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54화 (54/95)

[54화]

“이건……,”

“그래. 그 아이가 신고 있던 신발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집이 이런 물건을 살 돈이 어디 있느냐. 하물며 축사를 청소하러 가는데 이런 신을 신고 가?”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듯 경비대장이 코웃음을 쳤다.

가비가 입술을 달싹이며 눈앞에 있는 신발을 봤다. 분명 자신이 윤에게 사준 신발이었다.

이게 왜…….

가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날 선 눈으로 앞에 앉은 경비대장을 노려보았다.

“이게 왜 여기 있습니까?”

의궁으로의 복귀 때문에 가볼 수 없었지만, 듣기로는 분명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반소가 그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덕분에 태황국의 장례 방식대로 모든 유품을 화장하며 태황산에 뿌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면 이 신발도 윤과 함께 가야 했을 텐데 어째서.

‘흠흠’ 경비대장이 괜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경비대에겐 큰 상이 내릴 것이다. 네가 야왕님과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내 들어 알고 있으나, 너도 생각을 잘해야 할 것이야. 뭐가 네게 이득이 될지.”

나지막이 속삭이던 경비대장이, 이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내리뜬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게다가 천자님과 태어의까지 널 아끼신다 들었는데. 그럼 이번 일로 노선을 확실히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인즉, 귀물경비대는 다른 경비대와 차별이 있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반인반귀가 모인 집단. 제아무리 높은 공을 세워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가비는 경비대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다만……,

“설마 이 신발, 빼돌린 겁니까?”

가비가 물었다.

“아니면 이걸 왜 경비대장님이 갖고 계신 겁니까?”

“어허, 빼돌리다니!”

경비대장이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유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져온 물건이다. 빼돌린 것이 아니라 수사에 필요해서 가져온…….”

“양해를 구했다고요?”

가비가 기가 찬 얼굴로 경비대장을 바라봤다. 윤의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라서였다.

‘가는 길에 좋은 신이라도 신고 갈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이에요…. 신발 한 켤레도 제때 사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는데…. 덕분에 해진 신이 아니라 새 신을 신겨서 보낼 수 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 신을 어머니께 보이며 자랑을 했다고 했다.

축사에 갈 때도 봇짐에 고이 넣어 갔다고. 그렇게 일을 끝내고 나서야 낡은 신을 버리고 꺼내 신었을 새 신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신발의 밑창은 깨끗했다. 이것만 봐도 축사를 청소하는데 신고 간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텐데.

공을 세우는데 눈이 먼 경비대장은 윤을 귀물과 사통이나 하는 몹쓸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하- 뭐 이런 개 같은.”

가비가 고개를 떨구며 읊조렸다.

“너 지금 뭐라 하였느냐?”

“아무리 부귀공명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이건 뭐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네 이놈! 너 지금 누구에게…!”

“죽은 자를 모독하는 것도 명예 훼손입니다. 아세요?”

가비가 말을 자르며 두 눈을 치떴다.

“하물며 피해자를…. 그것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귀물과 사통한 사람으로 내몰다니요. 이게 한 나라의 경비대장이 할 일입니까?”

이쯤 되니 사람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천자 현의 자질까지 의심됐다. 모든 인사 권리도 천자인 현에게 있다고 하였으니.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놈이 어디서! 이제 갓 어의가 된 놈이 누굴 가르치려는 게야!”

경비대장이 호통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뿐입니까?”

가비도 지지 않고 따라서 일어났다.

“반인반귀까지 싸잡아 욕하셨습니다. 거기에 야왕 반소님도 포함인 거 알고 계시죠?”

“뭐, 뭐야!”

“그러니까 경비대장께서는, 지금 불경죄를 저지르셨다고요!”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릴…!”

“사건에 대해서는 더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이 신발은 제가 윤에게 사준 거니까 가져가겠습니다.”

“그거 놓지 못해!”

경비대장이 가비를 향해 달려들 때였다.

“…어억!”

가비의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경비대장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억센 힘에 중심을 잃은 경비대장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반소가 가비를 등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섰다.

“바, 반소님!”

경비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여,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듣자 하니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아, 아닙니다! 그건 저놈…, 아니 은 어의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한 말입니다!”

