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선생들은 수업시간에 늦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자칫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오전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가비는 있는 힘껏 달렸다.
음궁을 나오자마자 눈썹을 휘날리며 의궁, 학도당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학도당은 텅 비어 있었다. 모두 수업을 가고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 씻는 둥 마는 둥 몸을 적시고 학당으로 뛰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날렸다.
벌컥-!
문을 박차고 열자, 시선이 꽂혔다.
“허억, 헉….”
모두가 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가비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왠지 모를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선뜻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선생이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은갑이 뭐하고 섰느냐. 가서 앉지 않고.”
그 말 한마디가 굳었던 분위기를 다시금 풀어놓았다. 그제야 알았다.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를 신경 쓰게 했다는 것을.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소동에 불과했다. 허나 경비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크게는 의궁 전체를 소란스럽게 한 일이었다.
해서 누명이 풀렸다 해도 한동안은 눈초리 좀 받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그건 가비의 기우일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의학도가 가비에게 몰렸다. 가비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우르르 따르며 물었다.
“주포청으로 갔어, 야포청으로 갔어?”
“거기 가서 뭐한 거야? 심문받았어?”
“분위기는 어때? 완전 살벌하다던데.”
다들 포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하긴. 포청을 둘러싼 담벼락이 높던데, 죄를 짓지 않는 이상 들어갈 볼일이 없을 테니 호기심이 생길 만도 했다.
“누군가가 너 감옥소에도 들어갔다던데. 아니지?”
“맞는데?”
그 말 한마디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어.”
“감옥소 어디?”
“냉옥.”
무심히 대답하자 다들 ‘허어억-’ 소리를 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근데 너 괜찮은 거야? 거기 갔다 오면 며칠씩 앓아눕는다던데.”
“안 그래도…,”
뒤질 뻔하다 살았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괜한 말을 해봤자 얘기만 더 길어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아무튼, 따라오지 마. 귀찮아.”
가비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으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들 ‘같이 가!’하며 따라붙었다.
그날. 가비는 이쪽 세계로 온 후 제일 시끄럽고 말 많은 점심시간을 가졌다. 주된 이야깃거리는 경비대와 포청 그리고 감옥소였다.
하지만 이처럼 의학도들이 가비에게 달라붙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앗! 서문님이다!”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공손한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저만치 내약방에서 나오는 서문이 보였다.
이내 가비를 발견한 그가 무리 쪽으로 다가왔다.
“은갑이구나. 안 그래도 찾고 있었다.”
콕 집어 가비를 가리킨 서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 소식은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예.”
“그나마 일이 빠르게 해결되어 다행이구나. 아니면 더한 고초를 겪을 뻔하였어.”
“야왕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 말에 서문은 안도하면서도 의아했다. 오늘 아침. 어의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헌데 그보다 더 놀란 건 가비를 도와준 사람이 다름 아닌 야왕 반소라는 것이었다. 그분이 생전 누군가에게 관심이나 있었던 분이던가.
서문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의궁에 있었다면 일을 이리 키우진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태어의님께선 수도에 있는 약초방을 감찰하시느라 출타 중이셨잖아요.”
“내 바로 양궁에 들러보니 천자님께서도 이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셨더구나.”
천자는 이 일의 발단이 자신이라고 했다. 공식적인 절차 없이 물건을 하사한 꼴이 되었고, 그것이 일을 크게 만든 것이라고.
그러니 이 일을 신고한 익명자도, 주경대의 경비대장도 가비를 도둑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자신이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허나 주경대의 경비대장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일을 확인하고 판단해야 하는 직책이 아니던가.
그것만 생각하면 파직을 당해도 쌌지만, 부친부터 쌓아왔던 공덕이 큰지라 덕을 볼 수 있었다. 하여 석 달간의 정직 처분과 녹봉 삭감만으로 일이 처결되었다.
“혹시 아픈 곳은 없느냐? 그럼 내가 약을 한재 지어줄까 하는데.”
“괜찮습니다. 밤새 땀을 뺐더니 거뜬해요.”
의연하게 웃어 보이는 가비를 향해, 서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불편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약방으로 오너라.”
“예.”
서문이 인자한 얼굴로 가비의 어깨를 다독이며 멀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별안간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의학도들이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망의 눈길이었다.
“은갑아….”
“왜, 왜들 이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가비가 뒤로 물러섰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와락, 달려드는 무리를 피해 가비가 달아났다.
“은갑아아아!”
뒤를 돌아보니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으악!’ 비명을 삼킨 가비가 있는 힘껏 내달렸다.
마침내. 모조리 따돌리고 뜰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허억, 허억….”
백 미터 달리기를 반복한 듯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을 내쉰 가비가 커다란 나무에 기대앉았다.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파랗고 맑았다.
나…, 인싸 된 거야?
부정하고 싶지만 그랬다.
