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8화 (68/95)

[68화]

연회장 안. 의궁 어의들의 자리는, 천자가 앉는 상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천자가 의궁을 각별히 아낀다는 증거였다.

태어의 서문이 의궁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았고 그 뒤로 선학들이, 또 그 뒤로 후학들이 줄을 맞춰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가비의 시선은 반소를 향해 있었다.

반소와 귀물경비대의 자리는 의궁의 맞은편 대각선 쪽에 있었다.

둥둥둥둥-

이내 커다란 북소리가 현의 등장을 알렸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현을 맞았다.

황금색 상투관 안으로 말아 넣은 금백색의 머리칼.

연회장에 띄운 연등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는 금안.

하얀 피부와 그에 걸맞은 상앗빛의 비단옷까지.

천족일 수밖에 없는, 천족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외모였다. 그런 현을 사람들은 홀린 듯이 바라봤다. 천족의 외모적 특징을 알고 있는 사람도, 몰랐던 사람도 느끼는 바는 똑같았다.

‘진정 하늘이 내린 성스러운 혈통. 그 용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만큼 이번 연회는 특별했다. 보통은 연회가 열려도 천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측근들과 지방 도시를 관할하는 원들뿐이었다. 이렇게 천자가 직접 나서서 태황궁 모두에게 얼굴을 보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경애심이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현이 금실로 수놓아진 상석, 보료 위에 앉았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준 모두에게 고맙소.”

나직한 현의 음성이 연회장 중앙으로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울러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오.”

“혼인 발표를 감축드리옵니다!”

사람들이 하나 된 목소리로 외쳤다.

가비가 흘긋 눈을 들어 상석을 바라봤다. 현과 그의 수족인 장곡뿐이었다. 천태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가비의 속마음을 꿰뚫은 것처럼 현이 말을 이었다.

“천태비께선 존체가 편치 않으시어 마음만 전하셨소.”

“개의치 마시옵소서!”

천태비의 부재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듯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건강이 더 악화될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가비가 직접 겪은 천태비는 달랐다. 유약한 외모와 달리 뿜어내는 기운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병자 코스프레라도 하는 건가?

가비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시종이 칠보로 장식한 술잔 하나를 현의 앞에 내려놨다. 연회는 천자의 축배로 시작하고, 그 축배의 잔을 채워주는 건 현을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허나 현은 오늘 그 축배를 다른 이에게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었을 때, 반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이 연회는 비단 경사를 위한 것만은 아니오. 태황국을 위해 일해준 모두를 위한 자리이기도 하오.”

현은 완벽하게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특히 올해는 귀물경비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못해 아쉬웠던 참이었소. 이 자리를 빌려 귀물경비대의 무사 귀환을 뒤늦게나마 환영하며, 축배의 잔을 나의 형님인 야왕에게 넘기겠소.”

순간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가, 감읍하옵니다….”

누군가의 어색한 선창에 이내 사람들이 하나 된 목소리로 외쳤다.

“천은에 감복하옵니다!”

현의 눈짓에 시종이 술잔을 들고 반소에게로 다가갔다.

앞에 놓인 술잔을 반소가 내리뜬 눈으로 바라봤다. 모두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것은 반소뿐이었다.

“야왕에게 축배의 잔을 채워줄 사람은 나오시오.”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시선을 내린 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누가 반인반귀, 그것도 부정을 통해서 태어난 불길한 존재에게 축배의 잔을 채워줄까. 축복받지 못한 자에게 축배라니. 어불성설이었다.

너무도 뻔한 치욕. 천자에게 홀린 사람들은 이것이 천자가 형을 위해 베푸는 자비이자 선심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가비가 보기엔 반소를 찍어누르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넌 반인반귀, 괴물일 뿐이다.

태황궁에서 네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조차도 모두 내 것이야.

천족의 순혈은 오직 나뿐이니까.

반소를 향한 명백한 적대심과 경멸을 숨긴 채, 현이 인자한 얼굴로 상황을 관망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적막 속에서 술잔을 내려다보는 반소의 얼굴은 무감하기만 했다.

뒤에 앉아 있던 귀물경비대가 굳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곤이 부들거리며 풍을 향해 속삭였다.

“아무리 천자님이라 해도 이건 너무한 처사다. 반년을 나가 경계를 지키는 우리에게, 반소님에게…,”

“쉿.”

