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42화 (42/95)

[42화]

오직 천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 장곡이, 직접 음궁으로 기별을 넣었다. 수도를 정찰 돌고 돌아온 반소는 피갑 속에서 꿉꿉해진 몸을 씻지도 못하고 그것을 받았다.

천자의 몸 상태에 대한 것은 웬만하면 기밀이기에 읽자마자 태워버렸다. 그리고 피갑만 대충 벗어 놓은 채 감옥소로 향했다.

감옥소에는 장곡과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반소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반소와 눈이 마주치자 경비대장이 급히 시선을 떨구며 예를 갖추었다. 똥통에 빠졌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해서 천자님께선, 지금 어떠하신가.”

의례적인 물음을 던졌다.

“피로가 누적되어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반소가 무심히 답하며 목적지 앞에 섰다. 어떠한 장소나 공간에 흑주술을 걸 때는 그 안에 사람이 없어야 했다. 자칫 신체에 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월도를 두고 온 반소가 허리춤에서 수리검을 꺼냈다. 현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을 그어 피를 낸 뒤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핏방울이 뭉글거리며 한데 뭉치더니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스악- 스악- 스아악-

마치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지켜보던 장곡과 경비대장의 눈이 커졌다.

주술을 머금은 기운이 공간으로 스며드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강하고 빠른 흡수였다.

반소 역시 그것이 의외인 듯 가늘게 뜬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이내 화아아악- 푸른 빛과 함께 주술력이 발동됐다. 주술을 건 공간 전체가 기묘한 문양으로 뒤덮였다.

촤아아악!

꿈틀대던 문양이 파도가 범람하듯 반소 쪽을 덮쳐왔다.

“허억!”

놀란 경비대장이 입을 떡 벌렸고, 장곡 역시 팔을 들어 방어했다.

그들 앞에 서 있던 반소가 동요 없는 모습으로 그것을 제압했다. 손을 뻗어 힘을 압축한 뒤 그것이 고루 퍼질 수 있도록 분배하고 조절했다.

후우우욱-

마침내 통제된 힘이 완벽하게 발현되며 원하는 공간에 압착됐다.

“…….”

사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반소가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봤다. 주술력이 발동된 손에서 푸른 기운이 느껴졌다.

주술력이…, 상승했나?

분명 그랬다. 주술력이 상승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반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표정을 갈무리하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내 몸 상태가 다른 때보다 좋은 모양이군.”

“그, 그러십니까.”

힐긋 돌아보니 경비대장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있었고, 장곡은 놀란 눈을 여전히 홉뜬 채였다. 저 늙은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안 봐도 뻔했다. 해서 더 태연하게 굴었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으니 천자님께서 하루속히 기력을 회복하시어 다시 보완해주길 바라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반소가 유유히 감옥소를 빠져나갔다.

“…….”

경비대장과 장곡이 입을 다문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내내 침묵하던 장곡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천자님과 다시 뵙지요. 경비대장께서도 유난은 삼가시고요.”

“유…난일 게 뭐 있다고요. 어쨌든 급한 불은 껐으니 됐습니다.”

단순히 급한 불을 껐다고 표현하기엔 보통 화력이 아니었다.

장곡과 경비대장 모두 말을 아꼈지만 알고 있었다.

만약 저 공간에 사람이 있었다면 해를 입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웠을 거라는 걸.

그 정도의 주술력을 천자도 아닌 반소가 발휘했다는 걸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해서 함구해야 함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 * *

드디어 어의 시험 당일. 의궁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새벽부터 일찍 깬 의학도들은 서로 눈인사만 전한 뒤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소란을 떨면 부정이라도 탈 것처럼 행동했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가비 역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주변 사람들과 후배들에게 응원을 받던 수능 날이 떠올랐다.

이건 또 이거대로 괜찮네.

진중하고 경건한 분위기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어 좋은 듯했다.

가비는 제가 누웠던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개어 자리에 밀어 놓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오정과 겸복도 비장한 얼굴로 정갈히 단장했다.

시험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사시(巳時:09시~11시)부터 미시(未時:13시~15시)까지는 필기시험으로 진행되고 식사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신시(申時:15시~17시)부터 유시(酉時:17시~19시)까지 실기시험으로 진행됐다.

