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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20화 (20/95)

[20화]

가비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침상에서 벗어났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딘가에 부딪혀서 얼얼했던 콧잔등은 이미 신경 밖이었다. 대신 제 몸에 닿았던 반소의 감촉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저 운동만으로는 다져질 수 없는 몸이었다. 긴 세월 끊임없이 움직이며 축적되어온 근육은 아주 촘촘하고 단단해서 지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꿰뚫어 보던 눈빛. 그 회색 눈에 가슴이 철렁였다.

날 분명…, 알아봤을 텐데.

한 뼘도 안 되는 위치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으니 자신을 몰라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반소는 잠잠했다. 잠잠하다 보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돌아선 채 숨을 고르다, 일순 그 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요동치던 심장이 가라앉고, 온몸을 에워쌌던 열기가 서리를 머금은 듯 식었다.

긴장이 가시고 정신이 들자, 지금의 상황이 무얼 뜻하는지 냉철하게 판단됐다.

“너.”

가비가 느리게 돌아서며 말했다.

“난 줄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다. 분명히. 아마도 어제. 제 얼굴을 본 게 틀림없었다.

“날 지금 놀린 거야?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오늘 자신을 호출한 것도 찜질을 해달라 부탁한 것도, 여러모로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그런 게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가 났다. 반소의 신분이 야왕이라는 것도 잊은 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어, 반소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서렸다. 그 웃음마저 가비는 비웃음으로 보았지만.

혼자 전전긍긍하는 게 얼마나 재밌었을까.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게 얼마나 웃겼을까.

정말이지 취미 한 번 고약했다.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성격 참.”

혼잣말처럼 내쏜 말에 반소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네 놈이 좀 재밌어야지.”

사실이었다. 물론 가비 입장에서는 저를 두고 장난질을 쳤으니 약이 올랐겠지만, 실제로 약이 오르라고 한 짓이니 반소로서는 충분히 즐거웠다.

게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 불퉁하게 내뱉는 가비의 반말지거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네 놈은 그래야지.

살려달라 애원하지도 말고, 죽여주십사 무릎 꿇지도 말고.

신분을 막론하고 내게 불경하게 굴어야 네 놈답지.

어쩌면 가비에게 원했던 게 이런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반소가 거만한 태도로 누워서 침상 위를 툭 쳤다.

“올라와서 계속해라.”

“…싫다면?”

반소가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가비를 바라봤다.

“널 어찌할까. 천족에게 감히 불손한 너를.”

“불손하다니. 난 널 그렇게 대한 적이 없어.”

반소가 그렇듯, 가비 또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막상 들키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더는 비굴해질 필요도,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다.

“내가 불손했다는 걸 뭐로 증명할 건데.”

가비가 두렵지 않다는 얼굴로 방안을 둘러봤다. CCTV가 있는 것도,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널 아주 깍듯하게 대할 생각이야. 사람들이 있을 때만.”

가비가 보란 듯이 씨익 웃었다.

“내가 이래 봬도 모범생이거든.”

“…….”

“그런 나를 갑자기 불손하다 하면, 누가 믿어 줄까? 아마 막돼먹었다고 소문난 야왕의 말보다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내 말을 더 믿어줄 것 같은데.”

“…하, 하하.”

반소가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이리 크게 웃어본 게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저를 웃게 했다. 건방지고 되바라진 놈. 그런데도 영 밉지가 않았다. 화를 돋우지도 않았고. 되레 자꾸 말씨름이 하고 싶어졌다.

“네 말이 맞다. 내 말보다는 네 말을 더 믿겠지.”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니, 불경이 불경 같지 않고 불손이 불손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허나 네 놈의 정체가 분명치 않다면, 그건 그냥 둘 수 없겠지.”

그 말에 가비가 뜨끔, 찔린 표정을 지었다.

“넌 나한테 가족도 없다, 납치를 당했다고 했지. 그래놓고 서문에겐 약초꾼 할아버지가 있다고 말했고.”

“그건…,”

“게다가 같은 의학도 누군가에겐 가난한 집안에 장남이라고 말했다던데.”

가비의 입술이 벌어졌다. 마지막 얘기는 연화에게만 했는데 이걸 어찌 안 건지.

“그, 그게 뭐!”

“좋다. 집안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허면 천자가 금역으로 정해 놓은 경계를 넘어 귀물의 땅에 있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사실 경계를 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처벌을 받기에 충분했다.

“말해봐. 왜 그곳에 있었는지. 말도 안 되는 핑계 같은 건 대지 말고.”

반소가 한 걸음 다가가자, 가비가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크게 차이 나는 보폭으로 둘 사이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로 가까웠다.

반소가 가는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어제 가비를 알아본 순간, 바로 태황궁에 들어오게 된 경위부터 파악했다. 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장터에서 서문을 만나다니.

약초에 대해 해박한 건 둘째치고, 그날 그 장소에서 서문의 눈에 띈 것 자체가 그러했다.

“경계를 넘어 귀물의 땅에 들어가는 건, 파산을 앞둔 장사치나 보석에 눈이 먼 도적들이나 하는 짓이다.”

한 마디로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상황에 내몰려야 할 수 있는 짓이었다.

“그럼 너도 그중 하나란 뜻이겠지.”

“둘 다 아니야.”

“그럼 더 미심쩍을 수밖에. 네 놈 정체가.”

