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늦은 오후. 현은 오랜만에 천태비궁을 찾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건강이 좋지 못했던 천태비가 기력을 회복하여 뜰로 산책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천태비를 마주한 현이 살갑게 말을 건넸다.
“태어의 서문의 공이 큽니다. 귀한 탕약을 밤낮없이 달여 주었거든요. 덕분에 이렇게 천자의 얼굴도 보고 좋네요.”
태황국의 천족들은 기본적으로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주술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간혹, 천족이 아니어도 그에 흡사한 기운을 몸에 담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서문이 그중 하나였다.
그런 서문을 천태비는 일찌감치 알아보고 궁에 들였고, 서문은 자신의 능력으로 명의가 되어 ‘태어의’라는 호칭까지 하사받았다.
실로 서문은 원인 모를 병증을 치료하고 그에 쓰이는 약초를 찾아내서 연구한, 태황국의 일등공신이었다.
“날이 아직 찹니다.”
현이 제 겉옷을 벗어 천태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고마워요. 천자.”
둘은 나란히 앉아 뜰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천태비가 아련한 눈길로 속삭였다.
“이제 곧 겨울꽃이 아니라 파릇한 봄꽃이 피겠군요.”
태황국은 사시사철 푸르렀다.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었고 그중 봄꽃이 제일 아름다웠다.
오래전 봄꽃만큼이나 어여뻤다던 어머니의 얼굴을 현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도 여전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비록 모진 풍파를 겪고 황금 같았던 눈동자는 빛을 잃었지만, 그래서 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애틋하고 가련하여.
“탕약을 매일 드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서문이 올리는 탕약만이 천태비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허나 구하기 힘들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만하면 되었어요. 귀한 약초를 독식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인걸요. 그저 천태비라서 얻는 혜택일 뿐입니다.”
천태비가 먹는 ‘혈담초’는 재배가 불가하여 자연산으로 구해야만 했다. 서문의 명령으로 전국에 있는 약초꾼들이 어렵게 구해 들여오지만, 그 또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해서 병약한 몸이 한계까지 가야만 지금처럼 극약처방으로 먹을 수가 있었다.
현은 그런 어머니가 못내 안쓰러웠다.
“그나저나 천자.”
천태비가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실은 내가 어젯밤 하늘을 보았어요.”
“별점을 보셨습니까?”
천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독 밤바람이 청량하고 시야가 푸른 빛으로 트일 때, 천태비는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까만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전했다. 흘러들어온 기운은 짤막한 단어나 문장이 되어 천태비의 뇌리에 글을 새겼다. 하늘의 계시였다. 그것이 천태비가 가진 주술력이었으며 그녀가 천녀라는 증거였다.
“천자의 반려, 불로초의 별이 뜬 것을 보았답니다.”
그 말에 현의 눈이 커졌다.
“불로초의 별이요?”
“예. 아주 또렷하게 반짝였어요. 각성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허면 틀림없이 천자 앞에 나타날 거예요. 둘은, 하늘이 정해 놓은 운명이니까요.”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인간 불로초. 나의 짝이 될 여인.
“천자의 병증은 어떠합니까? 그날 이후, 괜찮던가요?”
그리고 나의 불치병을 고칠 단 하나의 존재.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흉일이었는데도 말입니까?”
“예.”
천태비가 흉일이라 말한 날은 어김없이 병증이 올라왔다. 피부가 타는 듯이 아프고 검붉은 얼룩이 드러났다.
그럴 때면 현은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가면을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림막을 세워놓고 사람을 대해야 했다. 가비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헌데 그 지독한 흉일이. 근래 들어 잦아진 그 지긋지긋한 흉일이. 이번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아가, 우리 천자.”
그런 현의 마음을 읽은 듯이 천태비가 손을 뻗어 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좋은 징조이니. 어미가 보기엔 반려가 나타날 거란 예시 같아요.”
천태비가 아이를 어르듯 현을 달랬다.
