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야말로 시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진표와 처방전이 든 나무함은 순식간에 수거되었고, 감로수를 뿌린 의학도는 자리에서 포박됐다.
그 모든 과정을 보지 못한 채, 가비는 급히 내약방으로 옮겨졌다.
가비가 통증을 참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을 안고 달린 건 다름 아닌 서문이었다.
현장 수습은 다른 어의들과 경비대에게 맡긴 채 서문은 쓰러진 가비부터 안고 내약방으로 내달렸다.
수많은 병실 중 빈 곳을 찾아 들어간 서문이 가비를 침상 위에 눕혔다. 그리고 바로 가비의 옷부터 벗기려 들었다.
“…잠, 잠시만요!”
가비가 숨을 헐떡이며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제가, 제가 할게요.”
가비가 서문의 손길을 뿌리쳤다. 허나 서문은 물러나지 않았다. 상황이 위중했다. 지체하다간 옷이 녹아 살과 함께 눌어붙을 수도 있었다. 가비도 알지만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약만 가져다주시면 제가…,”
“자가 치료가 불가하다!”
서문이 다급히 소리 지르며 가비의 옷을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두둑-
매듭이 뜯기며 앞섶이 열렸다. 가비가 놀란 숨을 삼키며 바닥으로 엎어지듯 돌아누웠다.
“…….”
침묵이 흘렀다.
하아, 하아-
가비의 가쁜 숨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가비가 뜯어진 옷자락을 움켜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수습하기엔 늦었다.
이미 드러난 맨 어깨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 * *
오늘이 어의 시험날인 걸 알지만 현은 침소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병증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근래 흉일에도 잠잠하던 병증이 불쑥 올라와 현을 괴롭혔다. 벌써 이틀째였다.
“천자님, 탕약입니다.”
장곡이 탕약 그릇을 현에게 내밀었다. 현이 일어나 그것을 허겁지겁 마셨다. 그릇을 탈탈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목구멍으로 넘겼다.
얼굴이 타는 것 같았다. 얼굴뿐이 아니었다. 사지가, 아니 온몸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통증은 물론이요 역겨운 냄새까지 풍겼다.
“당장 서문을 불러오라!”
“하오나 서문은 지금 어의 시험 감독 중입니다.”
사실 서문이 온다 해도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고통을 줄여주는 탕약을 주는 것 말고는. 허나 병증이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측근은 장곡을 포함해 서문뿐이었고, 서문은 현의 유일한 주치의였다. 그가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침상에 누워 얼굴을 감싸 쥔 채 괴로워하던 현이 생각난 듯 물었다.
“그래…, 그 시종은 어찌 되었느냐. 내 병증을 본 그 시종 말이다.”
현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이번 병증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천태비가 예고한 흉일도 아닌 평범한 날 중 하루였다. 하여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침하여 세안을 하는 중 물이 닿자마자 통증과 함께 병증이 유발됐다. 티끌 한 점 없는 얼굴로 거무죽죽한 얼룩이 돋았고, 그걸 본 시종이 세안 물을 엎으며 나자빠졌다. 시종의 입을 막아야 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처리하였으니.”
장곡이 심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천자님께서는 그저 존체를 돌보시는 데만 전념하소서. 천자님께 흠이 되는 일은 이 장곡이 주저 없이 처리할 것입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현이 침상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툭, 침상 맡에 있던 무언가가 현의 이마로 떨어졌다. 건강인형이었다. 가비가 주었던.
현이 그것을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면포 위로 번지듯 그려진 눈코입이 현을 향해 웃고 있었다. 현이 그것을 꼭 끌어안고 간절히 빌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병증을 가져가 다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녀석이 사서님의 우환을 가져가 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가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일그러진 현의 입가로 미소가 스쳤다.
우연인가.
네가 날 멀리하자마자 병증이 돋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천자!”
그때 침소 문이 열리며 천태비가 들었다. 소식을 듣고 워낙 급히 온 터라 문밖에서 시종이 알리기도 전에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천태비님 납시었습니까.”
예를 갖추는 장곡을 지나쳐 현이 있는 침상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혈담초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천태비는 다른 때보다 기력이 좋아 보였다.
“천자, 어디 봐요. 이 어미가 보겠습니다.”
천태비가 천자의 얼굴을 감싸며 들어 올렸다. 탁한 눈동자가 천자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가늘어졌다. 몸 상태가 다른 때보다 좋아 그런지 천태비의 시야 또한 다른 날보다 밝았다.
병증의 상태를 파악한 천태비가 안타까운 얼굴로 현을 그러안았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울까요.”
“…어머니.”
“제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 마세요. 견딜 만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버거웠지만, 현은 어머니 천태비를 위해 애써 웃었다. 그런 현이 안쓰러워 천태비의 눈가로 눈물이 맺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천태비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어서 불로초를 찾아야겠습니다. 자각하여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어머니.”
“별이 보였으니 분명 이 땅에 발현은 되었을 겁니다.”
안 그래도 천자가 해야 할 일을 반소가 대신했다 들었다. 이는 사안이 매우 중대했다. 주술력이 떨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병증까지 돋다니. 그것도 예측하지 못한 날짜에 갑자기.
천태비가 예상한 것보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여 더 미룰 수 없었다. 하루빨리 불로초를 찾아 결합시키는 수밖에.
“발현이 되었다는 건 성년을 넘겼다는 뜻. 허니 본인도 모르게 능력 또한 각성 되고 있을 거예요.”
