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72화 (72/95)

[72화]

“뭐야….”

가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여자인 거…, 알고 있었어?”

반소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가비를 바라봤다.

“윤이 죽던 날….”

울부짖는 가비를 끌어안았다. 완벽하게 밀착된 몸은 사내의 것이 아니었다.

그날의 느낌은 가비와 함께 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에 따른 접촉이 많아질수록, 점차 확신으로 굳어갔다.

“나 역시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다.”

첫 만남을 되짚어보니 가비를 사내로 오해한 건 자신이었다. 이후 낯선 세계에서 여인이 아닌 사내로 살아가길 택한 가비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해서 가비가 먼저 말해주길 바랐고, 기다렸고, 그 마음을 헤아렸을 뿐이었다.

허나 지금의 상황은 그런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추측한 게 맞다면…,”

가비의 어깨를 그러쥔 반소의 손에 힘이 실렸다.

“사라진 건 네 동기가 아니라 너였어야 해.”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상했던 말을 반소의 입을 통해 들으니, 그 충격이 온몸으로 와닿았다.

“너 역시, 이제 막 성년이 된 여인이니까.”

성년이 된 여인.

그 말에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맞아. 근데 난…, 불로초 같은 게 아니야. 내가 왜…!”

“그래서 아직은 추측이란 거다.”

“…….”

“허나 그 추측이 정답일 수도 있어.”

발아래가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비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난 이제……,”

어떡해야 해.

불쑥 두려움이 올라왔다. 단순히 불로초라는 이유만으로 현의 반려가 돼야 한다니. 천자의 천자비로 살아야 한다니.

이건 너무 강압적이잖아.

독단적인 선택이자 강요였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의견 같은 건 무시해 버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천태비를 주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소름 끼쳤다.

자신을 바라보던 현의 눈빛이 떠오르자, 불현듯 한기가 들었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애써 불안한 심장을 외면했다. 대신 차갑게 머리를 굳혔다.

“태황궁을…, 나가야겠어.”

가비가 한층 침착해진 눈으로 반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화가 아니란 걸, 곧 알게 될 거야.”

그럼 진짜를 찾으려고 혈안이 될 테고.

“그들이 불로초를 찾는 게 정당한 거라면, 비밀로 할 리가 없지.”

분명 불순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남들이 알아선 안 되는 그 무언가가.

그런 생각이 들자 순순히 잡혀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떤 짓을,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다만 걸리는 게 있었다.

“연화가 걱정이야. 불로초가 아닌 걸 알게 되면…….”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리라. 매혈했던 흔적마저 없애는 마당에, 모든 걸 보고 들은 연화를 살려둘 리 없었다.

“어쩌면 밀궁에 있을지도.”

“밀궁?”

“천태비가 별점을 읽는 곳이야. 부정을 탄다 해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고.”

이 모든 게 정말 천태비의 소행이라면, 그곳 말고는 연화를 숨길만 한 곳이 없었다. 천태비궁에서 일하는 시종들조차 천자의 반려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봤다면 벌써 소문이 돌고도 남았을 텐데.

“밀궁은 내가 확인해 보마.”

반소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넌, 오늘 밤 자정에 태황궁을 떠나.”

“하지만……,”

“네 동기도 찾아서 반드시 태황궁 밖으로 내보낼 테니, 날 믿어.”

가비의 눈이 흔들렸다.

반소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위험해지면 어떡해. 네가 잘못되면…,”

가비가 겁을 먹은 눈으로 반소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했잖아. 방패도 되고 무기도 되어주겠다고.”

지금 생각하니 그건, 지켜주겠다는 맹세였다.

마음을 몰랐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음을 깨닫자 여실히 보였다.

내가 널 깊이 연모하고 있단 걸…….

반소의 손이 가비의 뺨을 간질였다. 가볍게 귀 뒤로 넘어간 손이 이내 목덜미를 잡아 힘있게 당겼다.

입술이 부딪혔고, 숨결이 뒤엉켰다.

간결하고 담백한 입맞춤이었으나, 그래서 더 애틋했다.

반소가 전하는 진심을 가비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성급히 굴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준 그가 고마웠다. 여인인 걸 숨겼다고 실망하지도 않고, 알게 되었다고 기뻐하지도 않는 그의 평정심이 되레 진실하게 느껴졌다.

여인이건 사내이건 상관없이 좋아했을 거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가슴에 와닿았다.

“나갈게. 나갈 거야, 태황궁에서….”

가비가 반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처음으로 보인 애정 어린 몸짓에 반소의 눈이 커다래졌다.

느리게 눈꺼풀을 내리다가, 품에 기댄 몸을 마주 안았다.

맞닿은 몸으로 마음이 전해졌다.

기쁘고 애달팠다.

심장으로 느껴지는 통증이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지만, 가비 때문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연화도 구해주고, 너도 무사하겠다고.”

가비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가비의 뒷머리를 반소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약속해. 널 지키기 위해, 날 지키겠다고.”

마음이 모든 걸 지배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연정이 반소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이었다.

