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5화 (65/95)

[65화]

동이 트기 직전. 현은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잠도 푹 잤고, 몸 상태도 가뿐했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그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열이 오르고 거칠했던 피부가 매끈했다.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더듬었다. 손끝으로 부드러운 감촉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장곡!”

현이 커다랗게 장곡을 불렀다. 문밖에 서 있던 장곡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왜 그러시옵니까!”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하던 장곡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침상 아래로 발을 내린 천자가 장곡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명경, 명경을 가져오라.”

장곡이 후다닥 명경을 가져왔다. 그것을 받은 현이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제 얼굴을 비춰봤다. 장곡이 물기 어린 음성으로 기쁘게 외쳤다.

“천자님!”

명경 속에 비친 현의 얼굴은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이제 되었습니다. 돌아오셨습니다!”

장곡이 제 병이 나은 것처럼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현이 명경 속 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얗고 고귀한 천자의 얼굴이었다.

“…하.”

현의 입가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다시는 찾지 못할 얼굴인 줄 알았다. 혈담초로 통증을 줄이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다. 헌데…….

“…돌아왔어.”

비로소 명치를 콱 틀어막고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깊은 안도감과 함께.

허나 이건 일시적일 뿐이었다. 완벽한 치유를 위해선 불로초를 찾아 결합해야만 했다.

“불로초, 천자비를 찾는 것은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조만간 그에 대해 천태비님의 말씀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다는 건, 뭔가 진전이 있다는 건가.

현의 시선이 머리맡에 있는 인형으로 향했다.

하긴. 장곡이 버린 인형까지 찾아내어 돌려준 어머니였다. 하물며 제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불로초를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태황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었다.

“그 아이는…, 은갑이는 어찌 지내고 있는가.”

“평소와 같사옵니다.”

“그래…….”

뚫린 가슴으로 허전함이 고였다.

나는 무얼 바랐나.

네가 내게 조금이라도 동요하길 바랐던 건가.

평소와 같지 않길 바랐다. 미움이든 경멸이든 제게 반응하길, 자신을 신경 쓰고 있길 바랐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다니. 그건 곧 제가 가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우연인지 아닌지. 아니, 절대적으로 우연이겠지만 가비를 본 이후 얼굴을 더럽히고 있던 병증이 서서히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오늘,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가비가 제게 주는 감정의 종류가 무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분명한 건 제 심적 평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두 번 다시 제게 손대지 마십시오.’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내뱉던 가비의 눈빛이 떠올랐다.

‘불경죄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더라도, 천자님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은갑아….

“그 아이가 필요하다.”

난 네가 필요하다.

“옆에 둬야겠어.”

불로초를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아니, 찾고 난 후라도 가비가 곁에 있길 바랐다.

“모두 내 것인데 못 가질 이유가 없지 않나.”

현이 동조를 명하듯 내리뜬 눈으로 장곡을 바라봤다.

“천자님의 뜻대로 하소서.”

불로초를 찾을 때까지는 천자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그 어떤 말과 행동도 하지 말라는 천태비의 명이 있었다. 무릎을 꿇은 장곡이 이마를 바닥에 대며 복종의 뜻을 전했다.

이른 아침. 의궁이 떠들썩해졌다. 이유는 갑작스러운 현의 방문이었다. 예고도 없는 천자의 등장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업무지로 나서기 전 하던 조례는 삽시간에 뒤집어졌고, 다들 천자를 앞에 두고 허둥지둥 줄부터 맞춰 섰다. 마침내 정렬이 정돈되자, 태어의 서문이 대표로 나아가 인사를 올렸다.

“태어의 서문과 의궁 어의들이 천자님을 봬옵니다.”

“천자님을 봬옵니다!”

우렁찬 음성이 현의 귓가를 울렸다. 깊이 허리를 숙인 어의들 사이로, 현의 눈동자가 가비를 찾기에 바빴다. 그리고, 아침 햇살에 은은하게 빛나는 갈색의 작은 머리통을 발견하고 금안을 반짝였다.

“그래. 그대들이 수고가 많다.”

나직한 음성으로 인사를 받자 그제야 다들 숙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내 그동안 집무실에 박혀 업무를 보느라 궁 안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였다.”

그 한마디로 현은 제 건강에 대한 소문을 일축해버렸다. 이는 곧 의궁을 시작으로 태황궁 전체로 번지리라. 그리고 그걸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천자인 자신이 그렇다는데, 감히 토를 달 자는 없었다. 토를 달고 싶다 해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이었다.

“바쁜 일을 모두 마치시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의궁입니다.”

장곡이 현의 말을 받침 하듯 읊조렸다.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태황궁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곳인데.”

“감읍하옵니다!”

서문을 비롯한 모든 어의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단 가비만 제외하고.

