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쾅-!
비명을 지른 것과 동시에 목간 문이 열렸다. 반소였다.
목간으로 들어온 반소가 사방을 휘둘러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가비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저, 저기!”
반소가 가비가 가리킨 곳을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설마…….
“거, 거미! 왕거미!”
지붕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거미 한 마리가 가비와 몇 뼘 떨어진 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물론 성인 남자 손바닥만 한 크기였지만, 저 정도는 마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크기였다.
“빠, 빨리 잡아줘! 잡아!”
가비가 식겁하며 소리 질렀다.
반소가 기가 막힌 얼굴로 거미줄을 톡 끊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녀석을 발로 툭툭 차서 목간 아래 틈이 있는 곳으로 내보냈다.
“가, 갔어? 나갔어?”
가비가 욕통 밖으로 빼꼼 눈만 내민 채 물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민망해진 가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만한 건 저쪽 세계에서도 보기 힘들어! 아마존에나 가야…!”
순간 말끝을 흐렸다.
“…….”
어둑한 목간 안. 낯설고도 어색한 침묵이 가비와 반소를 감쌌다.
욕통의 가장자리를 잡고 있는 가비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가비가 몸을 웅크려 턱 끝까지 물에 담갔다. 아마도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아, 안 나가?”
“…어.”
조금 늦게 대답한 반소가 휙 몸을 돌렸다.
반소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가비는 참았던 숨을 토했다.
“후우……. 심장이야.”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아주 극심하게.
한바탕 난리를 친 후, 그 후는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누군가가 또 목간을 찾아오지도 않았고, 거미를 또 볼 일도 없었다. 그래도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어, 가비는 후다닥 씻고 나갔다.
“다…, 했는데.”
혼잣말을 하듯 중얼대자, 뒤를 힐끔 곁눈질한 반소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가비가 따랐다.
찌르르- 찌르르-
올 때 들었던 풀벌레 소리가 가는 길에 유독 크게 들렸다. 아까의 침묵과 지금의 침묵이 그 깊이를 달리 한 것처럼 서먹하게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는 방에 들어와서 더 선명해졌다.
각자 봇짐에 갈아입었던 옷을 챙기고 분주한 듯 움직였지만, 의식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가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 기대어 앉았고, 반소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비가 슬쩍 반소를 훔쳐보자,
“왜.”
심상한 물음이 돌아왔다.
“아니야.”
가비가 서둘러 눈길을 돌렸다. 겨우 잠잠했던 심장이 다시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몰래 보는 것도 귀신같이 알아채니, 눈을 둘 곳이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때마침,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다.
“상 들어가요.”
반소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자 중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소박한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맛있게들 잡솨요.”
가비가 반사적으로 꾸벅 목인사를 전했다.
문이 닫히고 다시 둘만 남았다. 저녁상을 사이에 둔 채로.
“먹어.”
반소가 눈짓으로 밥을 가리켜 숟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밥이었다.
밥을 보니 출출함이 올라왔다.
“잘 먹을게.”
가비가 국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담백하고 고소한 국물이 밥알과 함께 입안을 채웠다.
“맛있다.”
“다행이군.”
“저쪽 세계에 있는 순댓국 같아.”
“순댓국?”
“응. 내가 좋아하는 거 있어.”
그나마 밥을 먹으니 말문이 좀 트는 것 같았다.
“넌 안 좋아하는 게 없다던데.”
“무슨 소리야?”
“시종관한테 들었다. 차려준 밥상을 깨끗이 비우고 갔다고.”
“아-”
가비가 백숙을 먹었던 날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날 몸보신했잖아. 덕분에.”
“…….”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 고마웠어. 정말.”
그렇게 말하며 밥 한 숟갈을 크게 떠넣는 가비를, 반소가 눈을 들어 바라봤다.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건지, 아니면 원래 이리 촉촉하게 생긴 건지.
목욕을 마친 얼굴이 아기처럼 뽀얬다. 그와 상반되게 밥을 먹는 입술은 붉었고.
반소가 시선을 내렸다. 자꾸만 더 보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아까 목간에서도 그랬다. 욕통 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있는 모습에, 이상하게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피가 돌았다.
