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오랜만에 찾은 천족의 서고는 그대로였다. 입구에 놓인 커다란 책상과 그 뒤에 손님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작은 공간. 그리고 높은 책장과 주술로 연결된 미로 같은 길.
오직 천족과 지정된 사람만이 길을 잃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가비는 반소를 놓칠세라 옆에 딱 붙어 걸었다.
“그러니까 네가 제일 의심스러운 게 이쪽 세계에 있는 약초도감이다, 이거지?”
“어.”
반소가 약초도감이 있는 곳으로 가비를 데려갔다.
“천자님을 사서님으로 오해했을 땐 몇 번 와서 봤거든. 안 그래도 다시 와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가비가 약초도감 한 권을 꺼내어 보며 말했다.
“지금처럼 아무도 없을 때, 나 한 번씩 데려와 줄 수 있어?”
“…….”
반소가 대답 대신 가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비가 ‘왜?’ 하는 표정으로 반소를 올려다봤다.
“꼭 나랑만 와라.”
반소가 말했다.
“한 번씩 데려와 줄 테니 나랑만 와.”
“그럼. 당연하지. 너 아니면 누구랑 와. 나랑 여기 와줄 사람….”
가비가 들고 있는 책을 반소가 느린 동작으로 빼앗아 올리며 말했다.
“나 말고 와줄 사람이 있다 해도, 나랑만 와.”
“…….”
그저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중한 명령 같았다.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득한 눈빛에 가비는 저도 모르게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알았어. 너랑만 올게. 됐지?”
그제야 반소가 빼앗았던 책을 다시 가비의 손에 돌려줬다.
책을 받아든 가비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책을 펼치자 반소도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넌 거기서 뭘 찾는 건데.”
“그냥 뭐 흔적 같은 거?”
“흔적?”
“사실 잘 몰라. 그런데 내 촉이 자꾸 이걸 뒤져보라고 해. 저쪽 세계에 관련된 무언가가 적혀 있지 않을까 해서.”
반소는 잠시 고민했다. 저쪽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함께 찾아줄까 싶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내 이 이상의 도움은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해 보였지만 정말 뭐라도 찾게 된다면.
그럼 넌 저쪽 세계로 가버릴 건가.
그럼 난 널 잃는 건가.
이제야 생긴, 하나뿐인 친우를.
왼쪽 가슴, 흉터 부위가 욱신했다. 흠칫했지만 동작이 워낙 작아 가비는 눈치채지 못했다. 반소가 살짝 일그러진 눈가로 가비를 바라봤다.
갈색 눈동자가 빠르고 진지하게 책을 훑고 있었다.
넌 가버리는 건가. 방법을 찾으면.
속이 울렁였다. 흉터 부위가 욱신대고 가슴이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이 고통스럽다기보다 기묘했다.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참.”
가비가 생각난 듯 들고 온 봇짐을 열었다. 하얀 봉투를 꺼내 부스럭거리며 열더니 거기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사탕하고 옥춘당이 있어. 뭐 먹을래?”
“둘 다 별로.”
“먹어 봤어?”
“아니.”
그런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먹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반소가 가비를 바라봤다.
가비가 봉투 속을 뒤적이더니 알사탕을 꺼내 반소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가벼운 손짓에 반소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사탕이 쏘옥 들어왔다.
사르륵- 단내가 입안 가득 퍼졌다. 절로 단물이 고이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먹을 만하지?”
가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수도에 처음 왔을 때 동냥 받은 동전으로 이거 사 먹었잖아. 노란색이 인기 제일 많은 거야. 네가 지금 먹은 거.”
입술을 날름 핥는 가비의 혀끝을 보며, 반소가 또 한 번 단물 고인 침을 삼켰다.
“이건 어디서 난 건데.”
“같은 방 쓰는 학우가 줬어.”
“사내놈이잖아.”
“응.”
“낯간지럽게 이런 걸 줬다고?”
“내가 공부하면서 정리해둔 걸 보여줬거든. 고맙다고.”
그렇다고 이런걸?
여인도 아니고 사내놈이 사내에게?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가비를 바라봤다. 바라본다기보다는 거의 꿰뚫어 본다는 식의 눈빛이었다.
“실은 나한테 어린 동생들이 있는 줄 알아. 말하자면 긴데…, 처음부터 신분 세탁을 잘못한 기분이야.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아무튼 난감한데 미안하고 고마운, 뭐 그런 상황.”
“넌 나 말고도 친우가 많군.”
“응?”
“나 말고도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도 많고.”
그 말이 왜 그렇게 되지?
가비가 영문을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허나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반소 자신이었다.
아까는 속이 미칠 것처럼 울렁이더니, 이제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녀석이 저 말고 다른 친우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름 끼칠 만큼 유치해서 더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반소를 보며 가비가 물었다.
“왜? 가게?”
