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니.
방에 들른 가비가 서둘러 봇짐을 챙겨 음궁으로 향했다. 잠잠했던 생각들이 다시금 떠올라 머릿속을 부유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일이 생겼으면 진작 생겼겠지.
애써 찜찜한 마음을 떨구며 음궁 앞에 섰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보았던 보초병이 가비를 알아보고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못 본 척 그 곁을 쌩 지나쳤다.
여기 있는 자들이 귀물경비대인 걸 알게 된 이상, 그들과 얼굴을 맞대거나 말을 섞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오오! 은갑 군 왔는가!”
약방으로 들어서자 주치의가 반색하며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호출이라니요?”
가비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업무 일지부터 약초의 재고 파악과 꽃잎을 사용하고 태운 내용까지. 확인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딱히 호출을 당할만한 일은……,
“야왕님께서 자넬 찾으시네.”
“예에?”
순간 잘못들은 줄 알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갑 군이 일하는 게 썩 맘에 드신 모양이야. 의학도를 이리 직접 찾으시는 건 처음 있는 일일세.”
주치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가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왜 절…, 제가 뭘 해드린 것도 없는데….”
당황스러워하는 가비와 달리 주치의는 신이 난 얼굴이었다.
“오늘 일은 내가 태어의님께 잘 보고하겠네. 기왕지사 나도 함께 있고 싶지만, 야왕님께서 자네 한 명으로 충분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주치의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럼, 오늘도 수고하게.”
봇짐을 둘러멘 주치의가 나가려다 말고 가비를 돌아봤다.
“아차차, 은갑 군!”
“예?”
“얼굴이 왜 그런가. 일단 그 얼굴부터 좀.”
“……?”
주치의가 얼굴을 문지르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급히 약방을 나갔다.
결국, 가비 혼자 텅 빈 약방에 남았다. 주치의가 남긴 말을 곱씹어 볼 새도 없이 멍한 눈을 들어 약방 안을 둘러봤다.
약방 한쪽에 마련돼 있는 숙직실의 포근한 침상이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달린 은색 종만 보일 뿐.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분명했다.
그럼 나 오늘 실습만 두 탕 뛰는 거야?
어이 상실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루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된 기분이랄까?
가비가 진이 빠진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날 부른 건지, 이유가 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야왕이었다. 귀물경비대의 경비대장이자 천자의 형인 야왕.
가비가 자포자기한 얼굴로 가져온 봇짐부터 열었다. 주섬주섬 과제를 꺼내는데,
딸랑딸랑딸랑-
인정사정없이 종이 울렸다. 마치 가비가 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아-”
그럼 그렇지.
책을 내려놓은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옆방, 반소의 침소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들어와라.”
가비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행히도 방 안 분위기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어둑하고 조용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일부러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물었다.
“혹시 수면초를 바라시는 거면 정량을……,”
“됐고.”
반소가 말을 잘랐다.
“가서 찜질할 것을 가져오너라.”
아무래도 오늘은 불면증이 아니라 근육통인 모양이었다.
“준비해 오겠습니다.”
가비는 군말 없이 대답했다. 마음이 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과제는 다른 과제와 결이 달랐다. 적긴 하지만 어의 시험에 점수가 반영됐다.
만약 어의가 된다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약초 스무 가지를 정해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의 효능과 부작용, 다른 약초와의 응용 방법까지 기록하는, 한마디로 본인의 이름으로 된 최초의 약초도감을 만드는 일이었다. 가비는 그것을 제대로 완성하고 싶었다.
약방으로 돌아온 가비가 뜨끈한 물 한 동이와 두툼한 수건을 준비했다. 그리고 찜질 효과가 있는 복령초와 깨끗한 면포까지 챙겨 반소의 침소로 향했다.
다시 들어갔을 때, 반소는 상의까지 탈의한 채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깨와 허리 쪽이 심히 결리는구나.”
천족의 맨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건 그와 동침하는 여인과 지정된 남자 어의들뿐이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혈액의 순환을 돕는 일은 어의 중에서도 말단이 하는 일이었다.
사실 말이 거창하지 저쪽 세계로 따지면 전신 마사지를 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손을 걷어붙인 가비가 뜨끈한 물에 수건을 적셨다.
첨벙첨벙-
마음이 급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동작에 힘이 실렸다.
“행동이 경박한 것인지, 정성이 없는 것인지.”
놓치지 않고 반소가 느른하게 내쏘았다.
“둘 다, 어의 될 자의 마음가짐은 아닌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실과는 달랐다.
“행동이 급한 것이지, 정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곧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넌 지금 내게 불만이 있고.”
“불만은 그저 개인의 문제일 뿐 행동으로 연결 짓진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의 될 자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면 안 되니까요.”
양동이에 수건을 푹 담가놓은 가비가 이번엔 복령초를 갈기 시작했다. 다른 약초의 액을 조금씩 섞어 반죽처럼 차지게 만들었다.
“역시 네 놈은 말대꾸가 제일 큰 재능이구나.”
“말대꾸가 아니라…,”
울컥한 가비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다 흠칫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반소와 제대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놀란 가비가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꼭 자신이 돌아보길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설마 날…, 알아봤을까?
불안한 마음에 눈동자를 굴리는데,
“…쿡.”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큭큭큭.”
뭐지?
“큭,…하하!”
별안간 반소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뜬금없는 상황에 가비가 두 눈을 깜빡였다.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뭐 때문에 웃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 저를 본 후에 터진 웃음이었으니까.
“너 그 꼴이…,”
반소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설마 그 꼴을 하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그 꼴?
그제야 가비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경직된 가비의 등에서 의아함을 읽었는지 반소가 명경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던가.”
