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봄꽃으로 화려하던 태황궁의 색깔이 바뀌었다. 자잘하고 귀여운 여름꽃이 만발했고, 연둣빛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듯 하늘 높이 위용을 자랑했다.
가비는 자신이 살던 저쪽 세계도 사계절이 뚜렷했지만, 태황국보다는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태황국의 계절 변화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바람도, 풍경도 그림을 그리듯 휙휙 바뀌었다.
오전 업무를 끝낸 점심시간.
동기들과 식사를 마친 가비가 쉬는 시간 없이 음궁으로 돌아왔다. 여름꽃이 흐드러진 다른 곳과 달리, 음궁은 해가 들지 않아 그런지 어둑한 초록색만 무성했다.
“어디 보자. 어디가 좋을까.”
자리를 가늠해보던 가비가 처소를 둘러싼 화단으로 갔다. 사실 화단이라고 하기에도 뭐 했다. 잡풀만 듬성듬성 있었다.
한쪽에 쭈그리고 앉은 가비가 들고 온 보따리를 내려놨다. 태황궁의 뜰을 관리하는 화궁에서 직접 받아온 꽃모종이었다.
연화의 갑작스러운 퇴궁 이후 가비는 평소처럼 지냈다. 그저 음궁 약방과 명의당을 오갈 뿐 눈에 띌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귀물 사건과 연화의 일이 신경 쓰였지만, 반소의 말처럼 기다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가비가 작은 삽을 이용해 눅눅한 땅을 파고 모종 하나를 심었다.
“예쁜데?”
만족한 얼굴로 땅을 툭툭 다져주는데, 음궁 정문이 요란했다.
돌아보니 반소와 귀물경비대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었다. 요즘 귀물경비대는 궁으로 들어와 휴식 시간을 갖고 다시 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그랬다.
“오셨습니까!”
가비가 몇 걸음 달려나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반소를 맞았다.
“별일 없으셨지요?”
반소가 피갑의 매듭을 풀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서 있던 곤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뭘 하고 있는 거요?”
가비가 반소에게 그러듯, 곤도 보는 눈이 많으니 어의가 된 가비에게 말을 높였다.
“꽃을 심고 있었습니다.”
“에엑- 꽃이요?”
곤이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아니 왜 쓸데없는 짓을 한답니까? 음궁에는 볕도 안 드는데.”
“그래서 제가, 해가 없어도 견디는 것들로, 골라 왔거든요?”
가비가 이를 꾹 물며 끊어 말했다. 아무튼 사사건건 간섭이었다.
“거참, 어의가 약방 일이나 잘할 것이지, 별걸 다 건드리네.”
보다 못한 풍이 옆구리를 찌르자, 곤이 더욱 목소리를 키웠다.
“그렇잖아. 맨날 무기만 들고 훈련하는 곳에 꽃이 웬 말이냐고. 어울리지 않게.”
투박하고 듬직한 것이 사내대장부라고 생각하는 곤은 꽃을 심는 가비가 영 못마땅한 듯했다.
가비가 지지 않고 말했다.
“맨날 무기 들고 훈련만 하는 곳이니까 심는 거죠. 보기만 해도 아주 삭막해 죽겠어. 우락부락 곰처럼 생긴 누구 때문에 더.”
끝에 말은 일부러 혼잣말하듯 중얼댔다.
“뭐, 뭐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우락부락 곰?”
풀쩍 뛰는 곤을 풍이 말렸다.
“이봐, 좌대장. 아무리 그래도 기본 예의는 지켜라.”
“지금 내가 예의 지키게 생겼어? 이 망아지 같은 게 나보고 우락부락 곰이라잖아!”
그런 곤을 본체만체, 가비가 반소에게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이 망아지는 물러갑니다.”
“저, 저저!”
삿대질하는 곤을 뒤로 하고, 가비가 총총총 화단 쪽으로 멀어졌다.
“어우, 뒷골이야.”
곤이 뒷목을 잡으며 반소에게 토로했다.
