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56화 (56/95)

[56화]

“매혈꾼?”

반소의 물음에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과가 끝난 늦은 저녁. 가비가 아침에 오정에게 들었던 얘기를 반소에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는 걸 틈타, 어둑한 천족의 서고에 들어와 있었다.

“너도 들어본 적 있어? 오정이 말로는 민간요법이라는데…. 위험한 거 아니야?”

잠자코 있던 반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간요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존했던 일이야.”

“실존했던 일이라고?”

가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소를 돌아봤다.

“그럼 그 방법이 진짜 효과가 있다는 거야?”

“누구나 다 되는 건 아니고.”

“그럼?”

“불로초로 태어난 사람. 그러니까 인간 불로초의 피만이 가능한 일이야.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와전되어 잘못된 민간요법으로 전해져 오는 거고.”

“불로초로 태어난 사람….”

반소의 말을 곱씹던 가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람이 불로초로 태어난다고?”

정말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쪽 세계에서도 불로초는 영생을 준다는 신비의 약초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실재하는 약초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게 이쪽에도 있다니. 그것도 식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태비의 별점으론, 그 불로초가 나타났다고 해.”

천족과 측근만이 알고 있는 극비인지라, 반소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다만 기록서에 전설처럼 남겨진 일화였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천태비는 불로초가 천자의 병증을 고쳐주고 태황국을 태평성대로 이끌 거라 예언했어. 그렇게 믿고 있고.”

반소가 가비와 눈을 맞췄다.

“천자의 정해진 반려자지. 천자비가 될 사람.”

그래서구나. 천자가 아직 혼자인 이유.

“어쨌든 지금 이 시기에 매혈꾼이라….”

반소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네 말처럼 그건 위험하다. 병이 낫는 게 아니라 오히려 키운 사례가 많아서 사라진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그래? 근데 오정이 말로는 조건이 있다고 했대. 올해 성년이 된 여인들의 피만 매혈한다고.”

매혈하는데 ‘건강’을 제외한 다른 조건이 붙는다는 건 반소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뭔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거지?”

낌새를 읽은 가비가 물었다.

“이 일이 혹시 이번 귀물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어쩌면.”

“상황은 어때? 그때 이후로 잠잠한 거야?”

반소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 서문님을 따라서 궁 밖으로 나갈 거야. 수도에 있는 약초방들을 감찰하러. 그때 들리는 게 있으면 알아보고 올게.”

모쪼록 소문이란 건 사람들 사이에서 제일 많이, 정확하게 퍼지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귀물경비대는 외모부터가 접근 불가였다.

팔척장신에 우람한 덩치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가만히만 있어도 어딘가 화가나 보이는 곤을 생각하니 답이 없었다. 백날 평복을 입고 암행한다고 해도 별 소득이 없을 듯했다.

그럴 바엔 가비가 사람들과 섞여서 이야기를 듣는 게 빨랐다.

“넌 나서지 마라.”

반소가 반대했다.

“이건 우리 일이고 네가 엮이는 건 좋지 않아.”

걱정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알긴 알지만…….

“막상 보니까 화가 나. 힘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는 게.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 건지. 대체 어떤 놈인지. 정체가 궁금해.”

가비가 입술을 꾹 다물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안 보는 건가?”

반소가 가비의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약초도감 말이야.”

반소의 말처럼 가비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약초도감이 아니라 귀물에 관련된 기록서였다.

가비가 책장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당분간은. 놈을 잡을 때까지만.”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이 깊어졌다.

가지 않겠다고, 여기서 살겠다고.

원하는 답은 듣지 못했지만, 가비가 이곳에 있는 시간을 늘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방법을 평생 못 찾을 수도 있고.

아니, 찾게 된다면.

그걸 먼저 찾아 평생 알려주지 않아도 되고.

반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드는 제 생각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보내고 싶지 않아.

어디로도.

반소가 책장을 만지작거리는 가비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은 금세 손가락 사이로 얽혀 깍지를 끼웠다.

