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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55화 (55/95)

[55화]

윤을 보내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소낙비가 쏟아졌다. 비는 삽시간에 두 사람을 적셨다.

가비가 손으로 머리 위를 가리며 사방을 둘러봤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때 반소가 가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리로.”

그대로 가비를 끌고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순식간에 빗소리가 아득해졌다.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는 좋은 피신처가 돼주었다.

가비가 젖은 얼굴로 키 높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똑. 똑.

나뭇잎 사이로 추락하는 물방울이 가비의 이마 위로, 뺨 위로 떨어졌다. 속눈썹 위로 톡 떨어진 물방울을 훔치며 얼굴을 바로 하는데, 반소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무 아래로 들어올 때부터 가비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시선이 아닌, 진득하고 지긋한 시선이었다. 꼭 가비가 자신을 돌아보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가비는 반소가 아직도 제 손을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손 좀…,”

“왜.”

“이제 놔도 되잖아.”

“그러니까 왜.”

당연한 걸 자꾸 왜라고 묻는 반소였다. 손을 빼내려고 꼼지락대던 가비가 동작을 멈추고 반소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지. 그저 칠흑처럼 검기만 하던 눈동자에 광채가 돌았다.

꼭 별을 품은 밤처럼 그랬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흑요석은 지금 이 순간 오직 가비만을 담고 있었다.

“친우끼리는 상관없지 않나?”

반소가 가비의 손을 다시 온전히 그러잡았다.

“손을 잡는 것 정도는.”

가비가 입술을 벙긋대다 정면을 응시했다.

여사친하고 남사친이 손을 잡는 경우는 없다.

성별 상관없이 친구들과 손을 잡고 다녔던 건 어릴 때가 유일했고.

그런데 지금 상황은 둘 다 성인이었고 표면상으로는 남자와 남자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이상한 거라고!

가비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반소를 팩 돌아봤지만, 반소는 절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 말이야, 이러다 오해받아.”

“그럴지도.”

대답이 더 기가 막혔다. 그렇다는 건 반소도 제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어?”

가비가 정색한 얼굴로 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가비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얽혔다.

깍지 손!

“말했잖아.”

반소가 정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만져보고 싶었다고.”

가비가 숨을 멈춘 채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불현듯 잊고 있었던 주막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사건이 아니었다면 분명 입을 맞출 분위기였다. 그랬다면…, 피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반소를 향해 뛰던 심장 소리와 얼굴을 간질이던 숨결이 싫지 않기 때문이었다.

“너도 이제 알지 않나?”

“…뭘?”

“내가 널 어여쁘게 생각한다는 걸.”

시선이 마주쳤다. 반소의 눈은 차분하고 진중했다.

“친우가 되고 싶다는 것 말고도 이런 감정이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네가 여인이든 사내든 상관없이 좋다는 거다. 이런 마음이 든 사람은 네가 유일무이하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가비의 놀란 동공이 흔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고백이었다.

덤덤해서 군더더기라곤 조금도 없는.

담백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실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여자인 은가비가 아니라 친우인 은갑이에게 하는 거란 걸 알기에 섣부른 착각은 금물이었다. 고백이란 게 꼭 그런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황무지 같았던 황폐한 반소의 마음에 제가 푸른 싹 하나는 틔워준 것 같아서.

그 싹이 무성하게 자라서 지금 이 나무 같아졌으면 좋겠다.

가비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어렸다. 소낙비가 지나간 하늘이 다시금 파랗게 개었다.

가비는 하릴없이 그 하늘을 보았고, 반소는 하릴없이 그런 가비를 보았다.

깍지 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 * *

그 후 무탈한 날들이 이어졌다. 가비와 동기들은 새로운 생활에 금방 익숙해졌다. 남들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함께 차를 마시고 아침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날씨는 완연한 봄으로 절정을 이루었고, 태황궁은 눈 돌리는 곳마다 오색빛깔의 아름다운 봄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참,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오늘도 역시나 새로운 소식은 오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요새 마을마다 매혈꾼들이 돌아다닌다잖아.”