그전에도 피가 돈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조금 달랐다. 휘돌던 피가 한곳으로 몰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진다는 감각이 이런 것인지, 처음 알았다.
“너 말야.”
말을 걸자 가비가 입안에 가득 밥을 넣고 반소를 바라봤다.
“여인과 합방해 본 적이 있어?”
“으응?”
“여인과 정사를 나눠본 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풉!”
사레가 걸리며 입안에 있던 밥알 몇 개가 튀어 나갔다. 그중 몇 개는 반소의 국밥 안으로 들어갔고.
“…미안!”
당황하는 가비와 달리 반소는 표정의 변화 없이 음식물이 튄 제 옷을 손으로 툭툭 털어낼 뿐이었다.
“네, 네가 갑자기 이상한 걸 물으니까 그렇잖아.”
“그게 이상한 건가?”
“이상한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럽긴 하지.”
“어째서?”
“저쪽 세계는 이쪽 세계와 달리 결혼, 그러니까 혼인이 좀 늦거든. 태황국처럼 부모님의 허락이 있으면 성인이 되기 전에도 막 할 수 있고,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너희 세계에서는 혼인을 해야만 합방할 수 있는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목덜미를 긁적이던 가비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몰라. 아무튼 난 안 해봤어.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사람 민망하게.”
그러게 말이다. 쓸데없이.
반소도 그 답을 찾고 있었다.
어쩌자고 녀석에게. 그딴 걸.
그러면서도 반소의 눈은 계속해서 가비를 바라봤다. 아까 가비가 저를 훔쳐봤던 것처럼.
처음엔 그저 사람 간의 정이 무언지 알게 되고, 그걸 알려준 가비에게 마음이 가는 거라 생각했다. 친우가 되어 주겠다던 가비의 말이 좋았고, 새롭게 맺은 관계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데 난 네게…, 또 다른 걸 원하는 건가.
이상하게도 충족되지 않은 무언가가 반소의 신경을 긁었다. 그리고 그것이 욕정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 보니 그 마음이 더 명확해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내를 상대로.
내가 비역질에 관심이 있던 놈이었나.
그건 결코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 누구라도 제 눈에 걸렸겠지. 허나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사내건 여인이건. 그 누구도. 반소의 눈에 걸린 이가 없었다.
하물며 귀물경비대조차도 때가 되면 기생집을 찾고 여인을 찾는데, 반소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과연 정상일까 싶은 욕구가, 불쑥 가비에게 동한 것이었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이 밥을 다 먹은 가비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잘 먹었다!”
그리고는 아직 한참 남은 반소의 국밥을 보며 말했다.
“뭐해. 밥알을 세고 있어?”
“밥알을 세?”
“깨작깨작 먹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했던 말씀.”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말씀’이란 말을 종종 했다.
“네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인데.”
“한의사.”
“한의사?”
“음…, 태황궁의 어의 같은 거야. 사람들의 병증을 고쳐주는 사람.”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흥미로워, 반소는 가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할아버지도 아빠도 한의사였어. 나도 대를 이어서 한의사 되는 게 꿈이었는데….”
가비의 입가로 설핏 미소가 어렸다.
“할아버지, 아빠 엄마, 다 돌아가셨거든. 지금은 아무도 없어. 큰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그래도 친구 은영이가 자주 놀러와 줬고, 고양이랑 개들도 매일 찾아와 줬어.”
생각해보면 찾아와 준거였다. 외로울지도 모를 가비를 위해.
“안 가면 안 되는 건가.”
낮게 깔린 음성에, 가비가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반소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며. 혼자라며.”
“…….”
“그럼 여기 있어도 되잖아. 돌아가지 말고.”
너무도 뜻밖이라, 생각도 못 한 말이라서, 가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반소를 바라봤다.
“난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수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돌아갈 궁리를 하는 가비를 볼 때마다.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여기 내 옆에-
“가지 마라. 은갑아.”
나랑 있자. 태황국에서.
반소의 곧은 눈빛과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가비의 마음을 덮쳤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해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