풍이 눈짓했다. 분하긴 하지만 귀물경비대의 현재 위치를 실감하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축배의 잔을 채워줄 사람은, 귀물경비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결국 태황궁 안에서 고립되고 배척당하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풍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눈을 드니 자신보다 먼저 일어난 자가 있었다. 가비였다.

터벅, 터벅, 터벅.

가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귀물경비대 쪽으로 향했다. 엎어져 있던 사람들이 죄다 고개만 들어 놀란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우뚝.

가비의 걸음이 정확하게 반소의 앞에서 멈췄다.

“…….”

반소의 검은 눈이 가비를 올려다봤다.

가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잔을 채웠다.

꼴꼴꼴꼴-

숨죽인 침묵 속에, 술 따르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잔을 가득 채운 가비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목숨 걸고 경계를 지켜주시는 야왕님과 귀물경비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주친 시선으로 가비가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반소가 느린 동작으로 술잔을 잡았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현을 향해 가볍게 잔을 들어 보였다.

일순, 현의 눈가가 사납게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눈을 직시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술을 넘긴 반소가, 현을 향해 무언(無言)의 경고를 보냈다.

이 아이는 건들지 마라.

아니면 지금껏 살아온 삶을 뒤엎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마침내 축배의 잔이 비워지고, 연회가 시작됐다.

해가 진 후 시작된 연회는 자정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초반 어색하고 착잡했던 분위기는 쌓여가는 술병을 따라 저 멀리 날아갔다.

역시. 저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경직된 분위기를 푸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나 보다.

가비도 한잔 두잔, 입안을 휘감는 달큼한 과일주를 연거푸 마신 참이었다. 마실 땐 몰랐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몽롱한 것을 느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음악도 끊기고 두런대던 사람들의 수다 소리도 작아졌다. 가비가 머리를 털며 귀물경비대 쪽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반소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가비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반소의 흔적을 찾았다.

“야야, 너 어디가아-”

얼큰하게 취한 오정이 일어나려는 가비를 잡았다.

“남은 건 다 마시고 가야지이-”

잔뜩 혀를 꼰 채, 거머리처럼 가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나마 멀쩡한 겸복이 오정을 뜯어냈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뜰 안쪽을 가리켰다. 반소를 찾는 가비를 눈치챈 것이다.

가비가 입술을 꾹 물며 겸복을 향해 툭 내뱉었다.

“고맙다, 겸복아.”

축배의 잔을 채웠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기억났다.

놀란 것도 잠시. 경악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자가 총애한다고 소문이 난 가비였다. 영특하고 총명하여, 태어의 서문도 아낀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 자가 보란 듯이 천자와 서문이 보는 앞에서 야왕 반소에게 호의를 보였다. 감사하다며 축배의 잔을 채웠다. 이는 명백히 천자의 총애를 등지는 행위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연회가 시작된 이후 전처럼 가비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다. 되레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전과 후가 같은 건 오직 겸복과 오정뿐이었다.

“신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라. 오정이 놈이 또 붙잡고 늘어지기 전에.”

“어.”

가비가 등을 돌려 겸복이 가리킨 뜰로 향했다.

연등이 이어진 연회장 길이 끝나자, 이내 시커먼 어둠이 가비를 덮쳤다.

어디로 간 거야.

가비의 걸음이 뜰 안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술잔을 받던 무심한 눈빛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너무도 태연했지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반소-! 라며 소리쳐 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너른 뜰을 얼마나 헤맸는지 술이 오른 머리가 핑, 돌았다.

“…엇!”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려는 몸을, 누군가 붙들었다. 반소였다.

“…찾았다.”

가비가 배시시 웃으며 반소의 팔을 붙잡았다. 똑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소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마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진한 과일주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취했군.”

“완전.”

가비가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주량을 모르거든.”

대학에 들어가면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보는 것도 바랐던 일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다른 세계에서 듣도 보도 못한 과일주를 마시고 취할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가비가 반소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찾고 있었어.”

“기다렸다, 나도.”

제가 일어나면 가비가 저를 찾길. 찾아서 쫓아오길 바랐다. 금방 오지 않기에 다시 되돌아가려던 길에 가비를 발견한 거였고.

“앉고 싶어.”

가비가 푸후- 힘겨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가자, 우리 아지트로.”

“아지트?”

“우리 둘만의 장소를 말하는 거야. 음궁에 있는 네 침소.”

침소라…. 꽤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무래도 보통 취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반소가 가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비가 말한 대로 그들만의 장소, 음궁 침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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