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현을 뒤로 한 채 음궁에 당도한 가비가 입구에서 멈칫했다.
낮에는 정찰을 나간다는 귀물경비대가 버젓이 처소 밖에 나와 있었다. 다들 무예 연습이라도 하는지 웃통을 벗어젖힌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이씨, 돌아가는 길도 없는데.
가비가 얼굴을 팩 돌린 채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갈 때였다.
“이봐, 너-”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가비를 불러세웠다. 돌아보니 곤이었다.
“그래. 너. 너 인마.”
가비가 입술을 꾹 물며 자리에 멈춰서자 곤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활을 쏘던 풍과 다른 귀물경비대도 곤의 뒤로 다가와 가비를 바라봤다.
곤이 한쪽 입술을 실룩대며 물었다.
“야. 너 그때 그놈 맞지? 우리한테 수면초 먹이고 달아난 놈.”
“맞는데…, 요. 그게 왜…, 요.”
나오지도 않는 존댓말을 억지로 내뱉자 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어린놈의 자식이 감히 누굴 물 먹이고 달아나, 달아나길! 아유, 콱 그냥!”
곤이 돌덩이 같은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을 듯 위협했다.
가비가 눈을 부릅뜨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 때려봐요. 어디.”
“어쭈?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때려보라고요, 자신 있으면. 나 이래 봬도 어의 시험 준비하는 의학도예요. 그쪽한테 얻어맞으면 몸져누울 거야. 귀물경비대가 나 팼다고 소문낼 거라고.”
“뭐야?”
작은 머리통을 한껏 내밀고 있는 가비와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허공에다 주먹을 내지르고 있는 곤의 모습은, 필시 유치하고 볼썽사나웠다.
풍이 쯧쯧, 혀를 차며 가비에게 말했다.
“너, 음궁으로 실습을 온 것이 아니냐. 빨리 들어가 봐라.”
“예.”
가비가 풍을 향해 꾸벅 인사한 뒤, 당당하게 걸어 처소로 들어갔다.
“와악! 씨! 저 비리비리한 샌님 같은 게 완전 철판이네? 낯짝이 왜 저렇게 두꺼워!”
아직도 수면초를 먹고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잠들었던 일이 생생했다.
“나 그때 진짜 입 돌아갈 뻔 했다고오!”
“안 돌아갔잖아.”
“동상 걸릴 뻔 했다고오!”
“안 걸렸잖아.”
풍이 곤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곤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가비가 사라진 곳을 노려봤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 여기 의학도로 들어왔지?”
“철판에다 낯짝이 두꺼워서 들어왔나 보지 뭐.”
곤이 홱- 풍을 돌아봤다.
“야. 넌 왜 이렇게 태평해? 열 안 받아?”
“태평하긴 누가. 나도 열 받아.”
“근데 난 왜 저놈보다 네놈이 더 기분 나쁘지?”
“그래? 왜 그럴까?”
풍이 어깨를 으쓱하자 곤이 약이 오른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물경비대의 우대장이란 놈이 이딴 식이니까 저런 놈이 우릴 우습게 알고 수면초를 먹인 거 아니야!”
“그런가? 내가 잘못했네.”
“야악!”
“근데 오늘 저녁밥이 뭐랬지?”
“뭐긴 뭐야, 보쌈이지.”
“나물 비빔밥이 아니고?”
“나물 비빔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예 연습하고 풀떼기를 왜 먹어! 배 곪게.”
“하긴. 그렇지? 그럼 정리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니미럴. 이놈은 뚝 하면 나물 타령이야.”
구시렁대는 곤의 어깨에 풍이 척, 팔을 걸쳤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뒤따라가던 귀물경비대가 웃음을 삼켰다.
* * *
누군가가 지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반소가 몸을 바로 했다.
이상했다. 언제부턴가 가비의 발소리가 다른 이들과 구분되기 시작했다. 단단한 문 너머로 사람이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우스웠지만, 그건 그만큼 자신이 가비를 의식하고 있단 뜻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소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야왕님, 저 왔습니다.”
존칭을 쓰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곤 빠르게 속삭였다.
“오늘은 좀 일찍 왔는데. 상관없지?”
가비가 바깥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나 약방에서 공부 좀 하고 있을게.”
그리고는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문을 쿵 닫고 나가버렸다.
“하.”
그 모습이 기가 막히면서도 깜찍해 보여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저놈은 대체 뭘 믿고 저리 불손한 걸까.
어쨌든 다른 날보다 일찍 음궁을 찾아온 건 나쁘지 않았다.
보통은 음궁을 나가지 못해 안달하니까. 태황궁에서 제일 늦게 해가 들고 제일 빨리 해가 지는 곳. 응달진 이곳을 사람들은 싫어했다.
그런 곳에 녀석이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게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난 녀석.”
다시 창틀에 발을 올리고 의자에 등을 기댄 반소가 보고 있던 서책을 펼쳤다.
