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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53화 (53/95)

[53화]

휴가일이 지난 태황궁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비단 태황궁 뿐만이 아니었다. 수도 전체가 귀물 사건으로 인해 뒤숭숭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그때 일을 떠들곤 했다.

“세상에, 한꺼번에 셋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도 살가죽을 홀라당 벗겨갔다잖아.”

“어휴, 끔찍해라.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귀물이 다 있어!”

해괴망측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번 일로 심증은 확증에 가까워졌다.

놈은 먹잇감으로 사람을 노리는 게 아니라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다.

게다가 경비대의 수도 정찰이 늘었는데도 일을 벌일 정도라면…….

이건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일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뜻이었다.

의궁으로 복귀한 가비는 쉽게 마음을 잡지 못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윤의 웃는 모습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번갈아 머릿속을 떠다녔다.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을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숨을 쉴 수 없었다.

가비는 의궁으로 복귀하기 전 만났던 윤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고맙습니다…. 우리 윤이가 좋은 형님이 생겼다고 좋아했어요. 우리 윤이한테 잘 해주셔서…,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벌게진 얼굴로 말을 토하던 눈빛이 선연했다. 윤과 꼭 닮은 눈이었다.

“…갑아. 은갑아!”

누군가의 부름에 가비가 퍼뜩 정신 차렸다. 오정과 겸복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안 가? 시간 다 됐는데.”

“아….”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어의로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다.

일할 준비를 마친 어의들이 명의당 마당에 줄을 맞춰 섰다.

선학들이 나와 그런 후학들의 옷매무새를 꼼꼼히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갈한 것이 기본이었다.

“혹여 일하다가 문제가 생기거나 조언이 필요한 경우, 담당 선학들에게 필히 묻고 보고하십시오. 사안이 크다면 선학들이 직접 태어의님께 보고할 것이니.”

“예!”

후학들이 차분한 어조로 힘 있게 대답했다.

진시(辰時:07~09시). 선학들에게 주의 사항을 들은 후학들이 각자의 업무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명의당의 정문 앞에서 가비와 오정, 그리고 겸복과 연화가 인사를 나눴다.

“저녁에 일 끝나면 다과방에 모여서 차 한 잔 마시는 거 어때?”

연화의 물음에 오정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안될 것 같아. 정리해야 할 업무 일지가 많다고 들었거든.”

“그래? 겸복이 넌?”

“나도 힘들 것 같아. 업무 첫날부터 당직이라.”

“어머, 그럼 약제실에서 숙직해야 하는 거야?”

“응.”

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가비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은갑아, 너는?”

“어?”

가비가 흠칫하며 세 사람을 돌아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얼굴로 걱정이 어렸다.

“너 괜찮아?”

오정이 조심스럽게 가비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평소의 가비가 아니었다. 어딘가 얼이 빠져 보였다. 하긴. 끔찍한 사고 현장을 목격했으니 오죽할까.

게다가 피해자 중 한 명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니 그 충격이 매우 클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태어의님께 며칠 더 쉰다고 얘기 해보는 게 어때?”

“미안.”

“뭐가?”

“그냥. 너희들까지 신경 쓰게 해서.”

가비가 기운 없이 웃었다. 그런 가비를 보며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관련된 일을 함부로 물을 수도, 떠들 수도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는 것. 그게 가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겸복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난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엿을 먹거든.”

겸복이 쌀엿이 담긴 작은 봉투를 가비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맞았을 때도 먹고, 열심히 일했는데 품삯을 못 받았을 때도 먹고. 작정하고 큰 거 하나 사뒀다가 일 생겼을 때마다 조금씩 잘라 먹고 그랬어.”

그건 겸복이 본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위로였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엿이나 먹고 정신 차리라고.”

멍하니 두 눈을 껌뻑이던 가비가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풋.”

엿이나 먹으라는 그 말이 다른 쪽으로 웃기게 해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을 알 길 없는 겸복과 오정, 그리고 연화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가비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하하! 입을 벌려 웃던 가비가 간신히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무슨 일이 생겨도 웃기면 웃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잊고 있었지만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할아버지가 곁을 떠났을 때도.

한동안은 슬프고 멍했지만 결국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도 잤다. 그러다 지금처럼 웃음이 터지면 웃고, 울음이 나면 울고.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갔다. 그리움으로부터 한걸음 씩 멀어지는 걸 배우고 연습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가비의 손에 쥐어진 엿은 이 순간 적지 않게 위로가 됐다.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동기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래. 엿이나 먹고 정신 좀 차려야겠다.”

가비가 엿 하나를 입에 넣어 딱,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방금보다 다소 밝아진 가비를 보며 세 사람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들 첫날인데 파이팅!”

가비가 주먹을 들어 보이자 다들 ‘파이팅?’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힘내라고!”

“어! 파이팅!”

“그래, 파이팅!”

다들 가비를 따라 무작정 ‘파이팅’을 외쳤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가비가 마음을 다잡으며 음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겸복의 말대로 엿이 효험이 있었는지, 침울했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전환됐다.

반소도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 귀물 놈에 대해.

단순히 식욕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놈이 아니야.

벗겨간 살가죽을…, 대체 어디다 쓰는 걸까.

