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다들 잠자리에 들었을 무렵 가비는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났다. 창을 열어 달이 기운 걸 보았다. 명의당에 불이 꺼진 지는 고작 두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반소와 약속한 자정이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가비는 그동안 짐을 정리하기로 했다. 작게 호롱불을 켠 가비가 봇짐을 꺼냈다.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한 나머지를 잘 개어 책상 위에 두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서책과 사용했던 필기구도 정돈해서 그 옆에 놓았다.
그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온 궁이었다. 여자인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걱정보단, 밖에서 얼어 죽기 싫어서 선택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무슨 인연이었는지. 어쩌면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반소와 재회할 수 있었어.
내가 불로초인 것도…….
아직은 ‘알게 되었다’는 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종이 한 장을 펼치고 붓을 들었던 가비가 멈칫했다. 겸복과 오정에게 짤막한 글이라도 남길까 하다가 관뒀다. 이대로 태황궁을 나가면 말 그대로 퇴직서도 없는, 정상적인 퇴궁 처리가 아니었다. 괜한 일로 저와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비가 서랍을 열어 개짐이 든 주머니를 꺼냈다. 봇짐에 차곡차곡 넣다 보니 서문이 생각났다.
서문님께도 감사한 일이 많은데.
막상 가려니 착잡한 마음만 남았다. 봇짐을 묶은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톡톡.
누군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가비가 조용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반소가 보낸 사람일지도 몰랐다.
“누구세요?”
달칵.
문을 열자 그 틈으로 낯익은 듯, 낯선 얼굴 하나가 보였다.
문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가비와 눈을 맞췄다. 그제야 얼굴이 기억났다.
이 여자는…….
“천태비 궁에서 왔습니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무슨 일로…….”
“천태비님께서 찾으십니다.”
가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천태비의 시종관을 바라봤다. 시종관이 표정을 지운 얼굴로 속삭였다.
“불면증에 좋은 향을 낼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밤 천태비 궁에 향을 좀 내주시지요.”
감히 다른 이도 아닌 천태비의 명이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다만, 이 호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혹시 자신이 불로초인 걸 알고 낚는 거라면.
가비가 망설이자 시종관이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가비의 손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어루만졌다.
‘약속해. 널 지키기 위해, 날 지키겠다고.’
반소를 믿었다. 그러니 태연하게 굴어야 했다. 하필이면 오늘, 천태비의 시종관이 직접 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안 나설 수 없는 길이었다.
어쩌면 정말 향만 태우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쭙잖은 경계심으로 일을 그르치고 오해를 살만한 일은 삼가는 게 좋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비가 문을 닫고 겉옷을 걸쳤다. 그리고 옷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제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던 천태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옷에서는 햇볕에 잘 마른 옷감 냄새 말고 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가시지요.”
가비가 조용히 문을 닫고 따라나섰다. 시종관의 걸음이 명의당의 정문이 아니라 후문으로 향했다. 가비가 그 뒤를 따라가며 어둠에 묻힌 뒤뜰을 살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밤마실을 나가듯 도착한 천태비 궁은 오늘따라 썰렁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아 보이던 시종들이 모습을 감추고 시종관을 따르는 시종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저기, 향을 낼 도구들을 챙겨야 하는데요.”
그러려면 천태비궁에 있는 약방에 들러야 했다. 하지만 시종관은 단호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건 이미 천태비님의 침소에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가비의 가슴으로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불면증에 향이 도움을 준다는 건, 봉 어의나 서문에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향을 어찌 태우는지 알았다면 일부러 저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도구까지 준비해 둘 정도면 향을 태우는 방법도 안다는 소리일 텐데…….
미끼인가?
생각이 미칠 무렵, 천태비 침소의 문이 열리고 시종관이 가비의 등을 떠밀었다.
움직이지 않던 발걸음이 시종관에 의해 떨어졌다.
쿵-!
가비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천태비가 웃는 얼굴로 반겼다.
“왔군요, 은 어의.”
가비가 애써 침착한 얼굴로 천태비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불면증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향을 태워 올리겠습니다.”
가비가 눈을 들어 준비되어 있다던 도구들을 찾았다. 없었다.
“향을 태울 도구가…….”
“그런 건 되었어요.”
천태비가 입꼬리를 올리며 가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는 건 어때요?”
가비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병자처럼 보이던 천태비의 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무서울 만큼 창백하게 보였다. 마치 죽은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쓴 것처럼, 입술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가비가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났다.
턱-
시종관이 막고 서 있었다.
천태비가 침상에서 일어나 가비에게 다가갔다.
“왜 이리 겁을 먹었어요? 내가 무서워요?”
천태비가 소녀 같은 음성으로 물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다들 병약하지만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얼굴인데.”
순간 시력이 안 좋다던 천태비의 탁한 눈동자가 정확하게 가비를 직시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천태비의 손이 가비의 뺨을 가볍게 훑었다. 작은 입술이 속삭이듯 달싹였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나.”
…있는 냄새.
스치듯 들은 뒷말에,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뭐라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말해봐요. 계집이면서 사내인 척 궁에 들어온 이유.”
가비가 놀란 숨을 삼켰다.
“사내로 사는 게, 궁 생활을 하기에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나?”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천태비를 보며, 가비는 한편으로 안심했다.
여자인 걸 들켰을 뿐, 내가 불로초라는 건 아직 몰라.
“천태비님!”
가비가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용서하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차라리 감옥소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천태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바닥에 엎드린 가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이참. 벌을 주려는 게 아니에요. 난 그저 얘기가 듣고 싶었을 뿐인데.”
가비 앞에 쭈그리고 앉은 천태비가,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론 모두를 속였으니 죄를 묻고 퇴궁시키는 게 맞지만, 넓은 아량으로 그대를 용서할까 해요.”
“그게 무슨…….”
“천자가 그대를 원해요.”
가비가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천태비가 해사한 표정으로 웃었다.
“천자의 곁에서 천자가 질릴 때까지 좋은 장난감이 돼줘요. 살아있는 동안은 천자의 손길이 닿는 곳이 그대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될 거예요. 어때요. 죽는 것보단 낫죠?”
“미친…!”
벌떡 몸을 세우는 가비를, 뒤에 있던 시종들이 짓눌렀다.
“…허억!”
등을 내리누르는 우악스러운 무게에, 가비가 가쁜 숨을 토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태비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팔딱팔딱, 신선하네? 기운도 맑고 체력도 좋고. 우리 천자가 왜 끌리는지 알겠어.”
제압당한 가비가 바르작대며 천태비를 올려다봤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천태비의 얼굴은 무감, 그 자체였다.
“힘 빼지 말고 순순히 구는 게 좋을 거예요. 웬만하면 천자에게 멀쩡한 몰골로 주고 싶거든.”
오싹-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잠잠해진 가비를 보며, 천태비가 시종관에게 눈짓했다.
“천자에게 전하거라. 이 어미가 자정 안으로 선물을 보낼 거라고.”
“예, 천태비님.”
“부정 타지 않게 깨끗이 씻겨서 계집답게 꾸며.”
“그리하겠습니다.”
천태비가 등을 돌려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불 안으로 편히 누우며 눈을 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미쳤어…! 어떻게 이런!
시종들이 가비를 일으켜 세웠다. 가비가 반항했다.
“이거 놔!”
양쪽 팔을 포박당한 가비가 억지로 끌려나갔다.
소란이 듣기 싫다는 듯, 천태비가 조용히 돌아누웠다. 이내 시종관이 불을 끄자 천태비의 침소는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