가비가 저만치, 선학들 사이로 보이는 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놀라울 만큼 깨끗했다. 도무지 병증이 있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설사 병증이 있었다고 누군가가 얘길 한들, 아무도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어의들에게 다가오는 현을 보며 가비가 황급히 시선을 떨궜다.

마치 독대하듯, 현은 느린 걸음으로 어의 한명 한명을 지나쳤다. 예의적으로 던지는 한마디 격려에 누군가는 영광인 듯, 누군가는 감명을 받은 듯 대답했다.

가비는 제발, 현이 자신을 그냥 지나치길 바랐다. 그냥 모른 척, 그게 안 되면 다른 이들과 똑같은 말을 건네주길 바랐다. 허나 그건 가비의 욕심이었다.

시야 끝으로 현의 신발이 보였다. 발걸음은 정확하게 가비 앞에서 멈춰 섰다. 그렇게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비를 응시했다.

가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공손히 모으고 있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런 가비를 향해 현이 손을 뻗었다. 뺨을 스치는 손길에 가비가 흠칫, 눈을 들었다.

“저런. 옷깃이 망가졌구나.”

눈이 마주치자, 현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더는, 온화해 보이지 않았다. 가비가 다시 시선을 떨궜다.

현이 뒤따라오던 서문을 향해 명령했다.

“당장 새로운 의복을 지급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의궁 전체에 의복을 하사하도록 하지.”

그 말에 서문이 놀란 눈을 떴다.

“의궁 전체에 말입니까?”

너무 이례적인 하사품이라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인재가 모인 곳인데 임명식에 참석 못 한 대가가 고작 붓 하나일 수는 없지.”

넓디넓은 아량에 다들 감격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천은에 감복하옵니다!”

현이 인자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가비를 지나쳤다.

그제야 하아-,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가비가 슬쩍 눈을 돌려 멀어지는 현을 바라봤다. 그날 밤 불경했던 자신을 그냥 두는 거로도 모자라, 이렇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호의를 드러내다니. 현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목적을 달성한 듯 현이 가벼운 걸음으로 의궁을 나섰다. 자신에게 따라붙는 가비의 시선을 느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상황과 자신을 의식하는 가비의 반응이 무척이나 달가웠다.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천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이 태황궁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단 어의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이 달라질 것이었다. 선망하는 눈길로 가비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하겠지. 그 뻔한 관심과 아부를 제 맘대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 힘을 줄 수 있는 게 누군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될 것이었다.

형님 곁에 있으면 고립이다.

그걸 택할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은, 이제 곧 제 발로 찾아올 가비의 모습을 기대했다.

어쨌거나 현이 의도한 데로, 가비는 반나절 만에 태황궁 안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사람이 둘만 모여도 ‘실밥이 조금 풀린 옷깃을 보시고 의궁 전체에 의복을 하사하셨대’라는 말이 오갔다.

덕분에 가는 곳마다 시선 집중이었다. 가비는 그게 눈총처럼 느껴져서 싫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눈에 빤히 보이는 봉 어의의 과도한 친절은 앉은 자리를 가시방석으로 만들었다.

…피곤해.

안 그래도 어제부터 몸이 무거웠는데 정신적인 피로도까지 높아지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왜 그런가, 은 어의? 혹 피곤한 겐가?”

“예?”

가비를 예의주시한 듯 봉 어의가 달려왔다.

“그럼 들어가서 좀 쉬게.”

“아니요, 그 정도는…….”

“어허, 내 말대로 하래도.”

봉 어의가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며 가비가 보고 있던 서책을 탁, 덮어버렸다.

“정말 괜찮은데요.”

“거참 사람하고는. 어서 말 듣게.”

봉 어의가 가비를 억지로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그리 빡빡한 선학은 아닐세. 허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봄세.”

“저기요, 봉 어의님. 저 진짜 괜찮……,”

쾅-!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가비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미치겠네.”

이게 다 현 때문이다. 자신을 이 구역의 완전 미친 핵인싸로 만들어버렸다.

“모르겠다.”

가비가 지친 얼굴로 돌아섰다. 이렇게 된 거, 정말 들어가서 쉴 생각이었다. 당장은 잠부터 자고 싶었다.

텅 빈 명의당에 들어와 대낮부터 한숨 늘어지게 잤다. 해가 떨어질 때쯤이 돼서야 가비는 눈을 떴다. 잠이 깨서 일어난 게 아니라 아랫배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이었다.

“아…….”

가비가 몸을 웅크리며 배를 감쌌다.

잠잠하더니 또 이러네.

한동안 괜찮아서 별거 아닌 줄 알았더니 다시 시작이었다.

가비가 부스스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정말 서문님께 진료라도 받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중, 아래쪽 속곳이 눅진하게 젖어 들었다.

뭐지…?

생경한 느낌.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것만 같은 느낌.

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기에 가비는 서둘러 뒷간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가비가 뒷간의 맨 끝 칸으로 들어갔다. 긴장된 마음으로 바지 매듭을 풀었다.

맙소사….

초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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