차갑게 가라앉은 반소의 눈동자가 가비를 직시했다. 가비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쳐다보며 따져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태황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네 놈 정체가 뭔지 탈탈 털어볼까 해.”

“뭐…?”

“요새 수도에 귀물이 출몰하고 있거든.”

“또 시작이네. 그놈의 귀물 타령.”

지긋지긋했지만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때 못 봤어? 놈들이 나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거. 네가 네 입으로 똑똑히 그랬잖아. 귀물들은 동족은 안 잡아먹는다며.”

목숨 건 방법으로 사람이란 걸 증명했다. 헌데 이제 와서 딴소리하는 까닭이 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 내가 그리 말했지. 허나 확신할 순 없다.”

귀물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거나 확신이란 걸 해선 안 됐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미지의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반인반귀인 반소와 귀물경비대가 궁에 기거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반쪽은 인간이지만 반쪽은 귀물인 그들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허나 보통의 인간보다 신체 조건이 월등하고 검술에 대한 습득력이 좋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중 천족의 피까지 물려받은 반소의 능력치가 제일 뛰어났고.

하여 반인반귀는 귀물을 사냥하는데 필요한 인재였고, 동시에 감시가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놈들이 활동을 멈췄다. 그 시기가 네가 궁에 들어온 시기와 맞물리고.”

“와- 진짜 미치겠네!”

“놈들은 계속해서 변이하고 변종 한다.”

지금까지와 달리, 동족을 먹지 않는다는 법칙마저 깨어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니 네 놈이 태황국 ‘사람’이란 걸 증명해 봐.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네놈이 태어난 기록과 살았던 흔적은 어디에라도 남아 있을 테니. 아무리 떠돌았다 해도 그 시작은 있을 것이 아니냐.”

가비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말도 없었다. 더는 거짓말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게 생겨서는, 침착하고 이성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놈을 상대로 저쪽 세계에서 온 가비가 방어를 한다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래. 실은 나 태황국 사람이 아니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해버렸다.

“이 나라. 아니,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저쪽 세계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왔어.”

반소의 눈가가 움찔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눈빛이었다.

“거봐. 못 믿잖아. 사실을 말해도 안 믿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미친놈이라고 생각해.”

“…….”

“정신이 해까닥 돌았다고 생각하라고.”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가비의 표정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려는 듯 보였다. 허나 아무리 꿰뚫어 보려 해도 쉽게 단정할 수가 없었다.

거짓과 진실을 떠나, 가비의 눈빛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 후, 반소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널, 내 옆에 둬야겠다.”

“뭐?”

“네 놈 정체가 무언지. 어떤 놈인지. 내가 곁에 두고 봐야겠어.”

정말 미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그도 아니면, 진짜 이쪽 세계의 태황국 사람이 아닌 건지.

해서 제게 이리도 무례하고, 불손하며, 대담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놈에게 이토록 흥미를 보이는 자신 또한.

“마음대로 해.”

가비가 답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존재로 오해를 받거나, 그도 아니면 경비대로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느니 반소의 지척에서 감시를 받는 게 훨씬 더 나은 일이었다.

“실습 장소로 계속 여기, 음궁으로 와라.”

“알았어. 그래 볼게.”

“시험에 붙어 어의가 된다면, 넌 음궁 주치의로서 일해야 한다.”

“붙기만 한다면야.”

“만약 떨어진다면 시종이 돼서 내 수발을 들어야 할 거야.”

“기필코 붙고 만다, 내가!”

가비가 결의를 다졌다. 곧 죽어도 시종이 되어 수발은 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가비가 턱을 치켜들며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럼 나 과제 좀 해도 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놓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좀 더 밟아달라면 밟아주고.”

대신 의학도로서의 책무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런 건 되었고.”

의외로 반소는 별말 없이 침상으로 돌아가 누웠다.

“그 향이나 태워봐라. 어제랑 같은 거로.”

반소가 팔베개를 한 채 눈을 감았다.

“내가 잠을 자야, 네 놈이 과제하기 편할 거 아니냐.”

“아.”

가비가 반색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그 길로 후다닥 약방으로 돌아가 향을 태울 도구와 과제가 든 봇짐을 챙겨서 돌아왔다.

잠시 후. 꽃잎을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롱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기름 냄새가 가신 자리로, 달큼한 꽃향이 퍼져나갔다.

가비가 힐끔 반소를 돌아봤다. 반소는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괜히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게 기분이 묘했다. 이 방법이 영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다.

부스럭부스럭.

가비가 조심스레 봇짐을 열어 과제 할 것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조용 먹을 갈고 염료를 부었다.

“…….”

반소가 눈을 뜨고, 가비를 바라봤다. 어느새 과제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등이 불편했다. 처음 느껴본 타인의 발, 그 말랑하던 살의 감촉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제 턱에 부딪혔던 녀석의 얼굴과 입술의 감촉도.

별거 아닌 일인데 별거인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묵직하게 뛰는 심장과 척추를 타고 오르는 이상한 전율 때문이었다. 그 감각이 녀석의 안마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낯설고 생경할 뿐.

한동안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반소의 눈길이, 다시금 가비에게로 향했다.

그 밤. 반소는 잠들지 않은 채 가비를 보았고, 가비는 꼼짝하지 않고 과제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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