“의학도들은 모두 시험장으로 모이시오!”

밖에서 시험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방을 나서기 전 가비와 겸복 그리고 오정이 서로 합격을 기원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드르륵-

거의 동시에 학도당에 있는 모든 방문이 열리고 의학도들이 나왔다.

질서를 지켜 차례로 신발을 신고 마당을 나가자 맞은편 학도당에서 여학생들이 나왔다.

‘은갑아, 힘내! 다들 시험 잘 봐!’ 연화의 눈빛에 미소로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도착한 시험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도무지 커닝이라곤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자리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가비가 [은갑]이라고 적힌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해서 방석은 아주 폭신하고 안락했다.

시험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단상 위에 태어의 서문이 올랐다. 모두를 둘러본 뒤 감독관들에게 명했다.

“시험지를 배분하시오.”

그 말에 감독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시험지를 배분했다. 서로 교차하며 나누어 주고 간 시험지가 의학도들의 서안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지금부터 어의 시험을 시작하겠소! 부정을 저지른 자는 퇴출과 더불어 처벌을 받게 되니 엄중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오!”

육중한 징 소리와 함께 의학도들의 시선이 서안 위로 향했다.

가비가 수십 장의 시험지를 잘 포개어 한쪽에 놓고 한 장씩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지금까지 배운 약초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이 주관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리부터 준비된 먹물에 붓끝을 적셨다. 비교적 수월하게 문제를 풀었다.

간혹 헷갈리는 건 있었지만 다행히 모르는 건 없었다. 가비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배웠던 모든 것을 시험지에 적어 넣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여기저기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가비 역시 양반다리를 몇 번이나 바꿨다. 마지막 장을 풀 무렵,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시험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시간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절대 남지 않았다.

다시 한번 들린 징 소리가 시험의 종료를 알렸다.

곳곳에서 한탄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가비도 등을 쫙 펴며 뻣뻣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어진 점심시간도 매우 단출하고 조용했다.

시험장을 벗어나 너른 뜰 곳곳에 앉아 각자 받은 영양 가득한 주먹밥과 과일 몇 조각 그리고 물을 받아 마셨다.

그러는 동안 시험장은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실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잠시 쉬고 있는데 저만치 사람들이 걸어갔다. 포승줄에 묶인 죄인 수십 명과 그들을 둘러싼 경비대였다.

뭐지?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죄인들을 보며 가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쉽지 않겠다, 이번 실기시험.”

언제 온 건지. 오정이 소리 없이 다가와 속삭였다. 곁에 겸복도 함께였다.

“무슨 소리야?”

가비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때 실기시험을 알리는 외침이 들렸다.

“이제 실기시험을 시작하니 의학도들은 시험장으로 들어오시오!”

결국 제대로 된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서둘러 시험장으로 향했다.

“잘 봐.”

“너희도.”

급히 인사를 나눈 뒤 제 이름이 적힌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사람이 마주 볼 수 있는 의자 두 개와 작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겸복과 오정에게 듣기로 실기시험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해마다 다른 문제가 출제된다고 했다. 그중 어떤 게 걸릴지는 시험 직전까지 출제자인 서문과 감독관들을 제외하곤 알 수 없다고.

가비를 비롯한 의학도들이 오와 열을 맞춘 자리에 앉아 문제를 기다렸다.

잠시 후. 시험장의 정문으로 아까 봤던 죄인들과 경비대가 들어왔다. 죄인들은 손과 발, 몸통이 모두 묶인 상태로 걷는 것이 고작이었다.

경비대가 죄인들을 지정된 자리에 앉힌 뒤 물러났다.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대비해 창을 든 채 시험장 주위를 에둘렀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꿀꺽.

가비가 마른 침을 삼켰다.

[ 살인 ]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비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죄인의 죄명이었다. 시뻘건 글씨가 낙인처럼 가슴팍에 붙어 있었다.

죄인과 눈이 마주쳤다. 오소소-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시험장을 둘러싼 경비대의 존재가 무색할 만큼, 죄인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헌데 그 눈빛만큼은 금방이라도 포승줄을 자르고 달아날 것처럼 형형했다.

가히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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