* * *

그날 오후. 반소는 수도 정찰을 마친 후, 곤과 풍을 처소로 불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귀물 사건과 매혈꾼에 관한 내용, 또 불로초에 대한 연관성을 추측한 그대로 전달했다.

처음엔 혼자 일을 벌이려 했지만, 그러기엔 귀물경비대가 걸렸다. 창단 이후 오랜 시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귀띔이라도 해주어야만 했다.

지금껏 제가 살아왔던 삶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것을.

“반소님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이는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풍이 말했다.

“잘못 짚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귀물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거라면….”

이는 생각만 해도 천지가 뒤바뀔 소리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런 일만은 없어야 했다. 없길 바라야 했다. 아니면 태황궁 전체가 쑥대밭이 될 테고, 그 영향이 궁 밖으로 미칠 게 자명했으므로.

“헌데 정말 그런 게 있긴 한 겁니까?”

잠자코 있던 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인간 불로초라니. 당최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건 코흘리개 시절 구전으로 전해 듣던 옛날얘기에 불과했다.

“기록서에는 존재한다.”

반소가 건조한 목소리로 확답했다.

“천족과 그 측근들만 알고 있으나, 실존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아니라면 천태비가 괜한 일에 공을 들이고 힘을 쓸 리 없었다.

“반소님의 말씀처럼 불로초가 존재한다면….”

풍이 불로초가 실존한다는 가정하에 말을 이었다.

“일단 진짜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밀궁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어의가 가짜라면, 진짜는 따로 있을 거 아닙니까.”

만약 이 일이 귀물 사건과 연관이 있고 또 그것이 천태비와 연결된다면, 분명 불로초의 사용 목적도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천자의 병증 치료는 그저 허울일지도 몰랐다. 그럼 진짜를 찾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할 터.

허나 풍이 한 말에 반소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내리고 있던 반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짜는…, 가까운 곳에 있다.”

가비가 충격받을 것을 감안하여 추측이라 말했지만, 이미 반소는 확신하고 있었다.

가비가 불로초일 것이라고.

“가까운 곳이요? 가까운 곳 어디 말입니까?”

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그럼 벌써 진짜를 찾으셨다는 겁니까?”

궁금증이 극에 달한 곤과 풍이 대답을 재촉했다.

“의궁에 있는 은갑이.”

“예?”

“은갑이가 불로초야.”

풍이 놀란 눈을 치떴고, 곤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반소님! 지금 무슨 말씀을…, 녀석은 사내가 아닙니….”

곤이 말끝을 흐렸다.

반소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고, 풍은 알아들은 듯 침묵에 동조했으며, 곤 혼자서만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망아지가, 사내가 아니라 여…….”

“오늘 밤 자정, 은갑이를 태황궁 밖으로 내보낸다.”

상황을 정리하듯, 반소가 명령했다. 이내 곤 마저 입을 다물며 무거운 적막감이 세 사람을 감쌌다.

그날 저녁. 가비는 업무를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오정과 겸복을 만나 함께 저녁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계절이 계절인지라, 귀한 약초가 많이 들어와.”

오정이 입안 가득 밥을 떠넣으며 말했다. 오정의 업무지는 약초 반입실이었다.

“덕분에 내가 요새 눈코 뜰 새가 없다니까?”

“반입실이 바쁘니 약제실도 바쁘다.”

겸복이 조용히 대꾸했다.

“근데 가끔 상태 안 좋은 것들이 섞여서 들어오던데.”

“뭐어? 말도 안 돼. 얼마나 꼼꼼히 살펴보고 들이는데.”

“소문에 의하면, 요즘 상한 것에 색깔을 입혀 파는 자들도 있다더라.”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궁에 들어오는 걸 그리하려고?”

“돈에 눈먼 자들은 한 치 앞만 보고 사는 법이니까.”

“선학님께 말씀은 드려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평소와 같은 하루였고, 평소와 같은 저녁 식사였다.

‘평소’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이제는 가비에게 익숙한 일과였고 풍경이었다.

그런 곳을 말없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가비가 이야기를 나누는 겸복과 오정을 두 눈에 담았다. 그새 정이 담뿍 든 모양이었다.

이렇게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은갑!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해?”

오정이 가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게. 무슨 일 있었어?”

이내 무심히 있던 겸복도 걱정을 보탰다.

가비가 고기반찬을 입에 욱여넣으며 얼버무렸다.

“배고파서 그래. 밥 먹느라….”

“설마 봉 어의님한테 혼난 건 아니지?”

오정이 가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런 거 있으면 바로 말해. 동기 좋다는 게 뭐냐?”

“오정이 말이 맞다. 속에 담아두면 좋지 않으니. 하긴. 넌 담아둘 성격도 아니다만.”

“하하! 그건 그래. 은갑이는 그럴 놈이 아니지!”

오정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내가 진짜 초반에 정강이 까인 것만 생각하면…. 어휴.”

“아팠지. 그것도 무지.”

“난 뼈가 나간 줄 알았다니까?”

“나도.”

만담처럼 주고받는 오정과 겸복의 이야기가 오늘따라 정답게 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가비는 서둘러 눈을 떨구었다. 애써 웃었지만 마음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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