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날. 가비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입맛이 별로 없었다. 대신 침상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뜻밖의 변화에 이런저런 잡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런 기분이구나….
그제야 달거리를 할 때마다 친구 은영이 투덜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단하게 뭉친 가슴과 통증이 머무는 아랫배. 어쩔 땐 허리까지 아프다더니. 지금 가비의 상태가 딱 그랬다.
가비가 불편한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고쳐 누웠다.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성스러운 일.
그걸 비껴간 자신이 때론 비정상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몸을 끊임없이 의심하기도 했다. 솔직히 희망이야 품고 있었지만 반 포기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현실이 되자 뭔가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당장 서랍 안에 있는 개짐이 넉넉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문을 열어보니 앞에 겸복과 오정이 서 있었다.
“괜찮아?”
오정이 걱정된 얼굴로 물었다.
“응. 괜찮아.”
저녁을 먹으러 가자던 오정과 겸복에게 머리가 아파서 쉰다고 둘러댄 참이었다. 그런 가비가 걱정이 되어 온 모양이었다.
“내 담당 선학님께 부탁해서 두통에 좋은 약재를 좀 받아왔어. 먹어봐.”
겸복이 작은 약재 봉투를 내밀었다.
“고마워.”
가비가 진심을 담아 오정과 겸복에게 인사를 건넸다. 천자의 총애와 상관없이 자신을 진실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동기들이었다.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하고.”
“그럴게.”
오정과 겸복을 보낸 가비가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모두 일과를 끝낼 시간이었다.
반소도 돌아왔을 텐데…….
일찍 들어오는 바람에 반소도 귀물경비대도 보지 못했다.
…불쑥,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별다른 일 없이 이 시간에 명의당을 나가려면 선학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오늘은 못 보겠네….
가비가 눈을 감았다.
내일 일찍 가서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까무룩 잠이 든 찰나,
톡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비가 가는 눈을 떴다.
…누구지?
간신히 잠을 쫓으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톡톡톡.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비가 뒤를 돌아봤다. 정신을 차리고 들으니 방문이 아니라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덜컹.
창문을 열자, 잠이 들기 직전 생각했던 반소의 얼굴이 있었다.
“반소….”
저도 모르게 반가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살풋,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듯 보였다.
“여긴 무슨 일로…,”
“몸이 안 좋아 일찍 들어갔다고 들었다.”
반소의 눈이 가비의 안색을 가늠했다.
“얼굴이 창백하다. 아파 보여.”
“아니. 꾀병 부린 거야. 쉬고 싶었거든.”
“거짓말.”
반소가 손을 들어 가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 것 같군.”
어의 같은 말투에 가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빼꼼 얼굴을 내밀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뒤뜰 쪽이라 적막했다.
“저녁은. 먹었나?”
“아직. 배가 별로 안 고파서…,”
혹시 걱정할까 봐 말을 덧붙이려는데 입속으로 무언가가 쏘옥 들어왔다.
달큼한 단물이 금세 입안을 기분 좋게 적셨다.
“사탕이네?”
“어. 노란색.”
언젠가 서고에서 반소에게 준 적 있는 그 사탕이었다. 이걸 사 들고 온 반소가 너무도 뜻밖이라 웃음이 났다.
가비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반소를 내려다봤다. 늘 올려다보다가 살짝 내려다보니 얼굴이 달리 보였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
홑꺼풀의 길게 빠진 눈초리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선이 분명한 입술까지.
강인하고 사내다운 이목구비는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가슴이 뛸 만큼.
한두 번 본 얼굴도 아닌데 왜 이러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반소의 시선 앞에서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반소의 손이 다시 가비의 이마를 짚었다.
“지금은 열이 좀 나는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런 거.”
가비가 반소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런 가비의 손을 반소가 다시 잡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이건…….”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소의 손에 들린 건 팔찌였다. 가비가 반소에게 사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샀어?”
“응.”
“왜?”
“너 주려고.”
반소가 잡고 있던 가비의 팔목에 그것을 채웠다. 쉽게 풀어질 수 없도록 매듭을 단단히 묶어 마무리했다.
순식간에 채워진 팔찌 하나를 가비가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까지의 인연을 기원하는 삼생의 팔찌.
정인끼리 나누어 낀다는 그것을 반소가 제게 채웠다.
“빼지 마라. 나도 뺄 생각 없으니까.”
반소가 팔찌가 채워진 제 손목을 가비에게 보이며 말했다.
가비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려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요동치듯 뛰었다. 이상하게 반소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애써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팔찌를 풀 것처럼 농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 맘대로 이걸……,”
반소의 손이 가비의 손목을 지그시 움켜잡았다.
“빼지 마. 날 불안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가비가 반소를 바라봤다.
반소의 눈이 어둡게 침잠됐다.
“천자가 널 욕심내고 있어.”
지시한 대로 우대장 풍은 태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듣고, 반소에게 보고했다.
해서 오늘, 현이 의궁을 찾았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이는 명백히 가비를 제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자의 총애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반소는 그게 불안했다.
가비가 덥석 현의 손을 잡을까 봐.
가비는 단 하나…, 제게 최초의 애정이자 갈망이었다.
그런 존재를 뺏길까 봐, 반소는 처음으로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허나 가져본 적이 없는 자는, 잃어버리는 것 또한 몰랐다. 몰라서 그저 지킬 뿐이었다.
그러니까 넌…. 넌 내 사람이어야 해.
팔찌가 채워진 가비의 손목에, 반소가 입술을 댔다.
가비가 흠칫, 놀란 숨을 삼켰다.
“말해봐.”
반소의 뜨거운 숨결이 가비의 손목을 간질였다.
“이걸 빼지 않겠다고.”
확답이 필요했다.
“내 손을 놓지 않겠다고.”
지금까지 누구도 절 갖고 버린 적이 없었다. 가지게 한 적도 없으니 버림받을 일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허나 가비에겐 허락한다.
자신을 소유하기를.
“약속해라. 이 자리에서.”
강요에 가까운 반소의 행동이, 가비는 어쩐지 가슴 뛰게 설레면서도 안쓰러웠다.
가비가 반소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했다.
맹목적인 애정을 갈구하듯이.
“빼지 않을게. 네 손 놓지 않을 거고.”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는 반소의 머리를, 가비의 손이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손마저 잡아내려 반소가 입을 맞췄다.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소의 가슴 속 깊숙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걱정마. 나에 대한 천자의 관심은 금방 꺼질 테니까.”
과연 그럴까.
반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비는 아직 현을 잘 몰랐다.
모두 가졌기에 갖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의 욕심을. 욕망을.
“내일은 약방에 나와라. 쉬고 싶으면 내 침소에서 쉬어.”
“응. 그럴게.”
대답을 들은 후에야, 반소가 아쉬운 듯 손을 놓았다.
“잘 자라.”
“너도.”
가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소가 이내 등을 돌렸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듯, 그렇게 천천히 가비에게서 멀어졌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비가 여전히 쿵쾅대는 자신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마음이 일렁였다. 반소에게로.
조금씩 물꼬를 트던 마음이,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흘러넘쳤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애틋함이 가비의 온 마음을 적셨다.
내가 널…, 좋아하나 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지금 반소에게 느끼는 이 모든 반응은.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짝사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고 감정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가비는 반소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달이 기운 밤.
가비의 몸과 마음이 모든 걸 각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