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공부에 열중하던 가비의 코끝에서 붉은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어!”
가비가 얼른 코를 막았다. 코피였다. 그걸 본 반소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면포를 가져왔다.
“고마워.”
면포를 받으려는 가비의 손을 체치고 반소가 직접 그것을 코 밑에 대주었다.
“그냥 있어.”
코밑을 받치던 하얀 면포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반소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사내자식이.”
보기보다 약골이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생각해보면 빠듯한 일정에 감옥소까지 다녀왔으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코피는 피로가 누적된 결과였다.
“진짜 오랜만에 흘린다. 코피.”
가비가 중얼거렸다.
“나 저쪽 세계에 있을 때도 가끔 흘렸었거든.”
“저쪽 세계에선 대체 뭘 했길래.”
“공부.”
“공부?”
“응. 수험생에서 해방됐다 싶었는데 여기 와서 또 이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가비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면포를 받치고 있는 반소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찌릿한 감각이 반소의 손을 관통했다.
“됐어. 이제 그친 거 같아.”
감각 뒤에 전해지는 은근한 온기에, 반소는 더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손을 떼버렸다. 당황스럽다 못해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저릿한 손끝을 애써 꽉 주먹 쥐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누가 보면 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말이 되는가.
사내놈한테 홀리다니.
고개를 털어낸 반소가 가비에게서 멀어졌다. 원인 모를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가비와 닿았던 손끝을 시작으로 알 수 없는 열기가 올랐다. 마치, 어젯밤 같았다. 잠이 든 가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반소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너 그만 약방으로 돌아가.”
“어?”
“네 자리로 가라고.”
냉랭한 말투였지만 가비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하던 공부를 접고 약방 업무를 봐야 할 시간이었다.
“이따가 향 태울 거야?”
가비가 물었다.
“그럼 미리 준비해 놓게.”
“됐어.”
“그럼 오늘은 수면초를 줄까? 말했지만 많이는 안 되고 정량만…,”
“됐다고 했잖아. 필요 없다고!”
신경질적인 말투에, 가비가 그제야 반소를 바라봤다.
“잠 못 자잖아. 괜찮겠어?”
“신경 끄고 빨리 꺼지기나 해.”
날카롭게 내쏜 반소가 침상 위에 털썩 누웠다.
귀찮다는 듯이.
보기 싫다는 듯이.
그렇게 가비를 시야에서 차단해버렸다.
가비가 눈치를 살피듯 반소의 등을 보며 속삭였다.
“…알았어. 갈게.”
“…….
“필요하면 부르고.”
묵묵부답인 반소를 두고 가비가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에, 반소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적막했다. 물속에 깊이 잠긴 것처럼.
사방이 고요하다 못해 무거운 침묵에 눌린 듯했다.
녀석이 갔을 뿐인데.
허나 이건 단순히 가비가 있고 없고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반소 본인도 알지 못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반소의 폐부 깊숙이 고였다.
왜 이리 녀석에게 동요하는 건지.
물음표의 주체가 사라졌는데도, 물음은 여전했다.
왜 이리 녀석에게 동하는 건지.
흔들리고 휘청이는 감정이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았다. 꼭 어떠한 선을 넘으면 태풍에 침몰 되고 말 돛단배가 된 것 같았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은 반소를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여인도 아니고 사내놈이다. 사내놈한테 내가 뭘…,
바라는 걸까. 원하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반소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갑갑하고 답답했다. 반월도를 휘두른다고 해소될 것이 아니었다. 갈급한 무언가가 반소의 목구멍을 바싹바싹 태웠다.
허나 이게 무언지, 어떤 감정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잘못되었다는 것.
이건 잘못되었다. 가져선 안 되는, 가질 수 없는 감정이고 마음이었다.
제 감정의 원인도, 색깔도, 형태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오직 그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음표가 자신을 찔러도, 그저 아니라는 답만 명확하게 돌아왔다.
그래, 처음부터-
정상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귀물의 땅에서 맞닥뜨린 것 자체가 그랬다.
제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다는 녀석이 신기했을 뿐이다. 흥미로웠을 뿐이다. 감히 수면초를 먹이고 달아난 게 괘씸하면서도 우스웠을 뿐이었다.
막연하게 ‘다시 보게 된다면’이라는 전제를 세웠지만, 정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세상 태황국에서, 다른 세계를 운운하는 녀석의 말을 들어준 것도 자신이었다.
결국, 맞장구를 쳐준 건 나다.