“반소님! 어쩌자고 저런 놈을 음궁 약방에 두십니까!”
언행이 시건방지다는 둥, 비리비리한 게 미덥지가 않다는 둥, 곤이 가비를 향해 험담을 쏟아냈다. 하지만 곤을 뺀 나머지는 지금 이 상황이 보기 드물게 웃겼다.
곱상하게 생긴 신입 어의가 곤을 약 올리는 모습은 어디 가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
옆에서 곤이 바락바락 떠드는 데도 반소의 시선은 가비를 좇았다. 텅 빈 화단으로 돌아간 가비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반소가 별안간 피갑을 벗었다. 귀물경비대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소를 바라봤다.
피갑을 모두 내려놓은 반소가 가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비 옆에 쭈그려 앉아 모종 하나를 손에 들었다. 가비가 놀란 눈으로 반소를 돌아봤다.
“하시려고요?”
“파서 그냥 심으면 되나?”
“심은 다음에 이렇게 잘 다져줘야 합니다.”
가비가 직접 시범을 보였고 반소가 그것을 따라 했다. 손으로 젖은 흙을 파내어 모종을 심고 그 주변을 꾹꾹 눌러주었다.
“잘하셨어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가비와 함께 모종을 심는 반소의 등을 보며, 곤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실화 맞나?”
“실화 맞다.”
풍이 짧게 답하며 뒤이어 피갑을 벗었다. 나머지 귀물경비대도 풍을 따라 피갑을 벗기 시작했다. 이내 곤을 뺀 귀물경비대 전원이 모종 심는데 합세했다.
그 모습을 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던 시종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뭔 일이래….”
야왕 반소가, 귀물경비대가 화단에 꽃을 심는 장면이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시종관의 눈이 조금씩 채워지는 화단을 바라봤다. 해가 없이도 살 수 있는 꽃이라 크게 화려하지도, 볼품도 없었지만 저렇게 놓고 보니 제법 눈요기는 되는구나 싶었다.
지켜보던 시종관이 음궁의 시종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 도와주시게요?”
가비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시종관이 긴장한 눈으로 반소를 향해 묻자,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대로.”
이제 화단은 시종들까지 합세해 더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곤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런 곤에게 시종관이 다가와 새침한 목소리로 내쐈다.
“덩치가 제일 좋은 분이 구경만 하실 겁니까?”
“아, 아니, 나는….”
“관망하실 게 아니라면 화궁에 가서 모종 좀 더 받아오시든지요.”
돌아선 시종관이 다시 자리로 갔다. 우물쭈물 뒷머리를 긁적이던 곤이 화궁으로 달려갔다.
이내 힘센 장수의 손엔 남은 화단을 가득 메울 만큼의 모종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음궁에 있는 모두의 손길을 거쳐, 삭막했던 화단은 순식간에 꽃밭이 되었다.
“으하하하! 보기 좋구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면박 줄 땐 언제고. 막상 채워진 화단을 보고 제일 좋아한 건 가비도 시종관도 아닌, 곤이었다.
“반소님! 음궁이 아주 환해진 것 같습니다!”
나쁜 말로 하면 무식한 거고, 좋은 말로 하면 단순한 거다.
그래도 뭐. 그런 사람치고 악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일을 마친 시종관과 시종들을 따라, 가비도 들어가려 할 때였다.
“어의님께서도 시원하게 등목이나 하고 가시죠!”
뭐?
가비가 돌아본 순간,
촤아악-!
물벼락이 쏟아졌다. 숨을 멈춘 가비가 쫄딱 젖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후두둑-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물줄기처럼 떨어졌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이건 자신을 놀리거나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 아님을 알았다.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린 귀물경비대가 서로의 몸에 물을 끼얹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만에 훈련이 아닌 다른 일로 땀을 흘린 게 개운하고 좋았는지 서로 웃고 떠들며 젖은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어이, 망아지! 뭐하고 섰어? 빨리 껴라!”
