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천자의 병증이 도통 나을 생각이 없다는 걸 전해 들은 천태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양궁을 찾았다. 살갗이 타는 듯한 고통을 몇 날 며칠을 앓고 있으니 얼마나 아플꼬.
제 아들이 너무도 안쓰러운 천태비는 제가 먹어야 할 혈담초까지 양보했다.
그날 저녁.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현은 석반조차 먹지 않으려 했다.
“안 돼요. 천자. 한술이라도 떠요, 제발.”
천태비의 간청이 아니었다면.
제 어미의 젖은 눈을 외면할 수 없었던 현은 되직한 죽을 몇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천태비가 입가에 묻은 죽을 손수 닦아주었다.
“천자.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어쩌면 좋아요.”
“…….”
보통은 괜찮다며 천태비를 안심시킬 현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인내심의 끝자락을 달리는 것처럼, 자꾸만 현을 부추겼다.
터질 것처럼. 폭발할 것처럼.
현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현의 상태를 짐작한 듯 천태비가 물었다.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현이 입술을 꾹 다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손을 천태비의 작은 손이 감쌌다. 서늘한 감촉이 현의 손등을 가만가만 다독였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그제야 현이 피가 나도록 베어 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숨통이 막힙니다.”
“어째서요?”
“모든 게 절 옥죄는 기분이에요.”
“무엇이 천자를 그리 갑갑하게 만드나요? 이 하늘 아래 천자의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현이 흘깃, 텅 빈 침대 맡을 바라봤다.
“하찮은 인형 하나도 제 맘대로 놓을 수 없고, 말단 어의조차 제 맘대로 둘 수 없지 않습니까. 하물며 병증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니”
사람은 누구나 하나를 가지면 둘 셋을 더 가지길 원하고, 욕망을 이루었으면 더 큰 욕망을 이루길 바라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천자는 진정 사람이었다. 천태비는 그 사실이 몹시도 기꺼웠다. 사랑스러웠고.
“틀렸어요, 천자.”
천태비가 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말 그대로 하찮은 인형은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천자 곁에 놓을 수 없고, 말단 어의는 말단이기 때문에 천자의 사람으로 둘 수 없는 거랍니다.”
천태비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늘 아래 천자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적어도 천자가 소유하는 건 최상급이어야만 해요. 사람도 물건도. 허나 사람이기에 때론 새로운 게 필요한 법이지요. 지금의 천자처럼요.”
천태비가 약속하듯 말했다.
“침상 맡에 있던 인형이 다시 갖고 싶어요? 걱정 말아요. 어미가 찾아 줄 테니.”
“허나 그건 이미…….”
“버려졌든 뜯겨서 망가졌든, 천자가 갖고 싶다면 이 어미는 꼭 찾아내요. 믿죠?”
천태비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어든 찾아내어 대령하게 하는 게 천태비였다. 세상천지가 뒤집힌다 해도 어머니인 천태비만은 현의 편이었다.
“인형은 어미가 찾아내서 정화수로 정화한 뒤 천자에게 줄게요. 천자가 바라는 어의는…, 그 또한 어미가 태어의 서문과 따로 얘기해 볼게요. 말단이어도 그 속이 천자에게 어울릴 만큼 값어치가 있다면 그는 분명 천자의 사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테니.”
무조건 부정을 탄다며 자신의 뜻을 가로막는 장곡이나 서문과 달리, 천태비는 매우 진중하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현을 달래었다.
그에 현의 엉켜 있던 마음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좀, 심기가 편해졌나요?”
“어머니 덕분에요.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어머니뿐입니다.”
“당연한걸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의 마음을 어미가 어찌 모를 수 있나요. 그리고 병증의 고통은…, 조금만 참아요. 천자. 천자비가 될 불로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으니.”
한결 누그러진 현의 얼굴을 본 천태비가 장곡을 향해 말했다.
“탕약을 들이세요.”
침소 한쪽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장곡이 의궁으로 기별을 넣었다.
잠시 후. 태어의 서문이 탕약을 들고 침소로 들었다. 현과 천태비에게 공손히 예를 갖춘 뒤 탕약이 든 쟁반을 현 앞으로 내밀었다.
피처럼 검붉은 액체를 보며 현이 천태비를 돌아봤다.
“이 귀한 혈담초를 제가 마시면….”
“개의치 말아요. 다행히 약초꾼들이 혈담초를 찾아내어 의궁으로 보내주었답니다. 해서 어미도 이렇게 기력이 좋아졌고요. 그렇죠, 서문?”
“예, 천자님. 천태비님의 말씀대로 며칠 전 수소문하였던 혈담초가 넉넉히 들어왔습니다. 약초꾼이 절벽 끝에 다발로 나 있는 걸 천운으로 발견했다더군요. 허니 지금은 부디 천자님의 건강만 생각하시지요.”
그제야 현이 탕약 그릇을 들었다. 그리곤 점성이 강한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밖에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양궁 침소에 얼씬도 말라고 명 하였는데.
그걸 어기고 찾아온 것은 필시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장곡이 발소리를 죽이며 나갔고, 만약을 위해 현은 서둘러 협탁 위에 놓아둔 가면을 썼다.
얼마 후 조심스레 들어오는 장곡을 보며 현이 다시 가면을 벗었다. 얼룩으로 덮인 눈을 치뜨며 장곡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장곡이 어두운 낯빛으로 들었던 바를 고했다.
