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43화 (43/95)

[43화]

몸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반소가 침상 위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이마 위에 식은땀이 맺혔다.

정확하게 오늘 새벽, 동이 틀 무렵부터 시작된 증상이었다.

쿵쿵쿵!

“반소님!”

밖에서 곤의 외침이 들렸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반소 없이 수도를 정찰 나갔던 귀물경비대가 일찌감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던 반소가 걱정돼서 저리 밖에서 난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곤 혼자 문을 두드리고 소란을 떨었다.

보다 못한 풍이 곤을 밀치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는 별일 없이 잠잠합니다. 고뿔에 걸리셨다니 편히 쉬십시오!”

“아니 천하의 반소님께서 고뿔에 걸리시다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이냐? 반소님!”

쿵쿵쿵!

“반소님! 얼굴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이 곤이 직접 봐야 안심이 되겠습니다! 반소님!”

반소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곤 때문에 곤죽이 될 지경이었다.

“됐다! 다들 그만 꺼져!”

머리를 부여잡고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거짓말처럼 밖이 조용해졌다.

반소가 반쯤 들었던 머리를 다시 털썩, 뒤로 뉘었다.

“하아….”

땀으로 흠뻑 젖은 등이 축축했다. 고뿔이 아니었다. 이건…….

나도 뭔지 모른다. 다만,

며칠 전 발동한 주술력 때문이란 건 확실했다.

본인조차 상승한 지 몰랐던 주술력이 개방된 순간, 그 힘이 끝도 모르고 솟구쳤다. 다행히 급히 제어하긴 했지만, 통제된 것도 용할 지경이었다.

반소가 흉터가 남은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주술력이 상처를 비집고 나왔을 때, 손에 불이 붙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주술력이 상승한 이유가 뭘까.

어릴 때부터 줄곧 듣고 자란 얘기가 있었다.

혈통, 즉 순혈에 관한 것이었다. 천족의 피를 온전히 타고난 현은 반소보다 육체적 능력은 약했지만 주술력만큼은 월등했다. 반대로 반소는 육체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현보다 주술력이 약했다.

둘 다 천족인 천태비에게서 났지만, 엄연히 품고 있는 씨앗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허니 순혈인 현과 반쪽짜리 반소의 능력이 다르고, 그것이 천족임을 증명하는 주술력의 차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헌데 그것이 폭발하듯 상승했다. 반소는 그것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위기감을 느꼈다.

귀물의 피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됐다. 적어도 자신이 먼저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해서 지금의 후유증을 고뿔이라 둘러댄 것이었다. 때마침 상황도 적절했다.

서문을 비롯한 모든 어의가 시험장에 가 있으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시험날이었다.

녀석은 잘하고 있는 건가…?

무겁게 가라앉는 정신을 붙들며 가비를 떠올렸다.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겁고 입술과 혓바닥이 가뭄을 맞은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왼쪽 심장이 쿵쿵거리며 거칠게 뛰었다.

몸속을 휘도는 피가 용암처럼 지글거리는 걸 느꼈다. 자칫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붙어라, 시험. 꼭 붙어서 음궁으로 와.

그런 생각으로 간신히 버텼다. 버티면서도 가비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

극악무도한 죄인을 실기시험에 내보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어의로서 분별심을 없앨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살인자든 어린아이든, 어의에게 병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다 같은 병자여야 했다.

둘째, 사특한 기운에도 눌리지 않는 용기를 보기 위함이다. 죄인을 상대로도 동요가 없어야 했고, 그런 대범함은 평정심과도 직결됐다.

셋째, 실기시험을 통해 의학도들이 응용하고 제조한 약을 죄인들에게 먹여보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면 간혹 처방이 잘못되거나 몸에 위해가 갈 수도 있는데, 그건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죄인들을 상대로, 한 마디로 확인되지 않은 약효를 사람에게 실험하는 것인데 이는 사형제도가 없는 태황국에서 이미 오래된 관습으로 굳어진 일이었다.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평생을 감옥소에서 형벌을 받거나 이렇듯 실험이 필요한 일에 투입되곤 했다.

“지금부터 정해진 시간 안에 병자의 상태를 살피고 검진표를 작성한 뒤,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하여 나무함에 넣고 가시오!”

커다란 징 소리와 함께 시험이 시작됐다.

가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앞에 있는 자는 살인자이기도 했고 병자이기도 했다. 그중 살인자보다는 병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그러지 않고서는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서슬 퍼런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볼 때마다 어깨가 굳은 것처럼 긴장됐다.

‘일단은 살려놔야 벌을 주지.’

언젠가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의학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는데, 응급실에 실려 온 살인범을 두고 갈등하는 주인공 의사의 심리적인 고뇌가 담긴 회차였다.

‘난 용서 못 해. 저런 놈을 내 손으로 살려야 한다니.’

‘그래서 이눔아. 그냥 내비둔다고?’

‘그건 아니지만….’

가비가 티브이 속 주인공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민했다. 말이 쉽지, 누구도 피해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분노와 절망감을 감히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으니까 살려야지.’

그때 할아버지가 나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저렇게 죽어버리면 그냥 끝나는 거 아니냐. 너무 쉽잖아. 그러니까 살려서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얼굴까지 까발려서 평생 죄인으로 낙인찍고. 안 그러냐? 천하의 몹쓸 놈 같으니라고.’

덤덤히 말하던 할아버지가 별안간 티브이 속 범인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가비는 웃음을 터트렸고.