“허니 명심하세요. 꼭 불로초를 찾아 혼인해야 한다는 것을. 그럼 천자의 병증도 깨끗이 낫고 이 태황국도 영원히 태평성대 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때까지는 누구도 곁에 두어서는 안 됐다. 마음에 드는 시종이 있어 사내의 욕구를 풀지언정, 첩조차 두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일부일처. 오직 현의 짝은 불로초뿐이라고.
그렇게 얼굴도 본 적 없는 존재를, 현은 평생의 반려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기다려왔다.
어릴 때부터 인이 박이게 들어왔던 존재를 흠모한다 여겼다.
* * *
욱신-
두 손 가득 서책을 들고 가던 가비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가슴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며칠 전부터 무명천으로 꼭꼭 감싸놓은 가슴이 아리듯 아파 왔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은갑 군, 왜 그러는가.”
앞서 걷던 선생이 가비를 돌아보았다.
“아, 아닙니다!”
가비가 얼른 선생의 뒤를 쫓아 학당으로 들어갔다. 오늘 공부할 자료를 의학도들에게 차례로 나누어준 가비가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됐다. 선생이 준비된 약초들을 앞에 깔아놓고 가비를 불렀다.
“은갑 군 앞으로 나와보게.”
“예.”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 곁으로 다가갔다.
“병자의 검진표일세.”
가비가 그것을 빠르게 훑었다.
“주요 증상이 잦은 트림과 속쓰림인 것으로 보아 위장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검진표에는 병자의 얼굴 특색도 꼼꼼히 적혀 있었다.
“맞네. 이 병자에게 어떤 약초를 처방하는 것이 좋겠나.”
눈앞에는 수십 가지의 약초들이 놓여 있었다. 가비가 신중하게 몇 가지를 골라냈다.
“분배해 보게.”
가비가 어떤 것은 잎사귀만, 어떤 것은 줄기만 골라내어 적절한 양으로 다시금 솎아냈다.
선생과 의학도들은 가비의 조제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부드럽고 명확한 가비의 움직임만 이어졌다.
마침내 완성된 약제를 보고 선생이 입을 열었다.
“잘했네. 훌륭해. 허나 이것은 양을 좀 덜어야 하네.”
그러고는 특정 약초 중 하나를 들어 의학도들에게 보였다.
“위장이 안 좋은 병자에게 두루 쓰이는 기본적인 약초지만, 체질에 따라 구토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각별히 그 양을 정할 땐 좀 더 세심할 것을 명심들 하게.”
의학도들이 얼른 선생의 말과 약초의 이름을 서책에 적었다.
어의 시험은 수백 수천 가지의 약초와 그 효능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약초들을 병자들의 체질과 병증에 맞게 처방하여 조제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태황국의 어의들은 사람의 몸이 음양오행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여 먹는 것으로 병이 낫지 않으면 그 병은 고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식욕과 수면욕, 그리고 성욕이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욕구라 생각하고, 그것이 곧 건강의 기본 바탕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새로운 약초의 발견과 그 제조법, 그리고 다양한 체질에 관한 연구는 태황궁 어의들의 평생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의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네. 필기시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병자의 병증에 맞게 약초를 배분하여 조제할 줄 알아야 하네.”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적어도 여기 있는 은갑 군 정도는 되어야, 실기시험을 보는 게 수월할 것이야.”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가비는 다른 의학도들보다 배움의 속도가 빨랐다. 습자지가 물을 머금듯 쑥쑥 흡수해 나갔다.
서문과 어의들, 그리고 선생들이 티를 내진 않지만 그런 가비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의학도들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번 시험은 합격자의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네.”
이는 올해 정년으로 은퇴하는 어의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여 다른 해보다 시험은 어렵겠지만, 정원으로 인해 떨어질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허니 서로 견제하기보다는 모르는 게 있으면 상부상조하도록 하게. 의궁의 어의들은 무엇보다도 단합이 중요하니.”
“예!”
의학도들의 우렁찬 대답과 함께 수업이 종료됐다. 자리를 뜨지 않은 선생이 서안 위에 하얀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실습 장소의 명단을 새로 뽑아야 했다.