수도의 어느 마을에 귀물이 출몰했고, 어린 소년이 셋이나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현재 귀물경비대가 현장을 조사 중이며 그 현장에는…….
천태비와 서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곡은 현에게 가비에 대한 것도 털어놓았다. 어차피 현이 아끼는 말단 어의가 누군지, 천태비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 그 아이도 현장에 있었다니. 끔찍한 광경을 봤겠구나.”
현이 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형님과 있으면 그런 꼴을 보기 십상이지.”
하필이면 휴가일에, 하필이면 사고가 난 마을에 있었다니.
이는 우연이 아니었다. 둘이 함께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태황궁이 아니라 밖에서도 따로 만나는군.
그런 생각이 들자 속된 말로 배알이 꼴리는 것 같았다.
현의 머릿속으로 서고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가비와 반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을을 나란히 걸어 다니며 웃는 모습도.
현의 금빛 눈동자로 투기심이 일렁였다.
허나 이제는 알았겠지.
반인반귀와 가까이 지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이 형인 반소를 왜 그리 꺼리는지. 멀리하는지.
현이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혈담초가 내 병증에 효과를 보이겠느냐.”
“예. 이 또한 완전하지 않지만, 약간의 효험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이제야 이 폭발할 것만 같은 감정이 어딜 향하는지 알았다.
불길한 존재이자 걸어 다니는 액운.
그런 주제에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만 같은 반소를 향한 것이었다.
천자인 자신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형님’ 대접을 해주는 것도 모르고. 허면 그저 감사해할 일이지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반소였다.
그뿐인가. 제가 가비를 각별히 아끼는 것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가깝게 지내며 과시를 하다니.
그거로도 모자라 감히, 반인반귀 주제에 감히, 저 못지않은 주술력까지 행사하는 반소였다.
이 태황궁에서, 아니 태황국을 통틀어도 그의 것은 없거늘.
모든 게 제 것이거늘.
그런 제 것을 하나씩 넘보는 것만 같은 반소를 신경 쓰고 불안해한다는 걸, 현은 지금에야 깨달았다.
“허면 주술력도 회복이 되겠느냐.”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 병증이 호전되면 자연히 주술력도 어느 정도는 회복될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이 그릇에 남은 탕약 한 방울까지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각 지방 도시 원들에게 혈담초를 계속 수소문하게 하고, 그걸 가져온 약초꾼과 원에겐 큰 상을 내린다고 전하여라. 또 서문은 아침마다 혈담초를 정성으로 달여 내게 가져오라.”
“예. 천자님.”
현이 약이 묻은 입가를 훔치며 명했다.
“석반을 다시 들이라.”
“예. 예, 천자님.”
장곡이 반색하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예민함이 극에 달했던 현의 태도가 병자의 기색을 버리고 호기롭게 바뀌었다.
천태비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래요, 천자. 천자는 하늘이 내린 태황국의 천족이에요. 누구도 천자를 대신할 수도, 넘볼 수도 없어요. 그것만 명심하면 됩니다.”
이내 준비된 석반을 현은 천천히 꼭꼭 씹어 넘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태비가 한시름 놓은 얼굴로 침소를 나섰다. 그 뒤를 서문과 장곡이 배웅했다.
걸음을 멈춘 천태비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참, 장곡. 그때 치운 인형은 잘 갖고 있나요?”
“예, 천태비님.”
“내일 내게 가져와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예를 갖춘 장곡이 침소로 돌아갔다.
장곡이 사라지자 천태비의 시선이 서문에게로 향했다.
“천자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그 아이…,”
“은갑이라 하옵니다.”
“그래요. 그 아이. 서문이 데려왔다던데.”
“예. 약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눈빛이 영특하여…,”
“나이는 약관에 집안 족보도 따로 없는 아이라죠?”
서문이 입을 다물고 천태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아이에게 무슨 매력이 있어서 천자도 야왕도 곁에 못 두어 안달일까요?”
역시나. 천태비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몸이 약한 탓에 천태비궁을 잘 나서지 않을 뿐, 태황궁에 뿌려놓은 눈과 귀를 통해 앉은 자리에서 웬만한 소식은 다 듣고 있었다.
“그저 영리하고 성격이 활달할 뿐입니다. 아직 양궁의 어의로 들이기엔 부족함이 많으며 천자님의 곁에 두기에도 모자람이 큰 아이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다….”
천태비가 조용히 서문의 말을 곱씹었다.
“이상하죠?”
그리곤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내 귀엔 그 말이 왜…, 서문이 그 아이를 감싸고 도는 것처럼 들릴까요?”
“그런…,”
“마치 양궁이나 천자의 곁에 두는 걸 꺼리는 거로 보이는데.”
“아닙니다, 천태비님. 그것이 아니오라….”
“물론 아니겠죠.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 보였다는 것뿐이에요.”
천태비가 괜한 소릴 했다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허나 그 아이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어요.”
말을 마친 천태비가 대기 중이던 자신의 시종관과 함께 유유히 양궁을 빠져나갔다.
후우…….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문이 한숨을 삼켰다.
가비가 여인인 걸 알게 된 이상, 또 그걸 숨겨주고 있는 이상, 웬만하면 천태비의 눈에는 안 띄는 게 좋았다. 천태비가 지닌 남다른 촉은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