그래. 분명 먹는 게 아니라 쓰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일관되게 그것만 벗겨갈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 정도의 목적성과 판단 능력이 있는 놈이라면 반소의 말처럼 인간만큼의 지능을 갖고 있을 텐데 물욕은 전혀 없어.

축사에 있던 동물들과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던 품삯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점이 더욱 수상했다.

생각이 깊어지는 동안 음궁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비의 담당 선학은 음궁의 주치의인 봉 어의였다.

빨리 가서 인사부터 드리고 업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조금 늦었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두르는데,

“거기 서시오!”

뒤쪽에서 가비를 향한 외침이 들렸다. 가비가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피갑을 걸친 경비대가 다가왔다.

“은 어의가 맞소?”

“맞는데요.”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소.”

“어딜 말입니까?”

가비가 피갑 한쪽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야경대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경비대장께서 몇 가지 물을 것이 있다고 하시니 협조해 주셔야겠소.”

“전 지금 업무지로 가서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데요.”

“그건 봉 어의에게 양해를 구해놓은 참이오.”

그렇다니.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했다. 가비가 순순히 야경대를 따라 야포청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있던 곤이 발견했다.

“저거 망아지 아냐?”

곤이 가리킨 곳을 풍이 돌아봤다. 분명 가비였다.

풍이 가는 눈을 떴다.

“이번 일로 야경대에서 호출했나 보군.”

“하긴. 피해자 중 한 명이 저 녀석하고 친분이 있다고 했으니.”

“야경대뿐이겠나. 주경대에서도 부를걸?”

풍이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들들 볶겠지.”

주경대도 야경대도 호시탐탐, 귀물경비대를 누르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건수를 올려 천자에게 잘 보이려는 게 틀림없었다.

“뭐야. 그럼 반소님께 알려야 하는 거 아냐?”

곤이 금세 흥분했다.

“이제 저 녀석은 우리 소속이잖아! 헌데 감히 허락도 없이 끌고 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틀렸다. 가비의 소속은 음궁이 아니라 의궁이었고 관리자는 반소가 아니라 봉 어의였다. 하지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풍은 얼마 전 반소에게 들었던 명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태황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내게 보고하라.’

일 년 중 절반만 궁에 있는 반소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수장인 반소가 관심이 없으니 귀물경비대 역시 무관심했고.

헌데 그런 그가 태황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하라 일렀다.

아마도 어의 시험날 가비에게 있었던 소동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 계기인 듯했다.

그만큼 저 아이를 귀히 여기신다는 거겠지.

그건 귀물경비대를 챙기는 마음과는 분명 다르게 느껴졌다. 아우나 친우 같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체…….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건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머리를 털어낸 풍이 곤을 향해 눈짓했다.

“가자. 반소님께 알려야겠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곤이 서둘러 풍의 뒤를 따랐다.

* * *

경비대를 따라간 가비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번에는 주포청. 이번에는 야포청.

의궁에서 포청을 이렇게 밥 먹듯이 드나드는 사람은 제가 유일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포청하고 인연이 있는 거지.

긴장감은 조금도 없는, 심드렁한 얼굴로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은 서늘하고 삭막했다. 아마도 접견실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비가 예의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묵례를 전했다.

“앉거라.”

야경대의 경비대장은 말투에서부터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물을 것이 있으시다고요.”

“그래. 너와 친분이 있는 아이가 이번 사건의 피해자라고 들었다.”

“예.”

“평소 그 아이에게서 특이점 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느냐.”

“특이점이라니요?”

“이를테면 귀물과 사통을 한 것 같다든지…….”

“사통이요?”

가비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다. 간혹가다 귀물과 정을 통하는 인간들이 있거든. 홀린 자는 대가를 받고 사람들을 먹잇감으로 유인해주기도 한다.”

이는 드물긴 하지만 기록서에도 분명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녀로서 정이 통하면 교미하여 새끼까지 낳지. 그 증거가 바로 반인반귀들이고.”

얘기를 듣던 가비가 이를 꾹 물었다. 야경대의 경비대장은 실마리조차 찾기 힘든 이 사건의 원흉을, 귀물과 사통하는 인간에게서 찾는 듯했다.

허나 이건 터무니없는 억측이며 윤과 반소를 모두 모욕하는 언사였다.

“증거 있습니까?”

“뭐라?”

“말씀대로 윤이 사통했다면 죽지 않고 살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모르는 소리.”

경비대장이 일축하며 비소를 날렸다.

“미끼는 미끼일 뿐이다. 사용 가치가 끝나면 먹잇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것도 모르고 귀물과 사통한 자가 어리석은 게지. 허니 의심 갈만한 게 있거나 들은 바가 있다면 죄다 말해 보거라. 수사에 큰 도움이 될 테니.”

“없습니다.”

가비가 즉답했다.

“아는 바도 없을뿐더러 의심 가는 것도 없습니다.”

입술을 깨문 가비가 두 손을 주먹 쥐었다. 경비대장의 억설에 화가 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그 말이 없는 자에게 누명까지 뒤집어씌우다니.

경비대장은 윤을 귀물의 끄나풀로 추정하고 단정 짓는 듯했다.

“윤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가비가 억울한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 아이가…, 아직 어린 그 아이가 대체 뭘 안다고 사람들을 먹잇감으로 유인하고 대가를 받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그 말에 픽, 입꼬리를 올린 경비대장이 뒤에 있는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툭.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 가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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