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든든히 아침을 챙겨 먹은 가비가 음궁을 나왔다. 궁과 궁을 잇는 뜰을 지나 다리를 막 건너는데, 그 끝자락에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현이었다.
현은 가비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가비가 이곳을 지나가길 기다렸던 것처럼.
가비가 적당한 거리에서 손을 모으며 예를 갖췄다. 그리고 지나려는데, 현이 가비를 불렀다.
“은갑아.”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다시 손을 모으고 시선을 내렸다.
현이 가까이 다가섰다.
“잘 지냈느냐.”
“예.”
“공부하기 힘들지 않고?”
“할 만합니다.”
“이제 시험이 닷새 남았다지?”
“예.”
“붙을 수 있겠느냐.”
“최선을 다해야지요.”
상투적인 물음과 대답이 간결하게 오갔다. 현의 얼굴로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예전에 형님께…, 그러니까 야왕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널 어찌 만난 건지.”
고개를 숙인 가비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대답해 주지 않더구나.”
처음엔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허나 이후엔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마치 제가 모르는 둘만의 비밀이 있는 듯하여. 현은 그게 싫었다.
“말해 줄 수 있겠느냐.”
하지만 가비는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현의 말을 듣고 반소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기 때문이었다. 해서 반소가 답하지 않은 걸 제가 답하기 위해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천자의 물음에 감히 답을 안 할 수 없으니.
“궁에 들어오기 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살려주셨어요. 그뿐입니다.”
제 말이 진실임을 알리려는 듯, 가비가 눈을 들어 현을 바라봤다.
마주한 갈색 눈이 반갑기도 했지만 쓰리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현을 스쳤다.
“그래…. 은혜를 입었구나.”
“예.”
현이 아는 반소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같은 반인반귀가 설 곳을 마련하기 위해 귀물경비대를 만들었고 귀물을 잡을 뿐이었다.
애써 은혜를 베풀 만큼 자비롭지도 않았으며, 누군가의 목숨을 나서서 구해줄 만큼 정의롭지도 않았다.
그런 건 태황궁 안에서 오직 한 명, 천자의 몫이면 충분했다.
“참, 네게 줄 것이 있다.”
현이 달갑지 않은 표정을 숨기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한지에 둘러싸인 길쭉한 상자였다.
“이게, 뭡니까?”
“붓이다.”
현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번엔 하사품 목록에 제대로 기록하고 주는 것이니 받아도 된다. 시험 볼 때 이것으로 보거라.”
“…….”
하지만 가비는 선뜻 받지 않았다. 맞잡은 손을 난감한 듯 그저 꼼질거릴 뿐이었다. 천자가 제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소문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반소와의 친분은 그렇지 않았지만, 천자와의 친분이 과시되는 일은 질투와 시기를 부를 게 틀림없었다.
“이걸 받지 않으면 불경죄가 됩니까?”
가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이 있는 하사품이 아니면 받기가 주저됩니다.”
최대한 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솔직히 말했다.
“나중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이 있는 하사품을 내리신다면, 그때 받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이걸 받으면 또 과한 소문에 휩쓸릴까 겁이 납니다.”
그렇다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현은 더 강요할 수 없었다. 강요할 수는 없다 해도 서운한 마음까지 숨겨지지는 않았다.
“전처럼 지낼 수는 없는 것이냐. 날 형님 삼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천자님을 몰라 뵙고 함부로 한 얘기니 잊어주십시오.”
“내가 천자인 것이, 네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냐. 내가 괜찮다 해도?”
현은 이대로 가비와 멀어지는 것이 싫었다. 가비와 허물없이 얘기하고 웃고 지냈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좋았다. 그런 시간을 다시 한번 갖고 싶었다. 헌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저와 천자님의 마음이 그렇다 해도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말까지는 막을 수가 없으니까요.”
너무도 당연하고 옳은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사서라는 신분으로 절 대하신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재미로 그랬든 호기심으로 그랬든, 가비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허니 혹시라도 그에 대해 미안한 마음으로 주시는 하사품이라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가비가 꾸벅,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시험 잘 보겠습니다.”
씩씩하고 말하고 돌아서는 가비를, 현이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장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가비를 칭찬했다.
“참으로 현명한 아이가 아닙니까. 괜찮은 인재가 될 것이옵니다.”
“그런가?”
날 밀어내는 게?
내게 선을 긋는 게?
“문득 어린 시절 천자님이 떠오릅니다.”
장곡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천자님께 친우들이 여럿 있지 않았습니까.”
친우라.
그래. 그때는 그들이 친우라고 믿었다.
허나 그건 천태비와 장곡이 만들어준 허울이었다. 원(元)의 자식 중 또래들을 데려다가 현과 놀게 했다. 그들과 말타기를 하고 활쏘기를 시합하며 즐겁게 어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우가 아니었다. 상하 관계였지. 그들은 제게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무얼 하든 현이 이겼고 그땐 그걸 몰랐다. 그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제게 양보했다는 것을.
“천자님께서는 그들에게 금방 흥미를 잃으셨고, 그들은 지금 모두 원(元)이 되어 천자님의 든든한 발판이 되었지요.”