누굴 탓할까. 녀석이 자신을 홀렸든 꼬였든, 현혹된 자가 잘못이거늘.
그건 필시, 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녀석이 불손하게 굴도록 놔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즐겁고 좋아서.
허면 바로 잡는 수밖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혼란의 주체를 제대로 꺾어 놓아야 했다. 이성과 감정이 격돌할 때, 늘 답은 이성에게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였고, 경계의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제일 큰 무기였다.
더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선 안 돼.
입술을 굳게 다문 반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부 깊숙이에 고여있던 감정이 화가 되어 올라왔다.
겁 없이 까부는 것도 여기까지.
불경하게 군 것도 여기까지.
그 모든 걸 내가 받아주고 장단 맞춰 준 것도 딱 여기까지다.
문을 박차고 나간 반소가 약방으로 향했다.
그 시간. 약방으로 돌아온 가비는 열심히 약초보관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랍장을 열어 약초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조금이라도 상한 부분이 있으면 재깍 들어내고 청소했다.
마지막 서랍을 닫았을 때, 가비는 저도 모르게 투덜댔다.
“근데 왜 화가 난 거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불렀어? 왜 지가 먼저 불러놓고 꺼지래?”
정말 기가 막힌 변덕이었다.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겨서.
가비가 부루퉁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약방 일지를 펼쳤다. 붓을 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뭐 실수했나?
사실 변덕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뾰족하고 날 선 모습이라 신경이 쓰였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공부한 것밖에 없는데.
오랜만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기분. 그래서 좋았다. 꼭 도서관에 앉아있는 것만 같아서. 시간만 된다면 밤새 그렇게 있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냐고….”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누운 반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코피 흘린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가비가 피 묻은 면포를 만지작거렸다. 괜히 울적했다.
아프다고 칭얼댈 가족도, 맘 편히 얘기할 친구도 없는데.
이쪽 세계에 적응하면 할수록, 저쪽 세계에 대한 향수는 더해갔다.
이러다가 정말…, 돌아가지 못하면.
그런 생각이 올라올 때면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니야. 갈 수 있어.
어느 날 문득 왔던 것처럼, 또 어느 날 문득 돌아갈지도 모르잖아.
마음을 다잡은 가비가 붓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막 약방 일지를 작성하려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가비가 휘둥그런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소가 문가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붓을 놓은 가비가 반소에게 다가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단단히 굳은 얼굴에선 붉은 열감까지 느껴졌다.
“뭐야. 열나는 거야?”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건지, 걱정된 가비가 서둘러 반소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반소가 그 손을 쳐냈다.
“앞으로 내게 함부로 손대지 마.”
싸늘한 목소리가 가비를 향해 경고했다.
“불경하고 불손한 태도도 보이지 마라.”
“무슨 말이야 그게.”
가비가 당황한 얼굴로 반소를 바라봤다. 불쑥 찾아와서 제게 이런 말을 하는 반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마주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불편하게 굴었다든지,”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뭐?”
“분명히 말했어. 더는 날 하대하지 말라고.”
“하대라니. 내가 언제-”
말을 하던 가비가 멈칫했다. 잠시 생각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이 기가 막히고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이상했던 반소를 생각하면 이유를 물어야만 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별말 없었잖아.”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가비의 갈색 눈동자에, 반소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써 추슬렀던 정신이 다시금 산란해졌다. 이렇게 코앞에서 자신을 무지하게 바라보는 저 눈동자 때문에.
마치 제 어지러운 심경이 죄다 읽히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 반소의 속도 모르고 가비가 한발 다가섰다.
“말해봐. 그래야 내가 납득을 하지. 영문도 모르게 이러면…,”
퍽-!
반소의 발이 가비의 정강이를 찼다.
‘악!’ 가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하대하지 말라고 했어. 앞으로 내게 예를 갖추라고.”
가비가 입을 벌린 채 반소를 바라봤다. 아픈 것보다 놀란 게 먼저였다.
“…야!”
반소가 일어나는 가비의 다른 쪽 정강이도 걷어찼다.
가비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이번엔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너 미쳤어! 대체 왜 이러는…!”
순간 날아오는 주먹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날 선 긴장감이 무거운 침묵을 갈랐다.
허공에서 주먹 쥔 손을 부들거리던 반소가 손아귀에서 힘을 탁 풀어버렸다.
숨조차 멈추고 있던 가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코피를 닦아주던 마디 굵은 손가락이 보였다.