곤이 선심 쓰듯 말하며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크게 퍼 올렸다.
서, 설마…,
정신을 차린 가비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물바가지를 들고 오는 곤의 모습이 섬뜩했다.
“…미친!”
달아나려는 가비에게로 물 폭탄이 날아왔다.
촤아악-!
처음보다 물의 양도 많고 날아오는 강도도 셌다.
돌아선 채 눈을 질끈 감았던 가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물이 쏟아지는 소리는 들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몸을 웅크린 채 뒤를 돌아보자 시야를 가린 너른 어깨가 보였다.
“바, 반소님. 갑자기 그렇게 끼어드시면….”
당황한 곤이 말을 더듬었다.
한바탕 물싸대기를 맞은 반소가 조용히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곤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달아났다. 이내 물싸움을 빙자한 등목 현장 속으로 그 덩치 큰 몸을 숨겼다.
“아, 진짜….”
가비가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몸을 떨었다. 모종을 심을 때만 해도 등줄기로 땀이 났는데, 지금은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우물물이 여간 차가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여름옷이다. 들키지 않으려고 가슴을 세게 압박하고 얄팍한 옷을 두 겹이나 입었지만 이렇게 홀딱 젖으면 곤란했다. 아니나 다를까. 몸의 곡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할 수 없이 두 팔로 가슴께를 가린 채 자리를 피하려는데, 반소가 덥석 손을 잡았다.
“…어어!”
정신없는 귀물경비대를 뒤로하고, 처소의 뒤쪽으로 가비를 끌고 갔다.
“…잠깐만!”
아무도 없는 처소 뒤편. 걸음을 멈춘 가비가 반소의 손을 뿌리쳤다.
“왜, 왜 이래! 여긴 왜 온 거야.”
가비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어색하게 돌아섰다. 그런 가비의 어깨 위로 젖은 옷이 걸쳐졌다. 반소가 제 겉옷을 벗어 가비에게 준 것이었다. 가비가 그것을 당겨 가슴 앞으로 모아쥐었다.
반소가 힐끔, 덩굴 사이로 숨겨진 문 하나를 가리켰다.
“침소로 통하는 뒷문이다. 앞문으로 들어가면 시종들과 마주칠 거야.”
반소가 뒷문의 문고리를 찾아 잡아당겼다. 오래 묵은 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따라오라는 눈짓에, 가비가 천천히 반소의 뒤를 따랐다. 통로는 어둑하고 습했다.
보통 궁마다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이렇듯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마련돼 있는 듯했다.
“…아!”
바닥에 뭐가 있는지 발이 걸렸다. 반소가 비틀거리는 가비를 붙들었다.
“조심해.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어느새 커다란 손이 가비의 손을 감쌌다. 넘어지지 않게 걸음을 늦추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걸었는지. 걸음을 멈춘 반소가 딸칵, 하고 무언가를 당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빛이 보였다. 반소의 침소였다.
안으로 들어온 가비가 신기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이제 보니 침상이 놓인 맞은편 벽. 그곳에 통로로 연결된 문이 뚫려 있었다. 나무 문양으로 교묘하게 덧대어져 모르는 사람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우선 물기부터 닦고 아무 옷이나 갈아입고 나와.”
반소가 서랍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침소를 나갔다.
쿵.
잠자코 있던 가비가 문이 닫히자마자 움직였다. 서랍을 열어 반소의 말대로 아무 옷이나 꺼냈다. 일단 이걸 입고 명의당으로 가서 제대로 갈아입어야 했다. 가슴가리개도 홀딱 젖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이 입고 있어야 했다.
황급히 젖은 옷을 벗던 가비가 별안간 움직임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
“…….”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반소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거라는 걸.
불현듯 우직한 그의 배려가 다른 날, 다른 때보다 세심하게 느껴졌다.
뭐지…?
의구심을 가진 것도 잠시. 이내 생각을 떨치고 마른 옷을 껴입었다. 당장은 이 몰골부터 수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