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시종들은 가비를 목간으로 끌고 갔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욕통에 그대로 가비를 밀어 넣었다.
풍덩-!
“푸후!”
가비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여러 개의 손이 달려들어 씻기기 시작했다. 천자에게 바칠 장난감이 행여 상하기라도 할까 봐 조심조심 다루는 듯했지만, 실상은 네댓 명이 힘으로 가비를 제압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마음껏 쓸 수 없는 상황에서는 도망도 싸움도 무리였다. 가비는 그만 반항하던 것을 멈추고 힘을 풀어버렸다.
“옳지. 생각 잘하셨습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시종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품평을 하듯 가비의 벗은 몸을 기분 나쁘게 훑어봤다.
“쓸데없이 힘을 뺄 시간에, 하루라도 더 천자님 마음에 들 생각을 하세요. 그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니까.”
그 말인즉, 가비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본 모습을 보였겠지.
두 눈을 의심할 만큼 천태비의 본 얼굴은 극악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 태황궁을 지배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일단 얌전히 있자. 기회를 봐야 해.
제 몸을 떡 주무르듯이 이리저린 만져대는 게 불쾌했지만 참았다. 꽤 한참을 향이 나는 물로 씻기고 나서야 마른 면포로 물기를 닦아주었다.
젖은 머리칼을 최대한 말려 향유를 바른 빗으로 싹싹 빗겼다. 이곳으로 온 뒤 처음으로, 압박용 무명천이 아니라 자수가 놓인 가슴가리개를 입었다.
그 위로 속이 비치는 자리옷이 덧대어지고 옅은 살굿빛의 치마가 걸쳐졌다. 상의는 쇄골이 드러난 형태로 하얀 살결이 보이게끔 가슴 부근에서 매듭이 묶였다.
시종관이 입술연지를 찍어 가비의 입술 위에 발랐다.
반지르르, 진분홍빛 입술 위로 생기가 돌았다. 피부는 워낙 좋아 따로 손볼 것이 없었다.
“천자님께서 흡족해하시겠어.”
시종관이 혼잣말로 감탄했다.
어찌 몰랐을까. 이렇게 고운걸.
그동안 사내라고 깜빡 속았던 것이 억울할 만큼 예뻤다.
“이만 양궁으로 데려갈까요?”
수발을 돕던 시종 중 한 명이 물었다.
“나도 갈 것이다.”
시종관이 함께 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직접 가서 천자가 얼마나 만족했는지, 마음에 들어 했는지 천태비에게 보고하는 것이 일의 마무리였다.
시종관이 먼저 방을 나서고 그 뒤를 가비가 따랐다.
가비가 자신을 에워싼 시종들을 바라봤다. 아직은 천태비궁 안이었다. 이대로 양궁으로 끌려가면 일이 더 복잡해졌다.
“저기…. 뒷간을 좀 가고 싶은데.”
시종관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미심쩍은 눈초리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관은 자리에 서 있고 시종들이 가비를 뒷간으로 안내했다.
시종관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입구로 갈 수 있는 길목이 하나뿐인 듯했다.
어쩌지….
뒷간으로 들어온 가비가 문을 닫았다. 비좁은 뒷간 안을 맴맴 돌며 머리를 굴렸다. 결국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봤다. 생각보다 높았다.
이대로 떨어지면 나무가 날 받쳐줄까?
아니. 팔다리 하나는 부러질 거야.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갈 순 없었다. 다시 창밖을 바라본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창문 아래쪽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치마 끝자락을 쭉 찢어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걸터앉았다.
제발-
무성히 펼쳐진 나무를 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창틀을 붙잡고 몸을 내렸다.
만에 하나 떨어지더라도 멀쩡하길.
후욱- 가비의 몸이 아래로 꺼졌다.
쿵쿵쿵-
밖에서 시종들이 문을 두드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었습니까?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대답이 들리지 않자, 곧장 문이 열렸다.
벌컥-
텅 빈 뒷간을 보고 놀란 듯 소리쳤다.
“사라졌어!”
“뭐?! 어딜 간 거야!”