서문을 비롯해 선생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그 귀한 천자가 붓을 하사한 사람.
그것도 모자라 야왕까지 몸소 나서서 도와준, 이 구역의 미친 인싸.
“하.”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차라리 투명인간 취급을 당할 때가 속 편했구나 싶었다.
* * *
한참을 그렇게 숨어 있다가 다들 흩어졌을 무렵 학도당으로 향했다.
드륵-
방문을 열자 겸복과 오정이 앉아 있었다. 이제 막 실습을 나가려는 모양새였다.
가비가 그들을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가 봇짐을 꾸렸다.
이제는 놀러 갈 서고도 없고, 더는 그곳에 있는 약초도감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낮에는 시간이 남아도니 일찌감치 음궁으로 가서 공부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음궁은, 가비가 태황궁에서 의궁을 제외하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지난밤 반소에 대한 편견마저 사라지며 더욱 그렇게 되었다.
탁.
가비가 서안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으, 은갑아!”
오정이 나가려는 가비의 바짓자락을 움켜잡았다. 이내 가비 앞으로 겸복과 오정이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한테 못되게 군거 용서해주라.”
오정 옆에 겸복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가비가 그들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천자의 물건을 가진 자신을 도둑으로 오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엄연히 이들이었다. 이들이 서고만 제대로 알려줬어도 천족의 서고에 들어갈 일도 없었고, 천자 현을 만날 일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으면 적어도 사실을 얘기하고 그에 대해 사과하는 게 맞았다. ‘그동안’이란 말로 뭉뚱그릴 게 아니라.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그 말에 겸복의 손끝이 움찔했다. 가비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오정은 둘째치고 겸복은 울며 겨자먹기식의 행동인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이 천자와 반소를 비롯해 서문까지 등에 업고 있는 듯하니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은 듯했다.
차라리 속 보이게 행동하는 다른 의학도들은 순수해서 귀엽기라도 하지. 자존심까지 내팽개친 가식적인 모습은 되레 비굴하고 비겁해 보였다.
“됐고.”
가비가 붙잡힌 바짓단을 탁, 잡아 뺐다.
“그냥 하던 대로 해. 나도 니들한테 신경 끌 테니까.”
돌아선 가비가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오정이 탄식을 내뱉었다.
“겸복아, 어쩌지?”
“…….”
“저 자식 아무래도 우리가 신고한 거 아는 눈친데.”
모를 리가 없었고,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냥 싹싹 빌까? 미안하다고?”
“…….”
“우리도 저 녀석한테 붙어서 시험 준비해야지. 어? 너도 나도 이번엔 꼭 붙어야 하잖아.”
애가 닳은 오정이 바닥에 벌렁 누워 팔다리를 저었다. 그 옆에서 겸복은 굳은 듯이 있었다.
* * *
의궁을 나온 가비가 음궁으로 향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다리 끝에 서고가 보였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알고 드나들었던 천족의 서고가.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의학도들이 사용하는 서고는 이 길과 정반대되는 곳에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낸 학우들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을 사서라고 속인 현조차도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
문득 현을 생각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태황궁에서 말벗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저번에 빌렸던 책은 어떻게 돌려준담.
봇짐 안에 들어있는 책이 마음에 걸렸다. 서고에 직접 놓고 오자니 그것도 영 내키지 않고.
그냥 서문님이나 반소를 통해서 돌려줄까?
그래. 그게 낫겠다. 생각을 정리한 가비가 막 걸음을 옮길 때였다.
“은갑아.”
익숙한 음성이 가비를 불렀다. 돌아보니 현이 서 있었다.
가비가 멍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얼른 예를 갖췄다. 그 모습에 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목욕재계 등의 의식을 치른 후엔 부정 탈 것을 염려하여 정해진 시간 동안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하여 가비의 상태가 궁금했지만 참아야만 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자신의 형 반소가 가비를 도왔다고.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이었다. 장곡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나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지?”
“…….”
“내가 한 충동적인 행동이 널 곤란에 빠트렸구나.”
“…….”
“미안하다.”
가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예를 갖춘 채 현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현은 그게 자신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것만 같아 마음에 걸렸다.
이내 잠자코 있던 가비가 봇짐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냈다. 두 손으로 공손히 그것을 내밀었다.
“빌려 간 책 돌려드릴게요.”
현이 물끄러미 책을 바라봤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원하는 책도 빌려주시고, 약초도감도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그것만큼은 사실이었고, 그 사실에 대해선 감사한 마음이었다.
현이 그 책을 받자, 가비가 그제야 눈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저와 눈을 맞추지 않고 있었구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가비의 갈색 눈은 그저 고요하고 잠잠했다. 전처럼 자신을 향해 반짝이지 않았다.
“전 그럼 볼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비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멀어지는 가비를, 현이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책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돌아서는 가비를 부르지 못한 것은 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비가 제게 그은 경계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