
처음 본 그 순간이 각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살피던.
무감한 얼굴로 진심을 말하던.
자신을 간절히 원하던 뜨거운 입술과 손길이, 가비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이곳에 남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반소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자신 때문에 이곳에 남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 틈에 널 혼자 둘 수 없어.
쓸쓸한 얼굴로 자신을 그리워할 반소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반소의 남은 삶을 외로이 저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겠다고. 남을 거라고 결심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말을 해도, 네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을 거야.”
가비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나가게 해줘. 조용히.”
픽- 그 말에 천자가 입술 끝을 올렸다.
“넌 참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해서 내 눈에 들어온 거겠지. 그 좋은 걸 다른 놈이 갖게 할 생각은 없다.”
“난 물건이 아니야.”
“특히 반인반귀라는 괴물한테.”
“그만해!”
가비가 외쳤다.
“알고 있는 거야? 네 어머니 천태비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네 어머니가 사람을 잡아 가뒀어. 귀물 사건도 네 어머니랑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태황국의 천녀, 천태비시다. 예를 갖춰.”
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 반인반귀 놈이 그러던가? 감히 내 어머니를, 태황국의 천녀를 모욕해?”
“내가 봤어! 목격했다고!”
두 귀를 막아버린 듯, 현은 꿈쩍하지 않았다. 되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처럼. 아니 그날 밤보다 더한 욕망과 독기 어린 표정으로 가비를 노려봤다.
“할 말은 그것뿐인가?”
현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네게 기회를 줬다. 그것도 충분히. 날 선택할 기회를.”
자신을 선택했다면 그건 말 그대로 선택일뿐, 강압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헌데 그 기회를 모두 저버린 건 가비였다.
해서 더는 봐주고 싶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갖는 수밖에.
그것이 망가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