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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18화 (18/95)

[18화]

수도에 귀물이 출몰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매우 잠잠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반소와 귀물경비대가 수도 ‘온’으로 돌아온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랬다.

혹여 그걸 구분할 줄 아는 놈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귀물과 정(情)을 통하는 자들이 있었다. 극소수였지만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귀물경비대였다.

반소처럼 모두 아비는 귀물, 어미는 인간인 반인반귀.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반소는 정을 통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약탈이자 수탈의 원치 않은 결과일 뿐.

반소가 처소로 들어서자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휘익, 휙- 그가 벗어던지는 옷가지를 빠르게 주워 올렸다.

이내 알몸이 된 반소가 목간으로 향했다.

풍덩-!

넓은 욕통으로 뛰어들었다. 출렁이던 물이 잠잠해지고, 긴장으로 팽창되어 있던 근육들이 따뜻한 물에 노곤하게 풀렸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피로가 덜했다. 방안을 은은하게 풍기던 향기가, 잠시나마 반소에게 잠을 주었다. 고작해야 두어 시간 정도였지만 간만에 잠다운 잠을 잤다.

문득 곤히 자던 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가락으로 튕겼을 때의 그 말랑하던 뺨도.

사내자식이.

같잖게도 고왔다. 알기로 의학도들의 하루는 빡빡하고 길었다.

잠잘 시간을 제외하면 수업과 실습, 복습과 과제로 짜여 있었다.

여인들도 버텨내는 그것을, 사내인 녀석이 버텨낼지 궁금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촤악-

따뜻하던 물이 미지근해질 때쯤 욕통 밖으로 나왔다. 보통은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물기를 닦아주고 자리옷을 걸쳐주는 것이 당연했지만 반소는 그것을 싫어했다.

누군가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불쾌했다. 자신을 대하는 상대방들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기피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그런 자들이 역했다. 허니 상종을 안 하는 게 서로 편한 일.

저벅 저벅 저벅.

젖은 몸에 얄팍한 겉옷만 걸친 채 침소로 향했다. 밖에 서 있던 시종들이 바닥에 떨어진 물을 닦아내느라 바빴다. 시종관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석반은 어찌 올릴까요? 말씀하여 주시면…,”

“다른 건 됐고, 고기만 구워 올려라.”

“예.”

하명을 받은 시종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침소로 들어간 반소가 깨끗하게 개어진 면포로 젖은 머리를 털었다.

무심코 돌린 시선에 가비가 엎드려 자던 탁자가 눈에 걸렸다.

지난밤, 마른 꽃잎과 향을 태운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깨끗했다.

문득 수면초에 취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던 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야. 인정머리 없는 싸가지.’

처음 듣는 반말지거리에 불손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그런 놈이 왜, 어제는 얼굴 한번 돌리지 않았던 걸까. 자칫 반소가 눈치채지 않았다면 녀석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뻔뻔하게 말대꾸를 하는 놈이, 왜 저와 얼굴 한번 눈 한번 마주치질 않았을까. 마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처럼. 설마…….

반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저 날 알아본 건가?”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져, 가비의 경직됐던 뒷모습에 이유를 붙여주었다.

“하. 그랬단 말이지.”

만약 그렇다면 제법 깜찍한 구석이 있었다.

흘깃, 침상 쪽을 바라보던 반소가 머리맡에 있는 줄을 세차게 당겼다.

딸랑딸랑-

“부르셨습니까-”

그러나 기대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침소 문을 열고 등장한 이는 건방지고 맹랑한 녀석이 아니라, 늘 약방을 지키는 자신의 주치의였다.

“왜 네가 들어오느냐. 그 의학도 놈은.”

“의학도라면, 어제 그 실습을 나왔던….”

반소가 대답 없이 노려보자, 주치의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약제실로 배정을 받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배정을 받아? 누구 마음대로.”

보통 음궁 약방으로 실습을 나오면 꼬박 며칠은 붙박이였다.

“그, 그것이 태어의 서문의 명으로…….”

평소 관심도 없던 의학도의 행방을 느닷없이 캐묻자, 주치의는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됐고. 놈을 불러와라.”

“예?”

“넌 꺼지고, 그놈을 부르라고.”

자칫 이유를 물었다간 경을 칠 태세였다. 주치의가 곧장 그리하겠다며 물러갔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반소가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자신을 먼저 알아봤는지 아닌지는 오늘 보면 알 일이었다.

이제 곧 보게 될 가비의 반응이 사뭇 기대되었다.

* * *

하루 업무를 끝낸 현의 발길이 서고로 향했다. 평소에도 서고를 즐겨 찾는 편이었지만 요샌 매일 들렀다. 가비 때문이었다.

책상에 앉은 현이 책장에서 고른 책을 펼쳤다. 오늘따라 서고가 지나치게 고요했다. 결국, 얼마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시선이 입구 쪽을 향했다.

오지…, 않으려나?

어제 음궁에 갔을 가비는 하루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장곡에게 물었더니 오늘은 음궁 말고 약제실로 배정 받았다고 했다.

해서 기다려졌다. 혹시나 오지 않을까 하여.

몇 번이나 보았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는 아이였다. 귀여운 남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 그것과는 조금 더 다른 기분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내 가비에 대한 미련을 떨치며 서고 뒤편, 양궁으로 향하는 기다란 아치형의 다리를 건넜다.

처소로 들어서자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따랐다.

목간으로 들어가 두 팔을 벌리자 겉옷부터 차례차례 벗겨내기 시작했다.

