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5화 (5/95)

[5화]

야영 장소로 돌아오자, 막사 밖으로 반소가 나와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뜨끔했지만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반소가 부하를 따라 걸어가는 가비에게 시선을 두었다.

“다른 때보다 이른 환궁이긴 하지만 상관없을 듯합니다.”

그때, 귀물경비대의 우대장을 맡고 있는 풍이 말을 건넸다. 풍과 곤은 상반된 성격으로 반소를 보필하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귀물들의 출몰이 적기도 하고,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청소가 된 셈이니까요.”

일 년 중에 절반. 귀물경비대는 이곳 북쪽 땅의 경계에서 생활했다.

귀물들이 활개를 치는 시기가 초가을부터 초봄까지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 번 정리를 해주면 남은 반년은 별 탈 없이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틀 전, 천자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당장 수도로 돌아오라는.

“수도에 나타났다는 귀물이 보통 놈이 아닌가 봅니다.”

철통같이 경계를 지켜도 꼭 한두 마리씩 마을로 넘어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헌데 이번엔 그것이 수도로 간 모양이었다. 반소가 경계를 지킨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설마, 우리가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경계를 넘다니. 말도 안 되지.”

곤이 콧방귀를 꼈다.

귀물경비대는 태황국에 있는 보통 경비대와 달랐다. 인간보다 뛰어난 체력과 기민한 신경이 발달해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숨어 살다가 새끼를 깐 놈일 거야.”

기록서에 보면 간혹 그런 경우도 있다 하니 영 허튼 추측은 아니었다.

“그런 놈치곤 지독하다. 인간의 살가죽만 벗겨 먹다니.”

“우웩-”

곤이 역겹다는 듯 풍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덩치와 달리 비위가 참 약했다.

아마도 젊은 여자와 아이들이 놈의 먹잇감인 듯했다.

최근 두 달 사이, 세 명의 처자와 두 명의 아이가 당했다고 하니.

어쨌든 태황국의 경비대인 주경대와 야경대가 밤낮으로 나뉘어 수도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그들만으론 역부족인 듯했다.

하긴. 사람은 사람이 상대하고, 귀물은 귀물이 상대해야 하는 법.

귀물경비대의 전원은 반은 사람, 반은 귀물인 반인반귀였다.

수장인 반소까지 포함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도로 돌아간다.”

잠자코 있던 반소가 입을 열었다.

“드물긴 하지만 사람만큼 영악한 놈들도 있어. 그런 놈들이 같은 동족을 노예처럼 부리면 일이 더 복잡해진다.”

그 말에 곤과 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가비가 바라봤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반소를 제외하고 꽤 심각한 표정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선 가비가 이상했는지, 앞서 걷던 남자가 가비를 돌아봤다.

시선을 느낀 가비가 ‘아차’한 얼굴로 재빨리 남자를 따랐다.

어쨌든 좋아. 주요 인물 세 명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있고, 나머지 무리는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나 팔씨름 등을 하며 놀고 있었다.

기회야.

저녁을 준비하는 모닥불 옆을 지날 때였다.

가비가 손에 쥐고 있던 수면초 덩어리를 던졌다.

작게 뭉친 덩어리 중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몇 개는 끓고 있는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됐어!

수면초는 곧 정체 모를 육수 속으로 사라졌다.

저 정도면 충분해.

약초도감에 따르면, 수면초는 작은 이파리 하나를 빻아서 차에 타 마셔도 하룻밤을 곤히 잔다고 했다.

저 정도 양이면 못해도 1박 2일은 숙면감이었다. 죽는 것도 아니고 잠 좀 자는 건데 뭐 어때.

물론 날이 좀 춥긴 했지만 다들 두툼하게 챙겨 입었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추위로 따지자면 가비 자신이 시급한 상태였다. 더럽혀진 옷이 채 마르지 않아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자, 네 몫이다.”

저녁 식사 시간. 아까 가비를 풀숲으로 데려갔던 남자가 음식이 담긴 그릇 하나를 가비 앞에 내려놓았다.