“오래 있진 못해. 천족이 아닌 사람을 사적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건 썩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니.”
“아.”
가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고 있던 책을 자리에 꽂았다.
“미안. 내 생각만 했네.”
가비가 반소의 옷소매를 당겼다.
“가자, 빨리.”
반소가 못 이긴 듯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한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천자가 데리고 들어온 이를 저라고 데리고 들어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천자와 야왕인 제 위치는 달랐지만, 알게 뭔가. 원래 제멋대로 사는 안하무인이 자신인데.
허나 내키지 않았다.
다른 이가 준 사탕을 입에 물고 저쪽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가비가.
몇 번을 생각해도 그저 싫었다.
“…….”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서고를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었다. 현이었다. 양궁과 서고를 이어주는 다리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들어오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둘 사이가 무척이나 가깝게 보였다.
그 증거로 반소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형님이.
냉랭한 표정에 짐승 같은 회색 눈을 가진 제 형님이.
웃었다. 가비를 보고.
나란히 앉아 사탕을 입에 물고 이야기를 나누더니.
서로 돈독한 모습으로 서고를 빠져나갔다.
“형님이…?”
보고도 믿을 수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소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일그러진 얼굴을 현은 알지 못했다.
* * *
간밤 편히 잠든 가비가 눈을 떴다. 늦은 밤까지 반소의 침소에서 자신은 공부를, 반소는 서책을 읽었다. 그러다 약방으로 돌아왔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을 잔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정신은 또렷하고 개운했다.
이부자리를 곱게 정리한 가비가 나갈 채비를 했다. 약방을 한번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또 보자.”
문을 열고 나가자 시종들에게 청소를 지시하는 시종관이 보였다.
“반소님께선 출타하셨나요?”
“네. 방금 나가셨습니다.”
가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정찰 나갈 때 몸조심하라는 말을 깜빡했다.
“예, 그럼.”
“아, 은갑 군.”
시종관이 돌아서는 가비를 불렀다.
“아침 들고 가시지요.”
“예?”
“반소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에 시종관을 따라간 가비는 입을 떡 벌렸다. 부엌 한편에 마련된 작은 방. 그곳에 아침상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예. 은갑 군 몫입니다. 남기더라도 빠짐없이 맛보고 가라고 하셨어요.”
가비가 쭈뼛대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위장이 놀랄세라 말간 죽부터 한술 떴다. 고소한 죽이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아침치고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보다 부담 없이 잘 먹혔다. 가비가 닭다리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얼마나 푹 고았는지 입에서 살살 녹았다.
“백숙 진짜 맛있네요.”
어느새 앉아서 지켜보는 시종관의 시선도 잊은 채 먹는 데 열중했다.
시종관이 신기하다는 듯 가비를 바라봤다.
“은갑 군은 음궁이 좋다고 했다면서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괜찮다고 했지, 좋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말이 돌고 돌다가 그렇게 와전된 모양이었다.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그래요.”
가비가 입안에 있는 음식물을 씹어 삼키며 말했다.
“액운이나 흉조 길조, 이런 거 잘 안 믿어서.”
그런 건 내 마음이 정하는 거지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할아버지에게.
물론 이쪽 세계는 저쪽 세계와 다른, 분명 다른 기운이 존재했지만 적어도 가비에게 반소는 액운이나 흉조 따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이번 시험에 붙든 못 붙든 그건 여기 음궁하고 관련 없어요. 제가 좀 더 잘했거나, 좀 더 못했거나 둘 중 하나인 거죠. 그냥…, 전 그렇다고요.”
가비가 조심스레 말끝을 흐렸다. 어쨌든 태황국의 사람들 대부분이 신봉하는 뿌리 깊은 관습이나 편견 역시 함부로 부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순전히 가 비 혼자에게 국한된 것이어야 했다. 일반적인 게 아니라.
“난 은갑 군처럼 말하는 사람은 보질 못했어요. 그저 이곳으로 배정받았고 오랫동안 일했지만 딱히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을 하던 시종관이 ‘아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표정이었다.
가비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웃었다.
“방금 말은 못 들었어요. 이거 먹느라.”
시치미를 뚝 떼며 살코기를 입에 넣자, 시종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좀 엉뚱하고 별난 의학도다 싶었는데 볼수록 그게 영 싫지는 않았다.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붙이고. 성격이 참 살가웠다. 벽이 없고.
“난 반소님께서 누군가의 식사를 이리 챙기시는 것도 처음 봐요.”
너무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이런 아이라면 저라도 밥 한 끼 정도는 든든히 먹이고 싶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가비는 조금 특별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여러 날을 음궁으로 실습 나왔던 이는 가비가 유일했으니.
“시험 잘 봐요, 은갑 군.”
시종관이 말했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고.”
“걱정마세요. 꼭 붙어서 여기로 다시 올 거니까.”
가비가 활짝 웃는 얼굴로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