서책엔 그의 글씨로 가득했고, 그 내용은 귀물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다. 모든 경비대는 휴일이 정해져 있었고 귀물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일이 많고 바빠도 녹봉과 휴일 문제는 칼같이 챙겼다.
다른 경비대와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되고, 그보다 더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게 귀물경비대에 대한 반소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탁-
서책을 덮은 반소가 몸을 일으켰다. 침상으로 다가가 머리맡에 있는 줄을 당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가비가 들어왔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러더니 이내 눈썹을 그러모았다.
“있어도 말하지 마. 나 지금 자유시간이야. 실습은 저녁부터라고.”
돌아서는 가비를 향해 반소가 말했다.
“와서 해. 공부.”
가비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다.
“여기 와서 하라고. 과제든 뭐든.”
그냥 그랬으면 싶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잠자코 있던 가비가 ‘알았어’ 하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봇짐과 책, 필기구를 챙겨서 다시 왔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은 가비의 맞은 편에, 반소가 앉았다.
가비가 앞에 앉은 반소의 책을 힐끔거렸다.
“너도 공부해?”
“그럼 매일 칼만 휘두를까 봐?”
“뭘 보는데?”
가비가 궁금하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사내 녀석이, 어지간히도 깔끔을 떠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날 수 있나.
그건 보통 사내들에게서는 맡을 수 없는 향이었다.
반소의 눈이 책을 살피는 가비에게 붙박였다.
눈동자 색과 똑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서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아기처럼 보송한 두 뺨과 수염이나 날까 싶은 매끄러운 턱과 인중.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날 끝에 자리한 콧방울은 귀엽게도 둥글었다.
그리고 입술.
반소의 시선이 가비의 입술에 머물렀다. 입술은 위쪽보다 아래쪽이 조금 더 도톰했다.
마치 여인의 그것처럼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입에 물면 말캉하게 씹힐 것처럼.
“……에 대한 거네?”
“뭐?”
반소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가비가 반짝 눈을 치뜨며 반소를 바라봤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치자 어제처럼,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반소가 얼굴을 물리자 가비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로 앉았다.
“귀물에 대한 것만 적혀 있다고. 이 책 말이야.”
가비가 손가락으로 톡톡 책 위를 두드렸다. 반소가 황급히 눈을 내려 책을 바라봤다.
입술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는 가비의 손톱이 보였다. 작고 단정한.
왜 자꾸…….
반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상할 정도로 녀석을 기민하게 바라보며 반응하고 있었다.
“이거 다 네가 적은 거야?”
가비가 신기한 듯 물었다.
“혹시 귀물에 관해 연구하고 기록해?”
“알아야 싸울 수 있으니까.”
무뚝뚝한 대답. 그 속에서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정말 의외였다.
모든 게 다 의외투성이.
가비가 바라보는 지금의 반소는 그랬다. 그 속에서 안 좋았던 첫인상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넌. 왜 그렇게 악착같이 하는 건데.”
이번엔 반소가 물었다.
“네 말대로 태황국이 네 세계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공부할 이유가 있나?”
“음…….”
가비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일 큰 이유는 숙식 제공 때문이고. 어쨌든 연고도 없는데 밖에서 얼어 죽을 순 없잖아.”
“그리고?”
“여기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어.”
“…….”
“내가 있는 이 자리. 누군가한테는 소중한 기회잖아. 어쩌다 보니 서문님 눈에 띄었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의학도가 됐는데. 그럼 누군가의 몫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언제 가더라도 말이야.”
“…그 언제가, 언젠데.”
“글쎄.”
가비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몰라. 그냥 막연하게 찾는 것뿐이야. 어떻게 왔는지, 어떻게 가야 할지. 나도 아직은 몰라.”
문득 제 입으로 뱉어낸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어떻게 왔는지. 어떻게 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무작정 적응하며 살고 있긴 한데, 정말 이곳에 눌러살게 되면 어쩌지.
그런 현실적인 문제가 불현듯 가비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 현타오네.”
“현타?”
가비가 애써 웃으며 책을 펼쳤다.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는 뜻이야. 그래도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러다 보면 길이 열린다. 우리 할아버지 말씀.”
가비가 심기일전한 마음으로 책을 들여다봤다.
그런 가비를, 반소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고 싶어.’ ‘가고 싶어.’
어쩌면 그 말이 가비의 진심이리라.
저렇게 말하며 웃어도 그 진심은 분명…….
욱신.
또다. 또 십자 흉터가 있는 왼쪽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린 반소가 찌푸린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난 왜, 네가 말한 그 ‘언제’가 마음에 걸리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웃는 네 얼굴이 왜 슬퍼 보이는 거지.
네가 슬프다는 생각에 왜 내 가슴이 아픈 거지.
그러면서도 왜, 그 ‘언제’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거지.
자꾸 왜, 널 보면 심장이 뛰는 거지.
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반소의 심장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