“너 자꾸……,”

가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럴래?”

그날 이후 반소는 걸핏하면 가비의 손을 잡았다. 옴짝달싹 못 하게 깍지를 끼웠다.

자꾸 봐주면 안 되겠단 생각에 억지로 손을 잡아 뺐다. 그러자 웬일인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안심하기도 전, 반소가 가비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그럼 입술은.”

“뭐?”

가비가 깜짝 놀라 눈을 들었다.

“……!”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소의 눈이 천천히, 가비의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입술 쪽으로 떨어졌다.

“손을 잡는 게 싫으면 입을 맞춰보고 싶은데.”

“미, 미쳤…!”

순간 입술 위로 반소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비의 두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너, 너 지금…,”

다시 입술이 닿았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머물다가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

“그럴지도.”

반소는 너무도 태연히 자신이 미쳤다는 걸 인정했다. 마치 제 감정에 쓸데없는 생각은 덧붙이지 않겠다는 듯이. 그저 느끼는 대로 표현하고 행동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가비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입술이 닿은 게 싫어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설마 남자 좋아해?”

“그런 넌. 넌 누굴 좋아하는데.”

반소가 입술을 가린 가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등으로 문지른 입술이 붉어져 있었다.

“말했듯이 난 네가 여인이든 사내든 상관없다. 너라는 사람 자체가 내게 특별한 거니까.”

“…….”

“그런 넌 사내라서 여인을 좋아하나? 그래?”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반소의 눈빛이 속을 꿰뚫는 것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마치 뭔가를 짐작이라도 한 사람처럼.

“다, 당연한 거 아니야?”

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꾸 선 넘지 마. 불편하니까. 분명히 말하는데 난 그런 쪽으로는 관심 없어!”

“나도 없어, 관심.”

설마 내가 비역질을 하는 사내일까.

반소가 가비를 따라서 일어났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너다.”

남자 여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너라서 내 몸과 마음이 동하는 것이고, 그걸 알았기 때문에 마다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감정에서 회피하거나 달아나는 방법 따위 몰랐다. 뒤늦게 그런 걸 배우기엔 가비를 향한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연습 없이 일어났다.

거부해봤자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그보다 더한 감정이 온다 해도 딱히 피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소용없을 거란 걸 알아버렸기에.

“솔직한 말로 더한 것도 하고 싶다.”

어디까지 가는지, 갈 수 있는지, 자신을 날것 그대로 풀어놔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안 해. 고작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정도…,”

“그런 것도 하지 마!”

가비가 발끈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나한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곳에 남을지 말지, 반소를 향해 뛰는 제 심장도.

뭐하나 정리되지도, 정의 내리지도 못 했는데.

친우로서가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마음을 열어버리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제발…….

반소에게 등을 돌린 가비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침묵이 이어졌고, 가비는 그 침묵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겼어야 했는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버렸다. 마치 반소를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사람처럼. 그건 곧 그를 너무도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자신 없지만 바란다면.”

잠자코 있던 반소가 나지막이 답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참아볼게.”

“참으라는 게 아니라 그냥 하지…,”

돌아서는 가비의 손을 반소가 다시 잡았다.

“야…!”

“여긴 미로고 길을 잃을지도 모르잖아.”

손을 잡기 위한 핑계치고는 너무 뻔뻔하고 뻔했다.

반소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끌려오는 가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묵묵히 서고를 빠져나갔다.

이내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엔 깊은 어둠과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서고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양궁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기둥 뒤.

그곳에 현이 서 있었다. 가비와 반소를 목격한 뒤로 늘 이곳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담이라도 나누듯 하고 있었다. 헌데 오늘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춰?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현의 눈에 그건 반소의 일방적인 행위로 보였다. 가비가 거부하는 듯 보였으니까.

형님이 확실히 미쳤군.

오히려 다행인가,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렇다 해도 제가 원하는 걸 뺏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현의 입술이 비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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