시종 한 명이 열린 창문을 보고 후다닥 뛰어와 아래를 바라봤다. 무성한 나뭇가지에 찢어진 치맛자락이 걸려 있었다.
“뛰어내렸나 봐! 어떡해!”
시종들이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나무 아래를 확인하러 오리라.
“…….”
한바탕 소란이 멀어지자, 가비가 한데 모아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았다. 후텁지근한 여름 바람에 치맛자락이 나풀거렸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친 채, 건물 밖으로 비집고 난 덩굴줄기를 생명줄인 양 움켜쥐었다. 다행히 달빛이 도와 가비가 있는 자리는 완벽하게 어둠에 가리어져 있었다.
가비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창틀이 걸렸다. 있는 힘을 다해 발끝으로 벽을 디디고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올렸다.
조금만 더….
창틀을 잡은 손끝이 하얗게 질려갈 즈음, 다리 하나를 재빨리 안쪽으로 걸쳤다.
털썩-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온 가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시종관도, 시종들도 없었다.
자신을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숨을 가다듬은 가비가 문밖으로 발을 내밀 때였다.
쾅-!
침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천태비가 나왔다.
깜짝 놀란 가비가 문 뒤로 바짝 몸을 붙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니라니!”
천태비가 격노한 듯 소리 질렀다.
“시종관! 시종관은 어디 있느냐!”
천태비 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시종이 재빨리 시종관을 찾으러 나섰고, 잠시 후 시종관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짜악-!
천태비의 손이 시종관의 뺨을 갈겼다. 시종관이 휘청거리더니 바로 몸을 세웠다.
짜악! 짝! 짜악!
연달아 올려붙인 따귀에 시종관의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내 털썩, 천태비 앞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천태비의 매서운 눈이 시종관을 노려봤다.
“분명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틀림없다고.”
시종관이 냉큼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천태비님. 제 불찰입니다.”
엄연히 따지고 보면 시종관의 불찰이 아니었다. 천태비도 보았다.
그 피가 죽어가는 새도 살려내는 것을.
새뿐만이 아니었다. 천태비 본인도 직접 효능을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몸이 똑똑히 기억했다.
단지 종지 그릇에 고일 만큼의 양일뿐이었다. 겨우 그만큼을 마셨을 뿐인데, 마치 긴 세월을 역행한 듯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활기가 넘치다 못해 살기까지 솟구쳤다.
헌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필이면 이제 와서!
그 어의 년이 불로초일거라 확신했다. 그 년에게서 뽑은 피가 그 증거니까.
해서 일사천리로 혼인 발표를 했고, 이제 곧 그 년을 천자비로 앉힐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아아악!”
천태비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탁한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감돌았다.
“매혈꾼을 불러라.”
천태비가 낮게 읊조렸다. 그날 고용했던 매혈꾼 중,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없애버렸다. 그나마 그 한 명도 혹시나 생길 불상사를 대비해 살려둔 것뿐, 그 어의 년을 천자비로 앉히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다.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천태비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시종관이 그 뒤를 따랐다. 천태비가 무언가를 명령했고, 시종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어둠 속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한참을 문 뒤에 서 있던 가비가 그제야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지?
천태비의 괴성 빼고 다른 말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
어딘가 분주하고 급박해 보이던 모습. 제가 달아난 게 이유는 아닌 듯했다.
설마 연화가 불로초가 아닌 걸 알게 된 건가?
그도 아니면 자신이 불로초인 걸 알게 됐거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가비가 숨을 죽인 채 입구 쪽으로 향했다. 벽에 붙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다행히 텅 빈 궁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보초병들이 있었다.
입구로는 못 나가.
주저 없이 가비는 다시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뒷간으로 들어가 창문 너머를 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시 봐도 뛰어내리는 건 무리야.
게다가 그 밑으로 사람들이 서성댔다. 가비를 찾는 천태비궁의 시종들이었다.
“분명 다리라도 접질렸을 겁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보니 시종들뿐 아니라 경비대로 보이는 병사들까지 동원돼 있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어떡하지?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던 가비가 우뚝, 동작을 멈췄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뒷간을 빠져나온 가비가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문이 열려 있는 천태비의 침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