이내 새로운 명단이 꾸려졌다. 약초방과 약제실, 내약방과 병자실 등에서 일할 사람들이 정해졌고 남아 있는 빈칸은 양궁과 음궁에 있는 약방 숙직실뿐이었다.
빈칸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선생이 고심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듣자 하니 음궁의 주치의가 야왕께서 가비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했다. 너무도 이례적인 일이라 가비가 계속 음궁을 맡아주면 좋겠지만…, 그건 불공평한 처사였다.
모두가 어려워하고 꺼리는 일을 가비에게만 미룰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지원자도 없으니 그냥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수밖에. 결심한 듯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자 그럼, 이번 양궁 약방은 은갑이가 가고 음궁 약방은 겸복이가……,”
“선생님!”
그때 가비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래, 은갑 군. 말해보게.”
“이번 음궁 약방도 제가 가겠습니다.”
“뭐라?”
선생을 비롯한 의학도들의 시선이 전부 가비에게 쏠렸다.
“괜찮다면 시험 전까지, 제가 계속 음궁 약방으로 실습을 나가도 될까요?”
물론 원해서 하는 지원은 아니었다.
‘실습 장소로 계속 여기, 음궁으로 와라.’
순전히 반소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니 겸복이를 양궁으로 보내주시고, 저를 음궁으로 보내주십시오.”
“정말 그리하겠는가?”
“예.”
“허면 실습 장소가 고르지 못해 손해를 볼 터인데.”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개인 시간이나 왕창 가져서 신나게 공부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반소가 협력해 줘야 가능하겠지만.
“어차피 음궁 약방은 지원자도 없거니와 기왕이면 한번 가본 제가 계속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한편으론 가비의 행동이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했다. 선생이 감명받은 얼굴로 말했다.
“좋네. 그럼 내 태어의님께도 그리 보고하도록 함세.”
선생이 음궁 약방의 실습자 명단에 가비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그렇게 명단까지 마무리되자 수업은 완전히 끝이 났다.
가비가 서둘러 학당을 나갔다. 잠시 짬이 날 때 식당에 들러 이른 석식을 먹고 서고에 들려 책을 빌린 후, 봇짐을 챙겨 음궁으로 갈 생각이었다.
터벅터벅-
여러 발소리가 가비의 뒤를 따랐다.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학생 몇 명이 저만치서 옹기종기 모여 서성대고 있었다.
가비가 다시 걷자, 그들도 다시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비가 휙, 뒤를 돌아봤다.
깜짝 놀란 무리가 주춤대며 먼 산을 바라봤다.
“뭐야. 할 말 있어?”
따지듯이 묻자,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없음 말고.”
“자, 잠깐만!”
돌아서는 가비 앞으로 남학생들이 달려왔다. 잠자코 지켜보자, 살짝 멋쩍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며, 며칠 전 보았던 중간시험 말이야. 거기 2번 4번 문제 좀 물어봐도 될까?”
“저번에 했던 과제는 어떻게 한 거야? 정리를 되게 잘했던데.”
그걸 시작으로 별의별 질문들이 쏟아졌다.
암기를 잘하는 방법이 뭔지, 검진표를 보는 요령은 따로 없는지, 음궁 분위기는 어떠한지, 야왕님께 혼난 적은 없는지. 하물며 연화에게 고백을 받았던 일까지 물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가비에게 궁금한 것들이 참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물어보는 걸 보면.
질문이 잠시 끊긴 틈을 타, 가비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나 지금 석식 먹을 건데.”
“나도.”
“나도!”
그 말에 너나 할 거 없이 석식을 먹겠다고 나섰다. 그런 이들이 가비는 싫지 않았다.
은영을 비롯해 고3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들 각자의 고민과 불안을 안고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떠올라 영 밉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애틋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럼 밥 먹으면서 얘기할까?”
“그래!”
“좋아!”
가비를 따라 남학생들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겸복과 오정이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