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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62화 (62/95)

[62화]

방 안에는 노인 한 명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구부정한 자세를 보니 나이가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톡. 톡.

노인이 기척이라도 느낀 듯 제 앞자리를 두드렸다. 가비와 연화가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자리에 앉으려는 연화를 밀치고 가비가 대신 그 자리에 앉았다. 옆으로 밀려난 연화가 당황한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노인이 손을 내밀었고, 가비는 주저 없이 제 팔을 내주었다. 노인이 가비의 맥을 짚었다.

두근, 두근-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집요하게 맥을 느꼈다. 허공을 바라보는 노인의 동공은 안개가 낀 듯 탁했다.

이내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느꼈는지 팔뚝에서 혈이 뛰는 곳을 찾아 피를 뽑는 뾰족한 기구를 꺼내 들었다.

일회용은 아닌 것 같고, 소독은 한 거겠지?

일순 별의별 생각이 튀어 올라 마른 침을 삼켰다.

피를 뽑기 직전, 자신을 만류하는 연화를 손을 들어서 막았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살이 뚫리고 피가 뽑혔다.

뚝, 뚝-

떨어진 피가 작은 용기에 담겼다. 가만히 피가 뽑히는 시간을 재고 있던 노인이 기구를 빼고 옆을 가리켰다. 지혈을 할 수 있는 면포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중 한 장을 집어 피가 뽑힌 자리를 눌렀다.

피가 어느 정도 멎자 옷소매를 내렸다. 그리고 피가 묻은 면포를 연화에게 내밀었다. 뜻을 알아챈 연화가 제 옷소매를 올려 피를 뽑은 것처럼 면포를 갖다 댔다.

방을 나서기 전 가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용기 뚜껑을 닫으며 그 위에 그들이 가져온 번호표를 올려놓았다. 그런 용기가 노인이 앉은 자리 뒤쪽에 수없이 많았다.

덜컹-

문을 열고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가비가 서둘러 돈을 받는 곳으로 갔고, 연화는 보란 듯이 계속 멀쩡한 팔뚝을 지혈하듯 누르고 있었다.

가비와 연화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돈이 든 작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가비가 일부러 주머니를 그 자리에서 열어보았다. 생각보다 돈이 넉넉히 들어 있었다.

“그런데 조건을 붙여 매혈하는 이유가 뭡니까?”

가비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남자가 날카롭게 눈을 뜨더니 이내 무표정하게 내뱉었다.

“피를 사고파는 게 그리 자랑할 일은 아니니,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문일랑 내지 마시오.”

그 말은 꼭 암암리에 소문을 내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없는 사람들끼리는 상부상조해야지요. 내가 아는 처자들이 몇 명 있는데, 매혈하는데 조건이 왜 필요한지 물어봐 달랍니다. 궁금하다고.”

가비 같은 사람이 꽤 있었는지, 그도 아니면 미리부터 준비된 답변인 건지, 남자가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어느 부잣집 막둥이께서 지병을 앓고 계시오. 용하다는 약재를 수소문해도 소용이 없어 그 마을 영매에게 물었더니, 올해 스물이 된 건강한 처자의 피를 보약과 함께 섞어 먹으면 깨끗이 낫는다고 점괘를 내린 모양이오. 해서 우린 맡은 일을 하는 것뿐이고.”

“아, 예….”

“허니 주변에 조건이 부합하는 처자가 있으면 데려오시오. 소개 값으로 돈을 더 얹어줄 테니.”

설마, 그렇게까지 한다고?

가비가 황당한 표정을 숨기며 연화와 함께 그곳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장소를 벗어나자 연화가 주위를 살피며 다급히 물었다.

“은갑아, 너 팔 괜찮아?”

“어, 괜찮아. 그 할아버지 피 잘 뽑더라. 완전 전문가야.”

피를 뺀 자리가 아렸지만 가비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왜 그랬어. 내가 하면 되는데….”

연화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미안한 건 오히려 가비인데.

“연화 넌 예정에도 없던 일을 도운 거잖아. 그걸로 충분해. 너 아니었으면 들어가 보지도 못했을 거야.”

피를 뽑는 사람이 맹아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차라리 잘됐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연화 팔뚝이 아닌 제 팔뚝에 흠집을 내어 속은 편했다.

“근데 왜 하필 맹아일까? 피를 뽑을 수 있는 다른 사람도 많을 텐데.”

“보고 듣지 못해야 안전하니까.”

그 말에 연화가 가비를 돌아봤다.

“그럼 그 사람들의 목적이 매혈이 아니라는 거야? 그걸 숨기려고 일부러 맹아를 고용한 거고?”

“매혈이 목적이기도 하겠지만, 그 뒤에 뭔가 더 있는 것 같아. 매혈의 조건 이유도 본 목적을 감추기 위한 핑계 같고. 그다지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생각도 없어 보였어. 오히려 조건이 맞는 처자를 소개해 주면 돈까지 준다고 하고. 왠지 찜찜해.”

