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7화 (67/95)

[67화]

기묘한 꿈이었다.

부연 먼지바람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속에서 반소는 자신의 몸이 높게 도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도.

몸도 마음도, 마치 폭발할 것처럼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이 분노가, 조급함이, 초조함이, 무얼 향한 건지.

아니 누굴 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분명한데도, 마치 제삼자의 일을 바라보는 듯 관망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위로 무언가를 보았다.

비죽이 솟은 원기둥이었고 그 끝에 누군가가 매달려 있었다.

누군지는 몰랐으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제가 찾던 사람이다.

반월도를 쥔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일순간 발끝에 모든 힘을 실어 땅을 박차고 올랐다.

나풀거리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타는 듯한 해를 닮은.

지는 듯한 노을을 닮은 아름다운 색이었다.

넌…, 누구야.

나부끼는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구길래 날…,

가슴이, 심장이 찢길 것처럼 아팠다.

아파서 터져 버릴듯한 그때…….

“…헉!”

꿈에서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반소가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통증이 일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 같았다.

땅을 박차고 올랐던 감각이 잠에서 깬 지금도 발끝에 남아 있었다.

이건…, 뭐지.

불현듯 제게 전생을 믿냐고 물었던 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전생인가…?

믿는다고 했지만, 그게 제게 해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반소가 꿈에서 반월도를 쥐고 있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생생했다. 채 가시지 않은 감촉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이 흉터와 관련이 있는 걸까.

날 때부터 가슴에 있던 흉터와 자신의 전생인 듯 보이던 꿈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무심코 든 시선 끝으로 달이 걸렸다.

창 너머로 보이는 달이, 오늘따라 피를 머금은 듯 붉은빛을 띠었다.

가슴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 * *

며칠 후. 태황국에 경사가 일어났다. 바로 천자 현의 혼인 소식이었다. 동이 틀 무렵 발표된 소식은 날개가 돋은 듯 태황국 전체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기다려왔던 소식이라 기쁨의 축전을 즐겼고, 태황궁도 연회 준비로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천자와 천태비의 측근들은 속삭였다.

‘드디어 반려자이신 불로초를 찾았나 봐.’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늘이 내리고 천태비가 간택한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며, 그래서 더 궁금해했다. 그건 아마도 정확한 혼인날이 정해지면 공개되리라. 그동안 그 여인은 부정 탈 일 없이 태황궁에 잘 모셔져 있겠거니 생각했다.

“허면 그 처자가…, 분명한 것이옵니까.”

소식을 들은 서문이 천태비 궁에 당도하여 물었다.

“어제 하늘에 별이 떴답니다. 완벽한 각성의 별이었어요.”

천태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늘이 내린 능력, 천태비의 별점은 결코 틀릴 리가 없었다.

“허나 아직 확신하기엔 이른 것이 아니옵니까.”

서문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성정을 알고 있기에 천태비는 차분한 음성으로 답했다.

“몸속에 흐르는 피만큼 정확한 증거가 있을까요? 그런 피를 가진 이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랍니다.”

천태비의 입가로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안 그래도 천자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으니, 기쁜 소식은 빨리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현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다지만, 이는 그저 덮어둔 것에 불과했다.

천태비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천자에 대한 완벽한 신격화.

그것이 태황국 전체에 온전히 뿌리박히길 바랐다.

그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정당화될 수 있도록.

그런 천자가 몸에 흠이 있고 아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인간만이 가진 나약함이니까.

“허니 최대한 성대하게 연회를 준비하세요. 천자의 건재함과 자비로움을 알려야 하니, 곳간을 열어 충분히 베풀고 원들을 모두 소집하고요.”

“예, 천태비님. 분부 받들겠습니다.”

서문의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장곡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장곡을 내보내고 방 안엔 천태비와 서문만이 남았다.

“서문.”

“예. 천태비님.”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태의 서문을, 천태비는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서문은 어쩐 일인지 불안했다.

“그동안 그대가 나와 천자를 위해 얼마나 애써주었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그래요. 그대의 그 충성심에 대해 난 한 번도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천태비의 목소리가 나긋해질수록, 서문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그대를 처음 봤던 날이 기억나요. 약관을 앞둔 그대의 눈이 얼마나 맑게 빛이 났는지.”

어의가 되어 태황궁에 들어가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눈동자에 그득했다. 그 열망을 욕망으로 물들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은 먹물 한 방울만으로도 금세 탁해지는 법이니까.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쾌락을 모르기에 더 손쉽게 길들일 수 있었다.

“그대가 가진 재능이 난 무척이나 아까웠답니다. 그건 분명 보통의 인간들보다 뛰어난 것이었으니까요.”

해서 표적으로 삼았다.

제게 씨를 주고 그것을 지켜줄 인재로.

“헌데 이미 태어의가 되고서도 아직 욕심을 다 채우지 못했나 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서문이 마른 침을 삼켰다.