사실 태황국에서 제일 귀한 약초는 혈담초가 아니었다.
인간 불로초.
그것만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약(靈藥)이었다.
“필요하다면 태황국 전체를 색출할 겁니다.”
이제 막 성년을 넘긴 여인들이 그 대상이 될 터였다.
“그러니 천자는 어미만 믿어요. 천자의 반려를 반드시 찾아낼 테니.”
청초하고 유약하던 천태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 *
침상 위에 납작 엎드린 가비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굴리며 서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쥐죽은 듯이 조용할 뿐이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였다.
“상처부터 보자. 봐야 한다.”
침묵을 깨트린 서문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낮았다.
가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옷을 추슬렀지만, 가슴을 가린 것이 고작이었다. 내려간 옷자락 사이로 둥근 어깨와 가느다란 목, 그 아래 곧은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리 보니 완벽한 여인이었다.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이런 아이를 어찌 사내로 보았는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허나 그땐 분명히 약관을 막 넘긴 어린 사내로 보였다.
그것이 가비에게 일어난 미묘한 변화 때문이라는 걸, 가비 본인도 서문도 알지 못했다.
“괜, 찮습니다. 정말로.”
가슴 위로 느껴졌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비도 이상할 정도였다. 분명 다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착각이었나?
하지만 서문은 물러나지 않았다. 필시 가비가 다쳤을 거라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네 성별 따위가 아니다.”
서문이 더 지체하지 않고 가비의 손을 치우며 옷깃을 벌렸다.
“……!”
서문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슴을 눌러 감춘 무명천. 그 천에도 화소초가 닿아 눅진했는데 가비의 피부는 멀쩡했다. 서문이 사심 없는 손길로 가비의 가슴 윗부분을 쓸어보았다. 깨끗했다.
통증도 없어 보이고.
“아마도 옷 때문인 듯싶습니다.”
가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남들보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서요.”
말처럼 가비는 여전히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서문이 안도감을 느끼며 서둘러 가비의 옷을 닫았다. 그리곤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돌아섰다.
“여인인 걸 감추기 위해 그리 입었느냐? 계절에 어울리지도 않게?”
가비가 대답 없이 입술 안쪽을 꾹 물었다.
“어째서 숨겼느냐! 애초에 알았다면…!”
서문이 말문이 막힌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뒷짐을 진 그의 모습에서 가비는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읽었다. 그건 가비가 지닌 재능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 스무 개를 앞서 배우는 타고난 감각과 판단력, 거기에 암기력까지.
서문은 가비가 이번 시험에 합격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아가서는 일등 제자가 되어 저와 함께 태황국의 어의로서 의학에 대해 함께 고심하고 연구할 수 있는 인재가 될 거라고도 기대했다.
그런 서문의 마음이, 허탈해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인보다는 사내로서 지내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반소에게처럼 모든 걸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일부 사실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여기, 이곳에선 여인보단 사내로 지내는 게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고요.”
보이시한 제 모습을 보고 다들 사내로 착각해준 게 다행이라 여겼다. 지금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토록 이곳 사람들과 깊게 엮일 줄은 몰랐다.
엮이면 엮일수록 비밀을 만들고 거짓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서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가비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궜다. 어째서 속인 거냐고 다그치지 않고, 어째서 숨겼느냐고 이유를 채근해준 서문이 고마웠다. 고맙고도 미안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할까.”
서문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태황국에서 천태비를 제외하고 여인의 위치란 것이 사내보다 못하다는 걸 서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나마 천태비를 통해 개선된 것도 많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와중에 취약 계층으로 노출된 여인이라면 많은 위험이 따랐다. 누군가의 첩으로 팔려갈 수도 있었고,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허니 여인이길 포기하고 사내로서 살아가길 택했다는 가비의 마음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허나 모두가 네가 여인임을 숨겼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속였다고 생각하겠지.”
허면 서문의 탄원으로 처벌은 피할 수 있어도 태황궁에는 더 머물 수 없을 것이었다. 짧은 시간 서문은 그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허나 태어의로서의 욕심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많은 어의를 배출하고 봐왔지만 가비만큼 총명한 눈을 지닌 자가 없었다. 그 마음이 자꾸만 서문을 흔들었다.
단지 성별을 감추었을 뿐인데, 그 외에는 흠이 될만한 것이 없는 아이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선택하거라.”
서문이 힐끗, 가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황궁에 남겠느냐, 떠나겠느냐.”
떠나겠다면 조용히 내보내 줄 것이고, 남겠다면 앞으로도 여인인 걸 감추고 생활해야 했다. 어느 것을 택하든 득과 실이 따를 테고 그걸 결정하는 건 가비의 몫이었다.
가비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선택의 문제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돌아가는 사정도 아니까 나가서 밥이야 굶지는 않겠지. 하지만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실마리가 태황궁에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직감은 더욱더 강렬해졌다. 마치 가비를 이곳에 붙들어 놓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반소.
반소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와 친우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묻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잔상처럼 가비의 마음에 맺혀 있었다.
‘그 눈에 계속 나를 담아줄 수 있겠어?’
한 번도 누군가를 담아본 적 없고, 담겨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해서 무심하고 거칠지만, 그 속에 깊은 외로움이 있다는 걸.
남들은 모를지언정 가비만은 그걸 보았다.
내가 이곳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남겠습니다.”
가비가 답했다.
“태황궁에 남겠어요.”
있는 동안 만큼은 반소의 단 하나뿐인 친우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