음식을 떠먹는 도구는 따로 없었다. 부러트린 나뭇가지 두 개가 전부였다.

“먹여줄 거야?”

가비가 묶인 몸을 보란 듯이 힐끗대며 물었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반소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나무에 묶여 있던 몸이 풀려났다. 하지만 손과 발은 여전히 묶인 채였다.

가비가 묶인 손으로 나뭇가지를 들어 그릇 안에 있는 음식물을 휘휘 저었다.

나뭇가지 끝에 혀를 대보더니 질색한 얼굴로 퉤, 뱉어 버렸다.

“안 먹어. 맛없어.”

그릇을 밀쳐내자 저만치서 바라보던 곤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주 배때기가 불렀구만.”

그런 말을 하거나 말거나, 반찬 투정하는 어린아이처럼 돌아앉자 남자가 난감한 얼굴로 그릇을 치웠다.

굶어봤자 네 손해라는 듯, 반소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곤이 쉴 새 없이 흉을 봤다.

“사내놈이 말이야,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쩍 말라서는 편식이나 하고. 누가 보면 귀한 분 모셔가는 줄 알겠어.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귀한 분이라.

그 말에 반소가 속으로 웃었다. 상황과 어울리진 않았지만, 녀석의 생김새로만 보면 그럴싸한 말이기도 했다.

어쨌든 생긴 건 곱상한 샌님처럼 생겼으니.

반소가 묵묵히 육수에 삶아진 고기를 뜯을 때였다.

“후아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풍이 갑자기 크게 하품했다. 그러곤 민망한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했다. 반소보다 앞서, 이미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참이었다.

“죄송합니다, 반소님. 저도 모르게 그만….”

상관없었지만 별일이었다. 곤이라면 모를까, 풍은 결코 반소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심히 곤합니다. 반소님께선, 괜찮으십니까?”

한마디 묻던 풍이 다시 한번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풍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곤도 졸음이 그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반소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닥불에 둘러앉은 모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반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읏.”

순간 다리가 휘청하며 머리가 어질했다. 이건 보통 수마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반소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것도 잠시 이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후우, 훅-,”

호흡을 정돈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삐딱해진 시야로 나무 앞에 앉아 있는 가비의 모습이 보였다.

잊고 있었다. 녀석만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타닥타닥-

시끌벅적하던 주변은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모두가 쓰러진 걸 확인한 뒤에야 가비는 움직였다.

이엉차-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묶인 두 발로 쿵쿵 뛰어서 반소 앞까지 다가왔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가비가 반소를 내려다봤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너…!”

가비가 반소 옆에 놓인 반월도로 다가가 손발이 묶여 있는 밧줄을 슬금슬금 갈았다.

툭-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으으.”

가비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반소가 바라봤다.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치켜뜬 꼴이었다.

“야. 인정머리 없는 싸가지.”

그 말에 짙은 회색 눈이 느리게 반응했다. 반소의 동공에 가비가 담겼다.

“내 이름은 은가비야. 똑똑히 기억해. 언젠가 다시 보게 되면, 네 놈 뒤통수를 칠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가비가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한참을 살펴보다가 방향을 정했는지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

반소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러나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뒤늦게 몰려온 수마가 그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가비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내 가물거리는 시야 끝으로 가비의 뒷모습이 맺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다행스럽게도 가비는 방향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길눈이 밝은 편이었다.

그저 직감만으로 가비는 그들이 빠져나왔던 귀물의 땅, 검은 숲과 반대되는 길로 나아갔다.

축축하고 습한 공기를 등지고 청량하고 맑은 공기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어우, 추워.”

가비가 어깨를 쓸어올리며 몸을 떨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리자 바람이 한층 싸늘해졌다.

반소가 있던 무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랬다.

냇가를 발견한 가비가 그곳에 멈춰 더러워진 얼굴을 씻었다.

물이 닿은 곳마다 얼어붙을 것 같았다.

“…으, 손 시려!”

