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태어의 서문은 후학들이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다른 후학들보다 친분이 있는 가비라 해도 별 다를 바 없었다.
일단 태어의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자신의 담당 선학인 봉 어의를 찾아야 했지만 가비는 곧장 내약방으로 향했다. 봉 어의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해서 실례가 될 걸 알면서도 내약방의 집무실을 찾았다. 서문 혼자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게.”
가비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널따란 책상에서 일을 보던 서문이 뜻밖의 사람을 마주한 듯 눈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학들이 집무실을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은갑이가 아니냐. 앉거라.”
서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집무실 중앙에 있는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가비가 숨을 고르며 서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서문의 차분한 시선이 급하게 달려온 듯 보이는 가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비가 이마 위로 맺힌 땀을 훔치며 물었다.
“이번에 어의 시험에 합격한 연화 말입니다. 함께 감찰을 나갔던.”
“그래. 알고 있다.”
“정말…, 퇴궁했습니까?”
가비가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서문을 바라봤다.
“퇴직서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맞다.”
서문의 즉답이 돌아왔다.
“어젯밤, 직접 찾아와서 퇴직서를 제출했다. 내가 승인하였고.”
가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런 가비의 마음을 짐작하듯 서문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의학도로서 함께 공부하고 합격한 동기이니 네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구나.”
“저는……,”
가비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연화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서문이 직접 승인까지 해주었다는 데도 믿지 못해, 가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서문님도 보셨잖아요. 감찰을 나갔을 때 연화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어렵게 시험을 보고 어의가 되었는데 이렇게 쉽게……,”
“누구나 그렇지.”
서문이 부드럽게 가비의 말을 잘랐다.
“이루기 전까지는 꿈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허나 이루고 나면 생각보다 힘들고 상상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지. 연 어의도 그런 마음이었고 난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렸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
“그럼 연화가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자신이 생각했던 어의라는 직업이 사실과 너무도 달라서요?”
“막연하게 꿈꾸는 것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
“어떻게 그런…….”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서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퇴직서를 승인하자마자 퇴궁하겠다고, 출궁 허가증을 내달라고 하더구나. 함께 했던 친우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조용히 떠나고 싶다고.”
가비가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더는 물어볼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크게 실망한 듯 보이는 가비의 어깨를 서문이 가볍게 도닥였다.
잠시 후. 집무실을 나선 가비의 손에는 작은 봇짐이 들려 있었다. 서문이 온 김에 가져가라던 개짐이었다. 남장을 하고 있는 가비가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생각했는지 봇짐 안에 넉넉히 넣어주었다.
딱히 필요도 없는 물건인데….
가비가 기운 빠진 얼굴로 봇짐을 들고 터덜터덜 명의당으로 향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걸 들고 있으니 연화에게 끝까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밝히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명의당,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가비가 힘없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서문에게 받은 봇짐을 넣었다. 빈 서랍 속에 사용하지 않는 개짐만 차곡차곡 늘어갔다.
오는 길에 만난 겸복과 오정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가비를 기다리고 있던 겸복과 오정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연화가……, 그랬구나.’
오정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인사라도 하고 가지….’
섭섭함과 착잡함 사이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겸복과 오정의 말로는 간혹 그런 자들이 있다고 했다. 서문의 말처럼 아등바등 어의가 되었지만 막상 해보니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퇴궁한 경우가 더러 있다고.
다만 그게 연화가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어쨌든 연화의 결정이니 존중해주자. 가끔 출궁할 때 우리가 찾아가면 되지.’
겸복도 애써 서운함을 감추며 그리 말했다.
연화의 결정….
정말 그래. 연화야?
그게 네 결정이고 선택이야?
어의직을 내려놓고 퇴궁해 버리는 게?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 놓고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아닐 거란 생각이 가비의 머릿속을 쑤석거렸다.
‘실은 나도 그렇게 좋은 형편은 아니야. 너처럼 동생들도 줄줄이 있고.’
불현듯 연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시험 합격해서 어의가 된 걸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말을 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쉽게 그만둔다고?
우리한테 말도 없이?
주먹을 말아 쥔 가비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장 여자 어의들이 머무는 명의당으로 향했다. 어젯밤 급하게 퇴궁했으니 아직 방이 다 정리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 특히 남자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금역 같은 장소에 가비가 몰래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안은 조용했다. 모두 업무지로 나갔는지 텅 비어 있었다.
적막한 공간을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오갔다. 문 앞에 붙어 있는 이름자를 확인하다 마침내 ‘연화’라는 두 글자를 발견했다.
달칵-
숨죽인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없는 방은 서늘했다.
책상 위에는 의학도 생활 때 봤던 서책 몇 권과 명의당에서 기본적으로 지급하는 생활복이 놓여있었다.
정말…, 이렇게 가버린 거야?
…아니지?
가비가 옷장과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두고 간 게 없는지, 정말 자발적으로 나간 게 맞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제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나오길 바랐다.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가비가 반듯하게 개어진 이불을 들쑤셨다.
“……!”
베개의 아랫부분, 베갯잇 안쪽으로 무언가가 만져졌다. 서둘러 베갯잇 속으로 손을 넣어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면포에 곱게 싸인 것을 펼쳤다.
이건…!
머리 장식이었다. 감찰을 나갔던 날 가비가 연화에게 사줬던 머리 장식.