“흐음…….”

연화도 골몰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저녁이 오고 어스름이 깔렸다. 가비와 연화는 장터로 가서 아까 들렀던 노점상에서 머리 장식 세 개를 더 샀다.

가비가 머리 장식이 든 봉투와 매혈 값이 든 주머니까지 모두 연화에게 주었다.

“내가 매혈한 것도 아닌데 이것까지 날 주면 어떻게 해….”

“난 필요 없어. 그냥 너 써.”

“무슨 소리야. 네 건데.”

돈주머니를 들고 가비와 연화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가비의 고집에 못 이긴 연화가 돈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포기한 듯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우리 이 돈, 오정이 줄까? 순정이 데리고 나오는 날 맛있는 거 사주라고.”

“좋아. 그러자.”

그렇게 합의한 후, 사람들과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근데 연화야, 오늘 일은…….”

“걱정마. 비밀로 할게. 대신 뭔가 밝혀지면 꼭 말해주는 거다?”

“응. 그럴게.”

가비와 연화가 마주 보며 웃었다.

저 멀리,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 * *

그 후 별 탈 없는 며칠이 흘렀다. 다행히 현은 가비를 찾지 않았고, 오정은 제 월봉과 가비의 월봉까지 탈탈 털어서 남은 빚을 청산하고 순정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시험이 있는 날. 어의가 되면 시험에서 해방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매달 말일, 시험이 치러졌다. 가비는 약초에 대한 지식이 제2외국어를 습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꾸준히, 매일 반복해야 잊지 않고 제 걸로 저장할 수 있었다. 오늘 시험은 음양오행에 따른 사람의 체질과 그에 따라 자주 발생하는 병증에 대한 것이었다.

시험장을 나온 동기들의 표정은 뭔가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했다. 매달 쌓이는 시험 점수에 따라 선학으로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삼사 년이 걸린다고들 했다.

“은갑이 넌 왠지 일이 년 만에 선학으로 진급할 것 같아.”

오정이 부럽다는 듯이 가비를 바라봤다.

“어쨌든 겸복이도 제때 올라갈 테고…. 나 혼자 낙제해서 계속 후학으로 지내는 거 아닌가 몰라.”

사실 오정은 남들보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긴데, 결과는 항상 그에 못 미쳤다. 이번 어의 시험도 가비와 겸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합격한 거였다.

“설마 너 혼자 두고 우리만 진급하겠냐?”

겸복의 말에 가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조건 같이 가는 거야. 파이팅!”

가비가 주먹을 쥐며 외치자, 겸복과 오정도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고 ‘파이팅!’ 했다.

“야, 근데 요즘 이 말 다 쓰더라. 너도 나도 ‘파이팅!’ 한다니까?”

“하하. 그래?”

가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연화까지 넷이서만 썼는데 어느새 후학들 사이로 퍼진 모양이었다.

“참, 근데 연화가 안 보이네?”

“그러게. 시험장이 달라서 그런가?”

그렇다 해도 시험이 끝나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와 이래저래 수다를 떨 연화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시험을 끝낸 후학들 사이로 연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험 잘 못 봤나? 그래서 바로 명의당으로 가버렸나?”

“설마. 잘 봤든 못 봤든 와서 떠들었겠지.”

“하긴….”

다들 고개를 갸웃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오전에 시험을 끝냈으니 점심을 먹고부터는 업무지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식당에서도 연화는 볼 수 없었다.

밥을 먹고 여자 어의들이 머무는 명의당으로 가보자고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다 먹은 식기를 들고 누군가 지나갔다. 연화와 함께 다니던 여자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어, 저기…!”

가비가 다급히 일어나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돌아보며 알은 척을 했다. 여자 역시 연화가 친하게 지내는 가비와 무리를 잘 알고 있었다.

“연화랑 같이 안 왔어? 계속 안 보이던데.”

가비가 묻자, 여자의 안색이 대번 바뀌었다.

“몰랐어?”

여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화 어제 퇴궁했잖…아.”

“뭐?!”

겸복과 오정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비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퇴궁이라니?”

“어젯밤, 어의를 그만두고 퇴궁하겠다는 퇴직서를 썼대. 짐 정리까지 해서 나가버렸어. 우리도 아침에 알고 얼마나 당황했는데…. 너희도 들은 말이 없구나?”

순간 누군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것처럼 멍해졌다. 가비 뿐만이 아니었다. 겸복과 오정도 같은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가비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연화가 왜….”

가비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은갑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오정과 겸복의 외침이 들렸지만 가비는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연화가 퇴궁을 했다고?

어의직을 관두고?

한마디 말도 없이?

왜……?

그게 사실임을 증명해줄 사람은 그걸 승인한 태어의 밖에 없었다.

가비는 태어의 서문이 있는 내약방으로 달렸다.

직접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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