세수를 마친 후 빨개진 얼굴로 다시 길을 걷는데 뒤에서 타박타박,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가 수레를 끄는 말을 보고 다시 나왔다.

“저기요!”

급히 수레 주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만요! 도와주세요!”

멀찍이서 보면 거지꼴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나마 말끔한 편이었다.

고민하던 주인이 가비 앞에서 수레를 멈추었다.

“무슨 일이오?”

“제가 사정이 있어서 동료들과 떨어지게 되었는데…, 가는 곳까지 태워다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은커녕 풀벌레 한 마리도 구경 못 한 채 한적한 길을 걸었다.

와중에 만난 수레 주인은 더없이 반가운 사람이자 이곳을 벗어날 이동수단이었다.

가비를 위아래로 살펴보던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헌데 꼴이 왜 그 모양이야. 혹시 귀물이라도 만난 거요?”

“…예! 경계 근처까지 갔다가, 귀물을 만나서 간신히 도망쳤거든요.”

반소에게 들었던 ‘경계’와 ‘귀물’을 운운하며 가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쯧쯧쯧. 요새 먹고 살기 힘들다고 경계를 넘어가는 작자들이 있다더니.”

주인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값비싼 진주랑 보석이 있다고 한들 뭐하나. 괜히 천자님께서 금역으로 정하셨겠어? 어리석긴.”

말을 들어보니 그 땅이 확실히 금지된 구역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반소라는 녀석이 나한테 그렇게 쌍심지를 켜고…,

“아무튼 나도 갈 길이 바빠서 그냥 태워줄 순 없고…,”

주인이 무언가 요구하는 눈으로 가비를 훑어봤다.

중년 남자의 야릇한 눈빛에 가비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허튼짓을 하면 급소를 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자 민망한 오해였다. 주인 역시 반소무리처럼 가비를 여자가 아닌 사내로 보고 있었다.

“비리비리한 게 힘도 영 못 쓸 것 같고,”

주인이 선심 쓰듯 말했다.

“그 신발하고 옷. 그건 어디서 온 건가? 혹시 바다 건너 ‘영’에서 왔소? 거긴 온갖 별스러운 게 많다던데.”

가비가 얼른 신발을 벗어 보였다. 안에 털이 든 운동화였다.

“맞아요. …바다 건너 ‘영’에서 온 거. 가는 곳까지 태워다주시면 이 신발 드릴게요. 깨끗하게 빨아서 말리면 쓸만할 거예요.”

당장 맨발이 될 걸 각오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제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신발은 그렇다 치고, 그 옷은.”

주인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가비의 후드티를 가리켰다.

…하아.

한숨을 삼킨 가비가 눈을 들었다. 안에 긴 팔 티셔츠를 두 개나 입었으니까. 그래, 좋다.

“콜!”

“뭐? 콜?”

“준다고요. 이 옷까지.”

말을 마친 가비가 수레 위로 올라 주인 옆에 턱 앉았다.

주인이 엉덩이를 물리며 가비를 바라봤다. 냄새가 좀 나는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가비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가요. 옷은 도착하면 줄 테니까.”

그제야 ‘크흠’ 헛기침을 한 주인이 말고삐를 당겼다. 수레가 출발했다.

오랜 시간 걸었더니 이 수레 하나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문득 도심에 있던 버스와 지하철이 그리웠다.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중요한 건 방법을 찾으려면 사람이 더 많은 곳, 어떤 것이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어디까지 가세요?”

문득 주인의 목적지가 궁금해졌다.

“난 ‘온’으로 가는 길이오. 왜? 가려는 방향이 아니야?”

“아니요. 가요. ‘온’까지.”

어딘지는 몰랐지만 수레를 보아하니 온갖 물건을 싣고 있었고, 그렇다는 건 가비가 바라는 대로 사람이 많은 곳으로 향한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반소라는 녀석이 말했던 수도만 피하면 될 일 아닌가.

녀석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반소가 말했던 수도가 ‘온’이라는 걸, 가비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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