총 세 개로 똑같은 모양에 색깔만 다른 것이었다. 연화가 여동생들을 줄 거라며 기뻐했는데….
말도 안 돼….
이걸 두고 갔다고?
가비가 입술을 깨물며 머리 장식을 움켜쥐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죄다 버리고 침구는 세탁해야 하니까 거둬가도록.”
아무래도 이 방을 청소하러 온 모양이었다.
가비가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았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창틀에 발을 걸쳤다. 내다보니 성인 남자 키를 조금 넘는 높이였다. 주저할 거 없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파사삭-
안전하게 착지한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후우-’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억…!”
누군가의 손에 잡혀 건물 뒤쪽으로 끌려갔다.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단단한 팔과 입을 막은 커다란 손.
코끝으로 익숙한 체향이 스쳤다.
…반소!
반소에게 입을 틀어막힌 채, 가비가 숨을 죽였다. 간발의 차로 방에 들어온 시종 중 한 명이 열린 창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밀며 투덜댔다.
“창문은 왜 열어놨담? 비라도 오면 어쩌려고.”
쿵-
창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기척도 사라졌다. 가비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으며 긴장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자신을 옥죄고 있던 반소의 팔도 천천히 느슨해졌다.
가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왜 여기 있어?”
뜻밖의 시간, 뜻밖의 장소에서의 만남이었다. 가비는 반소의 등장이 반가우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그런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반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판이 커진 귀물 사건으로 인해 반소를 비롯한 귀물경비대는 상시 대기 중에 가까웠다. 오늘도 동이 트기 전,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도를 정찰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약방에 주치의만 덜렁 있고 가비가 없었다. 듣자 하니 오늘이 후학들의 시험날이고 시험이 끝나면 업무지로 와야 하는데 가비는 아직이라고 했다.
그런 가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불쑥 찾아 나선 건, 순전히 불안감 때문이었다.
현이 가비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인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찜찜했다. 한밤중 남몰래 양궁으로 불렀다는 것도 께름칙하고.
이후 정해진 시간에, 있어야 할 곳에 가비가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곤두섰다.
하여 오늘도 머리보단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비를 찾으러 명의당으로 향하던 중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는 가비를 보았고, 그 뒤를 쫓아온 길이었다.
반소가 주위를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일단 음궁으로 가자.”
“응.”
두 사람은 곧바로 음궁으로 향했다.
침소에 들어오자마자 가비가 맥이 풀린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반소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가비를 바라봤다.
“이제 말해봐. 거긴 왜 들어갔는지.”
여자 어의들만 머무는 명의당이었다. 그런 곳에 숨어들다니. 이는 잘못 걸리면 경을 칠 일이었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소용없었다.
“제발, 얌전히 있으면 안 되나?”
반소가 짐짓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된 모양인데 너 지금……,”
천자 현한테 찍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괜한 불안감만 가중시킬까 봐.
“어쨌든 이 이상 눈에 띌 만한 행동은 하지 마라. 아니면 내가 널 끼고 다닐 수밖에 없으니까.”
마음 같아선 가비를 종일 옆에 붙여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숨을 돌린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소를 바라보며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을 펼쳤다.
반소가 내리뜬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하얀 면포 위에 머리 장식 세 개가 놓여있었다.
“연화가 어젯밤 퇴궁했대.”
연화라면 가비의 동기다. 가비의 입에서 연화 말고도 겸복과 오정이라는 이름도 종종 들어 알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감찰을 나갔을 때만 해도 그런 낌새는 못 느꼈어. 그런데 갑자기 한마디 말도 없이 퇴직서를 내고 퇴궁했다는 거야.”
“그럼 서문에게…,”
“확인해 봤어. 연화가 서문님을 직접 찾아왔었대. 얘기한 뒤 서문님께서 승인해주셨고.”
가비가 머리 장식을 손에 쥐었다.
“근데 난 못 믿겠어. 이 머리 장식, 내가 연화 사준 거야. 연화 동생들 주라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보물처럼 베갯잇 속에 숨겨둔 걸…, 이걸 두고 갔다고? 뭐가 얼마나 급했길래.”
가비가 머리를 저었다.
“난 연화가 자발적으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 안 해. 무언가에 쫓겼거나, 아니면 강요당했거나. …절대 연화의 선택으로 나간 게 아니야.”
“…….”
잠자코 듣고 있던 반소가 생각에 잠겼다.
“매혈하러 갔을 때, 그 연화라는 어의와 함께 갔다고 했지?”
“응.”
반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네 말을 듣고 매혈꾼들을 쫓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갔던 매혈 장소도 다음 날 아침 불타 버렸고.”
가비가 놀란 입을 벌렸다.
“그 집 말고도 불난 집이 몇 곳 더 있어. 며칠씩 간격을 두고 난 불이라 일반적인 화재 사고 같지만, 아닐 수도 있지.”
“그럼……,”
반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해본 결과, 불이 난 집은 모두 매혈 장소로 쓰인 곳이었다. 더 기가 막힌 건 집주인들조차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한동안 넌 움직이지 마라. 누군가 널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라.”
가비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매혈꾼에 관한 것도, 네 동기에 대한 것도 내가 좀 더 알아볼 테니 기다려.”
이로써 추측은 심증이 되었다. 이는 결코 보통 매혈이 아니었다. 목적과 대상이 분명했다. 마치 귀물 사건처럼.
일련의 상황들을 되짚어보는 반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