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난…….”
잠시간의 침묵을 지킨 가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태황국 사람이 아니야.”
흔들리는 시선을 간신히 정돈하며 반소를 바라봤다.
눈을 피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들 것 같았다.
자신을 삼키려는 저 눈빛에.
“여긴 내가 살던 곳이 아니야. 내 세계는 따로 있고…,”
“그래. 넌 이곳 사람이 아니고 다른 세계가 있지.”
반소가 가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비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걸 믿었다.
그 황당하고 기가 막힌 말을 믿었다.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확인할 길도 없었지만, 가비가 한 말이라 믿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 허락도 없이 마음이 열렸다.
가비에게는. 가비에게만큼은.
“그래도.”
안 갔으면 좋겠다.
“나랑 살자. 여기서.”
다른 건 모르겠고 지금 이 순간, 오직 그 마음만이 절실했다.
“내가 네 친우가 되어 주고, 방패가 되어 주고, 무기가 되어 줄 테니.”
그건 반소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을 말이었다.
“저쪽 세계에 있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게, 내가 널 지켜줄 테니. 넌 그냥 날 믿고 여기 있어.”
반소가 던진 건 부탁도 강요도 아닌, 약속이었다.
그 말의 무게를 알기에 가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인간 은가비가 나고 자란 흔적이 있는 곳.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곳.
그곳을 버리고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됐다.
반소에게.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진심만큼, 가비 또한 그에게 진심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에게 감추고 있는 제일 큰 거짓을 제 입으로 밝혀야 했고.
아니. 어쩌면 이곳에 남는 것과 상관없이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반소의 눈을 볼 때마다, 그가 자신을 사내로 알고 대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제는 그것이 심장에 얹어진 무거운 돌덩이 같았다.
“나 사실…….”
가비가 눈을 떨구며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얼굴로 온기가 느껴졌다.
“…….”
가비가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반소의 손끝이 가비의 뺨에 닿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고, 숨을 멈췄다.
칠흑 같은 눈이 가비를 응시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금 쿵쿵- 가슴을 울릴 때, 굳게 다물려 있던 반소의 입술이 나지막한 말을 토했다.
“이상한 일이지.”
“…….”
“전부터 이렇게 만져보고 싶었거든.”
욕구가 동하게 된 경계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이렇게 닿아보고 싶었다.
만져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무, 무슨 소리야.”
가비가 애써 얼굴을 돌려 손길을 피하자,
덜컹-
반소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밥상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만큼 가비에게 다가앉았다.
가비가 놀란 눈으로 반소를 올려다봤다.
제발……,
심장이 진정해주길 바랐다. 아니면 쿵쾅대는 소리가 반소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가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소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내리깐 눈이 가비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둥근 이마와 일자로 곱게 난 눈썹, 그 아래 옅은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과 긴 속눈썹. 그리고 적당히 솟은 콧대와 작은 콧방울, 그 아래 자리한 도톰한 입술까지.
솜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세밀하게 살폈다.
“다 먹은 거면 치워달라고 할까?”
가비가 억지로 딴청을 피우며 눈을 돌렸다. 하지만 반소는 넘어가 주지 않았다. 되레 미간을 좁히며 알 수 없단 말투로 속삭였다.
“넌 사내잖아. 사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세뇌하듯 같은 말을 반복하다 가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막 딴 복숭아의 속살처럼 보드라운 살결이 반소의 손끝을 자극했다.
엄지가 둥글게 뺨을 간질일 때마다 가비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천으로 압박해둔 가슴이 극심한 호흡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가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소의 엄지는 이제 턱을 지나쳐 가비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윗입술보다 더 도톰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눌러보았다.
안쪽으로 보이는 옅은 분홍빛 살에, 반소의 눈이 움찔하며 가늘어졌다.
“난 왜 네가…, 여인이었으면 싶지.”
그냥 여인이길, 여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니라면 가비를 향해 느끼는 이 감정과 욕구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라리 네가 여인이라면…,”
난 너와 뭘 하고 싶은 걸까.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건가.
백지처럼 하얗기만 한 감정은 색이 물들 때마다 그 자각이 매우 빨랐다.
정확하게 자신이 어떻게 물들고 있는지, 그 색이 무언지 확실하게 파악했다.
“잠깐…!”
가비가 피할 새도 없이 반소가 고개를 틀며 다가왔다. 순간,
쿵쿵쿵!
“반소님!”
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풍이었다.
“반소님 큰일 났습니다! 빨리…!”
나와 보셔야 한다는 성난 외침이 두 사람을 갈랐다.
밖은 금세 귀물경비대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러워졌다.
* * *(톡희_작_지_나가던_행_인)
일이 터졌다.
탁탁탁탁!
가비는 있는 힘껏 귀물경비대의 뒤를 따랐다.
이미 귀물경비대는 가비보다 앞에, 반소는 그보다 더 앞에서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른 중에도 가비는 계속해서 아니라는 생각만 되뇌었다.
주막에 당도한 귀물경비대는 비보를 안고 왔다.
수도 정찰을 무사히 마치고 주막으로 오는 길에, 사람들이 귀물의 습격을 받았다고 신고를 받은 것이다. 이는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귀물경비대가 눈에 불을 켜며 찾고 있는 귀물의 등장이었고, 피해자는 어린 소년 셋이었다.
‘마을 축사에서 청소를 도와주던 아이들인 것 같습니다.’
풍의 침통한 보고에 반소도 가비도 얼굴을 굳혔다.
‘넌 여기 있어라.’
그렇게 말한 반소가 방 한쪽에 세워두었던 반월도를 들고 뛰쳐나갔다. 가비 역시 그 뒤를 따라나섰다.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아니야…. 아닐 거야!
첨벙-
발에 밟힌 물웅덩이에서 흙탕물이 튀었다. 어느새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솟고, 어두운 논길을 지나 방향을 틀었다.
말도 안 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벌써부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귀물경비대를 쫓아가는 길이 눈에 익었다. 윤이 사는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윤아, 아니지?
너 아니지?
마침내 멀찍이서 여러 개의 불빛이 보였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었다.
뜀박질을 멈춘 가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건조한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아, 하아….”
가비가 커다랗게 어깻숨을 내쉬며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헤집었다. 두터운 사람 벽 너머로 보통 사람들보다 키가 큰 귀물경비대의 모습이 보였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가비를 사람들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개중엔 현장을 보고 끔찍하단 얼굴로 돌아서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정말…, 정말…….
현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지독한 두엄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정말 너 아니지….
끝끝내 맨 앞에 서 있는 사람까지 헤집고 나섰다.
가비를 발견한 귀물경비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보이는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 셋이 땅에 너부러져 있었다.
“…윤,”
가비의 입에서 탄식처럼 윤의 이름이 튀어 나갔다.
가죽이 벗겨진 시체 세 구 중 한 구의 발에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쪽 발은 반쯤 걸쳐져 있었고, 남은 발은 아예 벗겨져서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눈에 익은 신발에, 가비의 숨이 급격히 가빠졌다.
“윤아….”
가비가 넋 나간 사람처럼 손을 뻗으며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윤……,”
도무지 눈앞에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낮에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서로 웃으면서 얘기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네가…,
“아,”
벌어진 가비의 입에서 꽉 막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윤을 향해 달려드는 가비를, 반소의 팔이 낚아챘다.
벗어나려는 가비를 뒤에서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이내 현장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침묵으로 가라앉았고, 가비의 비명 같은 울음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