알몸으로 욕통 안에 들어가니 부드러운 천이 현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냈다. 마른 듯 탄탄한 허벅지 사이를 닦아내던 여시종의 얼굴이 살포시 붉어졌다.

현이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이가 어찌 되느냐.”

여시종이 놀란 얼굴로 현을 보았다가 재빨리 눈을 내렸다.

“올해로 스물입니다.”

소녀와 여인 사이를 경계 짓는 나이였다.

은갑이도 약관, 그러하지.

비록 사내라고는 해도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목욕을 마친 현이 욕통에서 일어나자 시종들이 재빨리 마른 천으로 꼼꼼히 몸을 닦았다.

자리옷까지 완벽하게 입혀준 뒤 한걸음 씩 물러났다.

“석반을 드실 시간입니다.”

방으로 들어가니 탁자 위에 따뜻한 석반이 차려져 있었다. 현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식단이었다. 현은 그것을 군말 없이 먹었다. 기억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완벽한 일상.

자의든 타의든 천자라는 위치는 그런 것이었다.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그 또한 제 손이 아니라 남의 손이 해주는 걸 받기만 하면 되는 자리였다.

“아까 그 아이를 불러올까요.”

식사를 하는 내내 석상처럼 곁을 지키던 장곡이 넌지시 물었다.

‘그 아이’라 함은 은갑이가 아니라, 아까 목욕 시중을 들던 여시종을 말하는 것이었다.

현이 한마디라도 말을 건넸으니 장곡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됐다.”

식사를 마친 현이 이를 닦은 후 입을 헹궜다. 그리고 외출할 옷을 가져오라 일렀다.

“곧 잠자리에 드실 시간입니다.”

일어나는 시간처럼 자는 시간 또한 정해져 있었다. 여인을 품을 때만 예외였다.

“멀리 가지 않을 것이야. 시간 내로 돌아올 것이다.”

현이 걱정 말라는 듯 장곡을 돌아보며 말했다.

“허니 넌, 오십 보 밖에서 따라오너라.”

* * *

술시(戌時:19시~21시)가 되면 의궁은 출입을 금했다.

누군가가 들어오려면 상사에게 받은 허가증이 있어야 했고, 그도 아닌 비상시에는 어의들만 오갈 수 있었다. 이유는 의궁 안에 있는 각종 귀한 약초들 때문이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간혹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시종들이 의궁에 침입해 귀한 약초를 훔쳐 가는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것은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려운 것들이기에 반출입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진통, 해열, 찜질제가 하나 둘…,”

초롱불이 밝혀진 약제실.

가비가 열심히 조제된 약의 재고를 파악했다. 이미 함께 있던 어의들은 모두 퇴근했고, 약제실엔 가비 혼자였다. 얼추 일이 끝났으니 이제 맘 편히 과제 하는 일만 남았다.

기록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정리하는데,

뚜벅-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약제실의 후문 쪽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구…세요?”

설마 도둑일까.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붓을 꽉 움켜잡았다.

“혹시 장 어의님이세요?”

장 어의는 방금까지 가비와 함께 있던 어의였다.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가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부딪칠 뻔한 가비의 어깨를 움켜쥐며 현이 미소 지었다.

“사서님?”

가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놀란 얼굴로 현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았다.

“혼자 오신 겁니까? 허가증도 없이요?”

“여기 오면 은갑이 널 볼 수 있다기에.”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린 가비가 초조한 얼굴로 정문 쪽을 돌아봤다. 이제 곧 담당자가 순찰을 돌 시간이었다.

“아니 왜 하필 지금…. 오실 거면 낮에 오시지.”

타박 아닌 타박을 하며 가비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바람에 붓을 쥐고 있던 손에서 먹물이 묻어났다.

“은갑아, 너-”

얼룩덜룩한 턱 주변을 보며 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비는 지금 제 얼굴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발뺌이 어려웠다. 허가증도 없이 약제실에 들어온 현도, 그런 현에게 문을 열어줬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 가비도, 둘 다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착각하신 모양인데 이러다 걸리면 정말 큰일 납니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실까요?”

그제야 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저 잠깐 보고 가려던 것이 가비를 곤혹스럽게 한 모양이었다. 장소가 어디든 시간이 몇 시든, 음궁을 제외한 태황궁 어디라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지만 가비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가비의 얼굴을 보겠다는 마음만 앞서 그 사실을 간과했다.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더 있다간…,”

“야, 은갑!”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가비를 불렀다. 오정의 목소리였다.

“너 호출이야! 당장 음궁으로 가봐!”

말만 전한 목소리는 이내 멀어졌지만, 가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호출?

가비가 재빨리 현을 돌아봤다.

“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서님도 어서 가세요.”

후문 쪽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가비가 현을 다급하게 떠밀었다.

“시간 되면 서고로 갈게요. 빌려야 할 책이 있거든요. 그럼!”

인사를 전한 가비가 서둘러 약제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의 얼굴이 조금 미묘해졌다.

심장이 이상했다.

두근두근.

마치 낙인이라도 찍힌 듯 가비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홧홧했다. 가슴이 크게 일렁였다. 아무래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욕구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천태비와 서문이 이르길, 주기적인 잠자리가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거늘. 바쁜 정사(政事)로 인해 마지막 잠자리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장곡.”

“예. 천자님.”

오십 보 밖,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장곡과 시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말한 그 아이, 침소로 들이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깊게 가라앉은 현의 눈빛이 가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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