깜짝 놀란 경비대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누구 말을 믿을 것 같으냐. 음궁 어의가 된 은 어의 말이냐, 늙은 너구리 같은 네 놈 말이냐.”

“바, 반소님! 정말 아닙니다! 제가 감히 반소님을 욕보이다니요!”

“그렇지. 설마. 이번에도 불경죄를 저지른다면 똥통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네 놈이 제정신이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

경비대장이 넙죽 무릎을 꿇었다.

“믿어주십시오! 정말 아닙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번은 그냥 넘어 가주마. 대신 네가 훔친 신발은 가져갈 테니 찾지 마라.”

반소가 가비의 데리고 접견실을 나갔다.

“…이잇!”

바닥에 엎드린 경비대장이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반소에게 대들 용기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 * *

야포청을 벗어난 반소가 가비의 손을 잡고 음궁으로 향했다. 그러다 끌려오듯 따라오는 가비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

가비가 숨을 몰아쉬며 윤의 신발을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꾹 다문 입술과 가라앉은 갈색 눈이 분노와 슬픔으로 일렁였다.

“너무해…. 어떻게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매도해?”

동기들로 인해 간신히 다잡았던 마음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다시금 흔들렸다.

“사람이 죽었잖아.”

가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피해자가 셋이나 있는데…. 다 어린 소년들인데…,”

차마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비대장 앞에서는 서슬 퍼런 눈으로 쏘아붙였지만, 막상 그 자리를 벗어나니 애통함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신발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참는 가비의 마른 어깨를, 반소가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조금 늦었지만 보내주자.”

반소가 말했다.

“네가 사준 신발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가비가 끝내 눈물을 떨궜다. 고작 두어 번 만난 소년의 죽음이 가비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그건 만난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윤이 제게 보여준 진심 때문이었다.

그 진심에 가비도 진심으로 답한 것. 그것이 둘의 인연을 여물게 했다. 허나 여물자마자 잘라야 했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끝이 났으므로.

그 길로 산에 올랐다. 반소를 따라 험준한 산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가비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체력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금세 숨이 차올랐다. 그래도 높은 곳에서 보내주고픈 욕심 때문에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이쯤이면 될 것 같은데.”

가비와 달리 반소는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절벽 부근에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위로 반소가 훌쩍 뛰어올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가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비가 그 손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휘오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휘청, 흔들렸다. 그 몸을 반소가 붙들었다.

“발끝에 힘을 줘.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비가 올 것 같았다. 산에서 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흐렸다.

“햇빛이 쨍쨍했으면 좋았을 텐데.”

“바람이 불어야 하늘까지 닿지.”

“그런가?”

그저 위로해주기 위해 하는 말인 걸 알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소에게 고마웠다.

“참! 불붙일 걸 안 가져왔는데 어쩌지?”

가비가 아차한 얼굴로 묻자 반소가 품에 있던 수리검을 꺼냈다. 그것으로 검지 끝을 긁자 피가 배어 나왔다. 행동에 이유를 묻기도 전, 피가 배어난 곳에서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주술력….”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반소가 눈을 맞췄다.

“상승한 이유는 나도 몰라. 제어가 잘 되니 그나마 다행이고.”

마치 원래부터 제게 있었던 능력처럼 금세 통제가 가능해졌다.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 거 아냐?”

가비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현의 측근들을 말하는 거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액운을 부르는 존재가 주술력까지 갖고 있다니. 결코 환영받을 일이 아니었다.

“이미 한번 들켰어. 흑주술을 부리다가.”

“그럼…,”

“주시하겠지. 이 능력이 단발성인지 아닌지.”

단발성이라 해도 위력이 천자를 넘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비가 심각해진 얼굴로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눈앞으로 불꽃이 어른거렸다. 반소가 주술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가비가 들고 있는 신발을 내밀었다. 반소의 손끝에서 옮겨붙은 불이 신발을 태웠다.

마침내 모두 타기 직전, 남은 잔해를 가비가 허공으로 던졌다.

파스스스-

예뻤던 새 신은 재가 되어 바람에 멀리 날아갔다.

“…잘가, 윤아.”

눈에는 눈물이 그렁했지만, 입가엔 미소가 어렸다.

비로소 윤을 완전히 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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