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어둑한 공간은 적막했다. 이따금 씩 벽에 걸린 호롱불만 서늘한 공기에 일렁일 뿐이었다. 모퉁이에 몸을 숨긴 가비가 전방을 주시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듯, 작은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가비는 걸음을 옮겼다. 눈을 굴려 사방을 둘러봤다. 공간은 생각보다 높고 넓었다.
침소 밑에 이런 곳이 있다니.
단순히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통로만은 아닌 듯했다. 여긴……,
밀궁이야.
확신한 순간, 문이 없는 방 하나가 눈에 걸렸다.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원형으로 생긴 방에선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벽면 가득 책이 있었고, 철제로 된 새장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새들은 모두 죽은 채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뻐드러진 새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가비가 책장에 꽂힌 책들로 눈을 돌렸다. 스치듯이 훑어보던 중, 눈에 걸리는 책 하나를 빼 들었다. 불로초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천겁도 더 돼 보이는 책은 자칫 잘못 건드리면 찢기거나 바스러질 것처럼 종잇장이 위태로웠다.
가비의 눈이 홀린 듯이 내용을 읽어갔다. 그저 휘리릭 살펴보는 것뿐인데도 마치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듯 후루룩, 가비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책을 든 가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벌어진 입술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가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책을 덮은 가비가 서둘러 그것을 있던 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손을 떼는데,
“…….”
일순 제 눈을 의심했다. 책등 하단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은수만』
분명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가비가 놀란 눈으로 책을 다시 뽑았다. 급하게 책의 맨 앞장을 펼치자 기록자 ‘은수만’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태황궁의 초대(初代) 태어의이자 불로초를 처음 발견한 사람. 그에 대한 효과와 효능을 시험하고 기록했다.』
털썩-
가비가 책을 끌어안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도 기가 막혔다.
‘전생뿐만이 아니라 현생과 후생까지.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불현듯 반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황국 자체가 삼생(三生)을 믿으니까.’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존재한다면-
태황국에서 불로초를 처음 발견했다는 이 은수만이란 사람이 할아버지의 전생인 걸까?
‘가비야.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단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알거나 짐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가비가 벽을 짚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밀려든 정보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난무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천태비의 목적은 너무나 명확했다.
불로불사(不老不死).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나.’
천태비가 제게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맛있는 냄새.’
마치 포식자가 먹잇감을 바라보듯, 식탐 어린 눈빛이었다.
적어도 가비가 본 천태비는 병약하지도, 결코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 같았다.
귀물 사건.
살가죽이 벗겨진 채 죽은 사람들.
그 대상은 어린아이, 소녀, 소년.
그리고 젊은 여자.
“…우욱.”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 모든 게 천태비와 관련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이 아니야…….
정교하게 살가죽만 벗기는 건 도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입가를 훔친 가비가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려 주세요!”
어딘가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가비가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
“살려주세요, 제발…!”
익숙한 목소리.
연화…!
터지려는 외침을 가까스로 막았다.
“아악! 제발, 제발요!”
비명과 함께 철컹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들려왔다. 가비가 벽 밖으로 눈을 내밀었다. 저만치 어둠을 밝힌 호롱불 아래로 사람이 어른거렸다. 아까 천태비에게 무언가를 급히 전하던 시종과 그 외에 몇 명이었다.
연화를 철창 안에 가둔 시종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사냥이 안 될 때를 대비해 살려두는 수밖에. 아쉬울 땐 이거라도 드셔야 하니까.”
그 말에 연화가 공포에 질린 울음을 내질렀다. 시종들이 태연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방향을 가비가 눈여겨봤다.
입구는 저쪽이구나.
이내 모두가 나간 듯 조용해지자 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연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연화야!”
웅크린 채 울고 있던 연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은갑이?”
젖은 눈동자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연화의 눈앞에 있는 건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었다.
“은갑이, 맞아?”
연화가 울먹거리며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은갑아!”
연화가 창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금 연화에게 중요한 건 가비의 성별 여부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줄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 목 끝까지 차오른 생존 본능이 우선이었다.
“제발 나 좀 꺼내줘! 나 죽기 싫어! 싫어, 은갑아!”
공포에 질린 연화가 애원했다.