“특출난 아이를 보니까 갖고 싶어지던가요?”

서문의 마음 깊숙이 사그라지지 않은 열망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저와 꼭 닮은 아이를 찾아 특별한 인재로 키우고 싶다는. 그건 돈과 명예를 가진 것과는 색깔이 다른 욕망이었다.

“천태비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하.”

천태비가 재밌다는 듯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문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모두 알고 묻는 천태비의 심기를 더 거스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리 꿋꿋하게 버티는 건 정말 천태비의 말처럼 가비가 갖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 영특하고 총명한 아이를 제 유일한 제자로 두어 모든 의술을 전해주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서문의 마음 깊숙이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가져오너라.”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시종관을 향해 천태비가 명령했다.

시종관이 천태비의 손에 무언가를 올려놓았고, 천태비가 그것을 서문의 앞에 보란 듯이 쏟았다.

후두둑-

“비밀을 만든 순간, 신뢰는 깨져요. 알고 있겠죠?”

“처, 천태비님….”

“얼마나 욕심이 나면 계집인 것까지 숨겨줄까.”

“…천태비님!”

서문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런 서문을 천태비가 내리뜬 눈으로 바라봤다.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 된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갈대 같다는 건 알았지만, 그대가 날 속일 줄이야.”

흥이 떨어졌다는 듯, 천태비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까 한번은 봐줄까요?”

서문이 말문을 닫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시선 끝으로, 제가 가비에게 건네주었던 개짐 주머니가 보였다.

* * *

“어? 왜 비는 것 같지?”

서랍을 열어본 가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짐이 들어있던 주머니의 개수가 왠지 부족한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신경 쓰지 않았다. 요 며칠 제가 좀 꺼내 썼으니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달거리는 사흘째 되는 날 끝이 났다. 초경이라 그런지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불편했던 통증도 하루 만에 가셨고.

서랍을 닫고 일어난 가비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덕분에 업무를 일찌감치 마치고 명의당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명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다 머리칼을 한데 모았다. 어느새 묶일 만큼 길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여분으로 남아 있는 옷 매듭으로 머리를 묶었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명경 속 제 얼굴을 보고 방긋 웃은 가비가 방을 나섰다.

“근데 그 얘기 들었어?”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 같은 장소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오정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연회장엔 귀물경비대가 함께 한대.”

“그게 왜?”

당연한 일을 왜 이리 침울하게 말할까 싶어 가비가 물었다.

“왜냐니. 원래 천자님과 야왕님의 연회 자리는 따로 마련되잖아. 두 분의 기운이 상충하니까.”

하, 그렇단 말이야?

연회까지 한자리에서 함께 하지 못하다니. 핑계가 좋아 기운의 상충을 운운하는 것이지 가비가 보기에 이건 그냥 반소와 귀물경비대 자체를 태황궁에서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헌데 이번엔 같은 연회 장소에서 함께 한다는 거야. 얼마나 불편하겠어.”

오정이 죽상을 하고 투덜대자, 듣고 있던 겸복이 달래듯 읊조렸다.

“경사스러운 일로 연회를 연 것이니, 천자님께서도 깊은 선심으로 하해와 같은 마음을 내신 거다. 그 뜻을 우리도 헤아려드려야지.”

“그건 그렇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비가 울컥 오르는 분심을 참았다. 이 감정은 오정과 겸복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반인반귀라는 사실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받아온 반소와 귀물경비대가 안타까워서였다. 또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강요해 온 건 천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천자와 천태비.

반소를 낳은, 반소와 한배에서 태어난 자들의 신념이었다.

“반소님이 정말 불길한 존재라면, 액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음궁에 있는 모두는 벌써 큰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가비가 애써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근데 주치의인 봉 어의님도, 일하는 시종들도 모두 멀쩡하잖아. 나도 그렇고.”

그 말에 겸복과 오정이 가비를 바라봤다. 짐짓 뜻밖의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잖아. 만약 나한테 액운이 붙었다면 나랑 함께 있는 너희들도 안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잖아.”

맞는 얘기였다. 오히려 셋이 뭉쳐서 좋은 일이 생겼다면 모를까.

그런 생각 때문인지 겸복과 오정에게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온 신념이 한순간 바뀔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다른 쪽으로 생각해볼 여지는 줄 수 있었다. 가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길. 가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예쁘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린 연회장 길은 오색빛깔의 연등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가비를 비롯해 그 길을 걷는 모두가 넋을 잃고 감탄했다.

“연화도 봤으면 난리였을 텐데….”

연화 생각에 못내 아쉬움이 가득했다. 겸복과 오정도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도착한 연회 장소는 이미 자리마다 음식이 정갈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가비의 눈은 반소부터 찾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를 찾아냈다. 새벽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쪽빛의 비단옷을 차려입은 반소의 모습은 연회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 수려하고 눈에 띄었다.

심장이 뛰었다. 마음을 깨달은 후 더 분명하고 강하게,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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