눈치를 살피던 가비가 조심스레 일어나 명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달빛이 비치는 창가 앞. 초롱불이 놓인 명경 안에 가비의 모습이 환히 비쳤다.
“…허업!”
가비가 입을 막으며 놀랐다. 얼굴이 난장이었다. 누군가가 잠자는 사이에 먹으로 그림이라도 그린 듯 난리였다. 특히 볼과 턱이 심했다.
가비가 서둘러 옷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제야 보초병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나가려던 주치의가 왜 얼굴을 가리켰는지 알 것 같았다.
아씨, 쪽팔려.
얼굴을 빠르게 문지르는데,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기척을 느낀 가비가 옆을 돌아보다 화들짝 놀랐다.
언제 다가온 건지 반소가 서 있었다. 가비가 물러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얼룩 고양이도, 너보단 낫겠다.”
웃음기가 다분한 목소리였다. 가비가 숨을 죽인 채 입술을 꾹 물었다.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됐다. 눈을 마주쳐서도. 그랬다간 자신이 누군지 들통날 게 뻔했다. 창가 앞은 너무도 밝았다.
첨벙-
물소리가 났다. 가비가 눈을 들지도 못한 채 바닥에 비친 반소의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리고-
흠칫.
따뜻한 무언가가 가비의 뺨에 닿았다. 물에 담가놓았던 수건이었다.
반소가 아주 느리게, 수건으로 가비의 뺨을 문질렀다. 달빛 아래 비친 하얀 뺨 위로 먹물 자국이 선명했다.
“이리 닦아야 지워지지.”
“제, 제가 하겠습니다.”
가비가 수건을 낚아채듯 빼앗아서 뒤돌아섰다. 그리곤 벅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다 가죽까지 벗겨질라.”
놀리는 듯, 아닌 듯. 묘한 말투였다.
침상에 다시 가서 누운 반소가 나직이 명령했다.
“다 했으면 와서 좀 주물러라.”
“…주물러요?”
반소가 두 번 말하기 귀찮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제 등을 가리켰다.
가비가 쭈뼛거리자, 눈을 감으며 툭하니 내뱉었다.
“이러다 밤 새겠군.”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잊고 있던 과제가 생각났다. 오늘 중으로 끝내려면 빨리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이건 일이야. 남자 몸에 손을 대는 게 아니라고.
마음을 먹은 가비가 반소 곁으로 다가갔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남자의 다부진 상체가 보였다. 군살이라곤 한 점도 없는 완벽한 몸이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지?
막상 만지려니 난감했다. 남자의 벗은 몸을 실물로 본 적도 없거니와, 만져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할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본 것이 고작.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채 망설이는 게 느껴졌는지, 반소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왜. 날 만지면 액운이라도 붙는다더냐.”
“그게 아니라….”
“허면 손을 대지 않는 이유가 무어냐.”
방금까지 나른했던 음성에 뾰족하게 날이 섰다. 가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소가 가비에게 흥미를 느낀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한 것.
그게 비록 무지에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그랬다. 헌데 그런 가비 역시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몹시도 불쾌했다.
네 놈은 그런 놈이 아니지 않나.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놈이 자신을 편견 없이 대했던 건, 자신이 야왕이란 사실을 몰랐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놈에게 무얼 기대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왕’이란 호칭이 주는 거부감마저 타파해주길 바랐던 건가.
“저 그럼……,”
그때 가비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 가비가 서둘러 신발과 버선을 벗었다. 그리고 훌쩍 침상 위로 올랐다.
“너 지금…, 흡!”
반소가 숨을 삼켰다. 가비의 발이 등을 밟았기 때문이다. 가비가 반소의 등 여기저기를 발로 밟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발로하는 게 더 시원할 것 같아서요.”
“뭐?”
반소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가비가 어깨 쪽을 밟아 눌렀다.
“여기가 결린다고 하셨죠?”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반소가 일어나는 것을 막았다.
…하.
가비의 의중을 알아챈 반소가 실소를 흘렸다.
“감히 날 밟아?”
“밟는 것이 아니라 안마입니다. 안마.”
가비가 시침을 뚝 떼고 말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손이 아니면 발로 하면 되는데.
그게 더 안전하고 편한 방법이었다.
“와, 여기 엄청 뭉쳤네요.”
조금은 서늘하고 말랑말랑한 발바닥이 반소의 등줄기를 꾹꾹 눌렀다. 굳은살투성이인 반소의 발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마치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고운 발 같았다.
“…읏.”
반소가 낮게 신음했다. 등허리 아래쪽을 밟자 유독 시원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뱉으며 팔뚝에 턱을 괴고 명령했다.
“더 아래.”
“더 아래요?”
가비의 발이 조금 더 내려갔다.
“더 내려가라. 더.”
“더요?”
더 가면 엉덩인데.
가비가 방금과 달리 발을 꼼질꼼질 하며 내려가길 주저했다. 발가락이 꼼지락대는 느낌에 반소가 흠칫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것이냐.”
“그게 더 내려가면….”
가비가 우물쭈물 발가락을 오므렸다. 간지럼을 참지 못한 반소가 뒤로 손을 뻗어 가비의 발목을 낚아챘다.
“…엇!”
중심을 잃을 가비가 반소 위로 엎어졌다.
퍽-
단단한 무언가에 얼굴을 부딪쳤다.
“…으으.”
가비가 앓는 소리를 내며 더듬더듬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갑자기 잡으시면 어쩝니까!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다가 숨을 삼켰다.
…헉!
반소의 두 눈이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그제야 가비는 자신이 반소를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두 손으로 짚은 것이 반소의 가슴팍이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