“매혈꾼?”

가비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응. 피를 사고파는 사람들.”

“피를 사서 어디다 파는데?”

가비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이쪽 세계가 저쪽 세계처럼 헌혈과 수혈이 흔한 일도 아니고. 대체 피는 왜 사서 어디로 판다는 걸까.

파는 쪽은 돈 때문이겠지만 사는 쪽의 목적이 궁금했다.

“왜 있잖아. 옛날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 같은 거.”

“민간요법?”

“원인 모를 병증에 시달릴 때는 좋은 약재에다 건강한 사람들의 피를 섞어 마시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가비가 놀란 입을 떡 벌렸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아무튼 어느 부잣집의 막둥이라나 뭐라나. 몸이 하도 허해서 매혈꾼들을 고용한 모양이야. 그 사람들이 마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피를 사나 봐.”

하긴. 저쪽 세계에서도 한참 못살던 시절 매혈을 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민간요법이란 건 좀 충격적이었다. 오히려 다른 병증이나 부작용을 일으킬 것 같은데.

아니면 태황국엔 그런 게 가능한 치료법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 있다면 수업시간에 안 배웠을 리가 없었다.

“근데 오정이 넌 누구한테서 그런 얘길 들은 거야?”

연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휴가일 때 나가서 들은 거야?”

그러자 오정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정이.”

“순정이? 아, 맞다! 어제 네 여동생 면회 왔었지? 그럼 순정이가 말해준 거야?”

끄덕.

오정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순정이는 그걸 어떻게 들었대? 보통 매혈은 집안에 병자가 있는 걸 알리는 거라 쉬쉬하는 경우가 많은데.”

“에휴…….”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오정을 보며 모두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짐작이 맞다는 듯 오정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순정이가 일하는 마을에도 매혈꾼들이 찾아왔대. 매혈하려고 가봤더니 조건이 안 된다고 돌려보내더래.”

“조건?”

“올해 성년이 된 건강한 여인들의 피만 산다고 그랬대. 순정인 아직 열다섯 밖에 안 됐으니까.”

오정이 뒷머리를 벅벅 긁어 올렸다.

“내가 참 못났다. 어린 여동생 매혈이나 알아보게 하고…. 어의 시험에 진즉 붙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남은 빚 얼른 털고 우리 순정이 벌써 데리고 나왔을 거야.”

오정이 자책하며 애써 웃었다. 어린 여동생이 매혈을 알아봤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 아픈 모양이었다.

“빚이 얼마나 남았는데.”

가비가 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한참 남았어?”

“아니. 이제 다 갚아가. 이번 달하고 다음 달 월봉까지 죄다 때려 넣으면 될 것 같아.”

“그럼 이번 달 내 월봉 가져가. 빌려줄게.”

“뭐?”

가비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난 급한 거 없으니까 빌려 가.”

“너, 넌 어쩌고. 너도 집 챙겨야 하잖아. 동생들도 있는데…….”

“상황 안 되면 나도 못 해주지. 근데 되니까 빌려 가라고 하는 거고. 그냥 이번 달에 해결해서 순정이 빨리 데리고 나와.”

일자리에 숙식까지, 어의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는 마당에 당장 돈이 급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냥 준다고 할 순 없으니까.

“열두 달 할부로 해줄게. 이자는…, 일단 생각해보고.”

“은갑아….”

오정이 눈물을 글썽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비가 조심스레 의자를 빼며 일어났다.

“말하는데, 나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해. 알지?”

“알아, 아는데…….”

오정이 어린애처럼 가비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

“…은갑아!”

“야악!”

놀란 가비가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그 뒤를 오정이 쫓았다.

“은갑아아-!”

“오지마아!”

달아나는 가비와 쫓아가는 오정을, 연화와 겸복이 턱을 괸 채 바라봤다.

정말이지 어의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썩 보기 나쁜 그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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