흥미를 잃은 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을 친우가 아니라 천자로서 대했기 때문에. 그걸 최근까지도 몰랐다. 몰랐다기보다 그저 당연한 줄 알았다.
그래서 가비와의 관계가 좋았다. 나이와 신분을 떠나서 저를 있는 그대로 대해준 게 좋았다.
그 누가 병증이 돋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얼룩 고양이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그 태도 덕분에 병증에 대한 제 걱정도 한낱 지나가는 소소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서고에서 형님이 앉아 있던 네 옆자리는 내가 앉아 있던 자리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장곡. 네가 무슨 생각에서 그리 말하는지 안다.”
가비가 현명하다고 말한 것은, 그 아이가 현의 호의에 경거망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걸 믿고 천하를 등에 업은 듯 경솔히 굴지 않고 선을 지키기 때문이었다.
“헌데 천자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지 않나?”
현이 장곡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눈빛이 사뭇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세상 아래 천자가 갖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한 건 그대였다. 허면 그 말이 사실이어야지. 그대 말처럼 난, 하늘의 피를 이어받은 천족, 그중에서도 제일 고귀한 천자이니.”
고조 없는 낮은 음성이 단단한 말이 되어 장곡의 귀에 박혔다. 장곡의 말을 언제나 귀담아듣고 수긍하던 천자였다. 처음 있는 반박이었다.
* * *
마침내 택한 길일. 현이 감옥소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흑주술을 쓰기 위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자는 시간까지 기(氣)를 많이 소모할 걸 철저히 대비했다. 흑주술은 타인을 통제하거나 고통을 주는 주술력이기에 그걸 행하려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천자님께서 납시었습니다.”
장곡의 알림에 야포청에 있던 야경대의 경비대장이 즉각 튀어나왔다. 경비대 모두가 경비대장을 따라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현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로 장곡과 시종들, 그리고 경비대장이 따라붙었다.
“주술력이 떨어진 곳이 염옥과 수옥이라 하였나?”
“예. 현재 죄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두었습니다.”
현이 경비대장의 안내를 받아 감옥소로 들어갔다. 야포청과 주포청의 감옥소는 같은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냉옥은 비교적 죄질이 약한 자들을 가두는 곳이라면 염옥과 수옥은 죄질이 무거운 자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염옥은 타는 듯한 고통을, 수옥은 물에 빠져 숨쉬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곳이었다.
텅 빈 감옥소를 바라보던 현이 손을 뻗었다. 느껴지는 기운이 현저히 약했다. 이러면 제대로 형벌을 가할 수 없었다. 확실히 보수가 필요했다.
시종들은 감옥소 입구에서 대기하고 현을 따라 들어온 경비대장과 장곡은 서너 걸음 물러나 그의 뒤를 지켰다.
현이 황금빛 단도로 제 손바닥 가운데를 그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실금 같은 핏방울이 새어 나와 뭉글거리며 한데 뭉쳐졌다. 이내 그것이 화악- 여러 갈래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원하는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스아아악-
귀를 긁는 기묘한 소리가 공간을 진동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힘을 발휘하지 못한 주술이 푸슈슉- 소리를 내며 사그라졌다.
“……!”
현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다시 한번 주술을 발동했다.
역시나. 주술은 발현되지 않았다.
현의 뒤에 서 있던 경비대장과 장곡의 표정도 굳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실패였다.
…왜!
현이 단도를 들어 제 손바닥을 더 깊이 그을 때였다.
“천자님!”
장곡이 그답지 않게 음성을 높이며 현의 손을 잡았다. 품속에 항상 넣고 다니던 무명천으로 급히 현의 손을 감았다.
박제된 것만 같은 현의 눈이 장곡의 눈과 마주쳤다.
장곡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길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장곡이 피가 나는 현의 손바닥을 힘주어 지혈했다.
“우선 침소로 가시어 서문에게 진료부터 받으시지요.”
지켜보던 경비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감옥소를 보수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그건 곧 태황국을 다스리는 천족의 위엄과 그 힘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감옥소의 보수를 이유로 죄인들을 다른 곳에 가두어 놓았으니, 이 일에 차질이 생기면 그 소문이 어찌 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길일이 중요하다지만 날 때부터 갖고 나는 그 힘이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나?
천자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감안한다 해도 선뜻 이해되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전례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걸 의식한 듯 장곡이 태연한 얼굴로 경비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근래 천자님의 피로도가 높아 오늘 일정이 무리가 된 듯합니다.”
“그럼 어찌해야….”
“급한 대로 야왕님께 부탁해보지요.”
“야왕님께요?”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겝니다.”
급한 불이란 건 오늘 이 일이 불손한 소문으로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야왕님의 주술력이 천자님의 주술력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천자님께서 기력을 회복하시는 데까지는 효력을 낼 수 있을 겁니다.”
“예.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경비대장께서도 유난은 삼가시고요.”
“별것도 아닌 일에 유난을 떨게 뭐 있겠습니까. 시종장은 아무 걱정마시고 그저 천자님부터 보필하시지요.”
그 말을 들은 장곡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현을 부축해 감옥소를 빠져나갔다. 그들을 향해 예를 갖추고 있던 경비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가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지만 실은 찝찝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