“기다려, 연화야. 꺼내줄게.”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벽에 걸려 있는 철제 호롱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내려 철장에 달린 자물쇠를 내리쳤다.
까앙-!
요란한 쇠붙이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까앙! 깡! 깡!
있는 힘껏 몇 번을 더 내리치자, 굳게 다물린 자물쇠가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은갑아….”
연화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갈 수 있을 거란 안도감 때문인지 방금보다 침착해진 얼굴로 중얼댔다.
“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
눈을 떠보니 낯선 방이었고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갇혀, 몇 날 며칠을 주는 밥만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때만 해도 두렵긴 했으나 목숨에 위협을 느낀 건 아니었다.
방안은 온통 황금장식으로 아름다웠고, 밥을 가져다주는 시종들도 자신을 향해 호의적이란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여기가 어딘지 물었을 때, 그들은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귀한 분’이라 칭했고, 이제 곧 경사가 있을 것이니 정갈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있으라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오늘 제 팔뚝에서 피를 빼가더니 태도가 바뀌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곳이 태황궁이고, 자신을 가둔 것이 천태비라는 걸.
어차피 죽일 거라 생각했는지 연화의 눈을 가리지도 않고 이곳으로 끌고 왔다. 말 그대로 이유도 모른 채 대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죽을 목숨이 된 것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이야.”
가비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네가 이런 일을 당한 거야.”
연화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날 너 대신 내가 매혈했잖아. 얘기가 길어서 다 말할 순 없지만, 미안해 연화야.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그리고 여자라는 걸…, 속여서.”
진실을 토로하는 가비를 보며,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은갑아…. 와줬잖아. 와줬으니까….”
그걸로 됐다. 자신을 그냥 두지 않고 찾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 돼가. 조금만 참아.”
가비가 부서지기 직전인 자물쇠를 다시 한번 내리쳤다.
까앙! 깡! 파삭-!
마침내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고 문을 연 순간,
“은갑아!”
연화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 누군가 가비를 덮쳤다. 아까 연화를 가두러 왔던 시종들이었다.
“꺄악!”
겁에 질린 연화가 소리를 질렀고, 가비가 자신을 덮친 시종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퍼억!
시종 한 명이 떨어져 나가자 또 다른 시종 한 명이 가비에게 달려들었다.
“흠을 내선 안 된다! 천자님께 바쳐야 해!”
그 말에 멈칫, 시종들이 가비를 에워쌌다. 가비가 철창과 먼 곳으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시종들의 시선이 제게 쏠린 틈을 타 연화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연화가 겁먹은 얼굴로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겨 철창 밖으로 빠져나왔다.
기척을 느낀 시종 한 명이 소리 질렀다.
“달아난다!”
가비가 연화를 잡으려는 시종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리고 턱을 때려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둘 다 놓치면 안 돼! 잡아!”
누군가의 날 선 외침에 시종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무예를 배운 자들은 아니었지만 가비 혼자 상대하기엔 수가 너무 많았다.
“연화야! 가!”
가비가 연화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빨리 가! 빨리!”
둘 다 잡히면 낭패였다. 누구라도 나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가비가 연화를 쫓으려는 시종들을 차단했다.
퍽!
긴 다리로 휘돌려 차자 얻어맞은 자들이 휙휙 나자빠졌다. 하지만 무슨 악바리 근성인지 다시 일어나서 덤벼들었다. 금세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연화는 시종들이 왔던 길로 달아났다. 지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가비를 살리는 길이라 여겼다.
…됐어!
시야에서 연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방심하며 안도한 찰나, 누군가의 손이 가비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악!”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머리 가죽이 뜯길 듯한 통증이었다.
“얼굴과 몸에만 상처를 안 남기면 될 것 아니냐.”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종관이었다. 시종관이 매서운 눈으로 가비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려는 가비의 머리채를 틀어쥐며 어깨를 발로 꾸욱 눌러 밟았다.
“으윽-.”
시종관이 눈짓하자, 남아있는 시종들이 얼른 다가와 가비의 팔다리를 포박했다.
“잘 정돈하여 천자님께 데려가거라.”
“예.”
가비의 손과 발이 묶였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져 끌려가듯 걸었다. 연화는 구했으니 됐다. 그럼 이제 자신만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자정은 넘었고, 반소가 움직일 것이었다. 아직은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