“경고, 무시하지 마.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나.”
음산한 목소리가 가비의 귓가를 울렸다.
“이쪽 세계든 저쪽 세계든, 네가 어디에서 왔든. 계급과 서열은 분명히 해라. 난 천족이고 넌 그저 의학도 나부랭이일 뿐이니까.”
마치 지금까지 놀아줄 만큼 놀아줬으니 더는 기어오르지 말란 소리처럼 들렸다.
“하.”
가비가 헛웃음을 흘렸다. 대차게 까인 정강이보다 돌연 변해버린 반소의 태도에 가슴이 시큰댔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가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천족들은 참 웃겨.”
가비가 반소를 쏘아보며 말했다.
“니들은 아랫사람들이 장난감 같아?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 이랬다가 저랬다가, 니들 내키는 데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사람으로 보이냐고!”
가비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왜 지금까지 장단 맞추고 놀다가 이제 와서 지랄인 건데!”
“지랄?”
“왜. 기분 나빠? 그럼 포청으로 보내. 군말 않고 가줄 테니까!”
가비가 탁자 위에 있는 봇짐을 낚아챘다. 그리곤 반소를 밀치며 방을 나갔다.
조금씩 빨라지다 이내 뛰어가는 가비의 발소리를 들으며 반소는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심경이 더욱 난잡해졌다. 마치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가 된 기분이었다.
끝까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대들었다. 하긴. 그런 녀석이라 처음부터 눈길이 갔던 거였다.
정강이 몇 번 차였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무릎 꿇고 벌벌 떠는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티끌만큼의 관심조차도 없었겠지.
하지만 그래서. 그런 녀석이라서. 마음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운 감정이 두 눈 가득 고여 자신을 노려보던 가비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꼭, 울 것처럼.
반소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잘됐다. 어쨌든 따끔한 맛을 보았으니 더는 자신을 편히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여 다가오지도 않겠지. 해서 닿을 일도 없겠지.
헌데 왜…….
아까까지만 해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젠 식은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에게 동하는 이 말도 안 되는 감정이 그저 별 것 아니기를.
아니, 별것이 되기 전에 미리 잘라 버렸음을 다행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 * *
음궁을 벗어난 가비는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눈앞이 금세 부옇게 흐려졌다.
“일진 사납네.”
코에서는 코피가 터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터지고.
가비가 시큰시큰한 콧등을 문지르며 달빛이 비치는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감옥소에 갇혔던 어제보다 오늘이 더, 기분이 착잡하고 울적했다.
“…나쁜 자식.”
자신을 내려다보던 반소의 눈빛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다.
이미 본 적 있는 그 눈빛이 왜 이렇게 심장을 찌르는지.
“처음부터 일관되게 행동하던가.”
감옥소에 있는 자신은 왜 구해준 건지.
밤새 제 곁은 왜 지켜준 건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제 말은 왜 믿어준 건지.
이럴 거면.
이럴 거면 왜.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학우들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했을 때보다도, 사서 현이 천자 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도, 지금 자신을 대하는 반소의 태도가 제일 큰 서운함으로 다가왔다.
‘난 천족이고 넌 그저 의학도 나부랭이일 뿐이니까.’
반소의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여긴 태황국이었다.
서열과 계급이 존재하고 사람과 귀물이 공존하는 세계.
그런 곳에서 야왕 반소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천족이었다. 반인반귀, 어둠의 자식이라 불릴지언정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반소에게, 난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서문에게도 현에게도, 태황궁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은가비’가 아닌 ‘은갑’이로써 대했을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 살던 사람처럼 적절히 연기하며 적당한 선을 지켰다.
그런데 반소에게만큼은 아니었다. 이곳이 태황국이라는 것도 잊은 채 서열이나 계급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제 모습 그대로를 보였다. ‘은갑’이의 옷을 입고 ‘은가비’로서 행동했다.
“그랬네. 내가….”
그제야 가비는 알았다.
“마음을 열고 있었나 봐. 나도 모르게….”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날 그냥 ‘나’로서 내보인 건.
“바보같이.”
그리고 널 그냥 ‘너’로서 바라본 건.
‘…명심해. 네 놈을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나라는 걸.’
어쩌면 내 목숨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너처럼,
‘내가 널 처음 봤으니까.’
나도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사람이, 바로 너였으니까.
그 잊지 못할 첫 만남이 생각보다 강렬했다는 걸, 가비는 지금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