“후우-”

가비가 긴 한숨과 함께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죄인의 죄명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 일가족 4인 살해 ]

가비가 눈을 들어 죄인을 바라봤다.

무려 네 명의 인생을 삼켜버린 놈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천하의 몹쓸 놈이었고 천벌을 받아도 부족한 놈이었다.

그러니까 살려줄게.

네 놈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내가 꼭 살려줄게.

그런 마음을 먹자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생 감옥소에서 형벌을 받으며 살게.

내가 꼭 그렇게 해줄게.

어느새 차분해진 눈으로 가비가 의자를 끌어당겨 죄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눈동자와 눈 밑, 전체적인 얼굴 안색을 비롯해 손발톱의 색깔부터 꼼꼼히 들여다봤다. 죄인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온전히 그를 관찰하는 건 의학도의 몫이었고 그걸 정확하게 짚어내는 게 이번 시험의 관건이 될 것이었다.

음양오행에 따른 태황국의 진료법을 통해 병자의 병증을 파악한다. 가비는 수업시간에 배웠던 음양오행 대조표를 떠올렸다. 일단 그것과 반하는 병자의 상태를 정리해 검진표에 적었다.

그리고 환자의 평소 식사량과 배변량에 관련된 참고표를 보고 환자의 맥을 짚고 가슴과 배 이곳저곳을 손으로 꾸욱꾸욱 눌러보았다.

천식 등의 호흡기 쪽 만성병증도 있어 보이지만, 가비가 보기에 제일 큰 문제는 소갈, 즉 당뇨인 듯 보였다.

병자의 사설도 없이 참고표와 외관상의 특징, 그리고 맥과 호흡의 속도만으로 병증을 추측하는 것은 상당히 섬세하고 지리멸렬한 과정이었다. 때문에 여기저기서 검진표를 작성하고 찢기를 반복하는 소리가 속출했다.

가비 역시 검진표를 작성했다가 찢고 다시 작성했다. 병증을 완벽히 파악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럴만한 연륜도 배움도 짧았다. 허니 최대한 가깝게, 제대로 짚어내는 것이 시험의 핵심이었다.

마침내 검진표를 작성하고 그에 맞는 약초의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 이 또한 고심할 게 많았다. 자신이 판단한 병증이 정답이라는 보증도 없지만, 그에 따른 처방 역시 정도(程度)가 아닌 응용법을 첨부해야 했다.

시간은 어느덧 유시(酉時:17시~19시)를 향했고, 노을마저 사라질 무렵이 되었다.

종료 시간이 임박해서야 다들 붓을 내려놓았다. 붓을 내려놓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로 검진표와 처방전을 보고 또 들여다봤다.

가비는 더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듯 나무함을 열었다. 이곳에 검진표와 처방전을 넣으면 끝이었다. 다시 수정할 수도, 꺼내 볼 수도 없었다.

탁.

마음을 다잡으며 나무함을 닫았다.

“시험 보느라 수고하셨소.”

감독관이 바로 그것을 가져가며 감로수를 제공했다. 지친 의학도에게 수분과 당을 모두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감사합니다.”

가비가 그것을 받아마셨다. 뒤늦게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나무함이 수거되는 동시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죄인도 경비대가 데려갔다. 이로써 끝이었다.

일어나기 전 잠시 숨을 고르던 가비가 콧등을 찡그렸다. 별안간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뭐지?

가비가 옆을 돌아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끝낸 의학도가 나무함에 검진표와 처방전을 넣고 있었다.

착각인가?

기분 나쁜 냄새였다. 낯설지만 한 번쯤 맡아본 적이 있는 오묘한 냄새.

가비가 의자를 빼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의학도가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감로수에 넣었다.

방금 맡았던 냄새가 다시 한번 코끝을 스치며 빠르게 사라졌다.

…화소초!

뒤늦게 냄새의 정체가 떠올랐다. 수업시간에 보고 배운 적이 있는 독초 중 하나였다. 화소초가 독초로 분류된 이유는 화(火)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른 풀로 있을 땐 상관없지만 물과 같은 액(液)에 섞이게 되면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치명적인 맹독이 되었다.

“너 뭐야.”

가비가 저도 모르게 감로수를 들고 있는 의학도의 팔을 붙들었다. 의학도의 눈빛이 이상했다. 불안한 듯 흔들리면서도 그 속에 악에 받친 감정이 엿보였다.

“화소초를 넣었지?”

가비가 감로수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루의 정체를 물었다.

“이거 놔!”

들켰다는 생각에 흥분한 의학도가 가비를 밀쳤다.

“여기요!”

가비가 재빨리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의학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경비대가 달려왔다.

“이잇!”

이를 부득거린 의학도가 죄인을 향해 감로수를 뿌렸고, 가비가 그것을 쳐냈다.

촤악-

독을 품은 감로수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으악!”

놀란 죄인이 나자빠졌고, 치이익- 무언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헉!”

가비가 황급히 제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감로수가 닿은 옷이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이내 연기와 함께 지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핑글-

별안간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휘청거린 가비가 주저앉듯 쓰러졌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으윽….”

가슴 부근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뜨거워서 아팠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힘없이 하느작거렸다.

혼미한 시야 속으로 겁에 질린 의학도와 죄인의 모습이 차례로 들어왔다.

‘부녀자 겁탈’

죄인의 가슴팍에 붉게 적힌 죄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