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4화 (4/95)

[4화]

결국, 반소마저 사라지고 가비는 홀로 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무에 매달린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묶인 손발은 감각이 둔해졌고 어깨는 빠질 듯이 아팠다.

“…이 미친놈들아!”

고함을 버럭 내질렀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가비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이곳에 와서 처음 눈떴을 때처럼 잿빛이었다. 하지만 바닥은 진창이 아니었다.

이곳은 메마르고 삭막한 숲이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와 시커멓게 죽은 풀숲이 가득한.

귀물의 땅.

그들이 말하는 귀물의 땅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대체 언제까지…,”

날 이렇게 놔둘 건데.

“이 정도면 믿어줘야 하는 거 아냐?”

지친 목소리가 힘없이 사그라졌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귀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지 기약조차 없었다.

“하아….”

식은땀이 솟고 목이 말랐다. 더는 한계였다.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파스락-

그때, 검은 풀숲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가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소리가 난 곳을 주시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설마 날 두고 내뺀 건 아니겠지?

불현듯 공포가 엄습했다. 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카락이 삐죽 섰다.

아니면 왜 다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건데.

자신을 내려다보던 무심한 반소의 눈이 생각났다.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두고…,

파스락-

이번엔 다른 곳에서 소리가 났다. 가비가 휙, 고개를 돌려 소리 난 곳을 바라봤다.

뭐가 있는 건가? 여긴 바람 한 점 없는데….

가비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파스락, 파스락-

간을 보듯 잠깐씩 흔들리던 검은 풀숲이 돌연 무언가로 요란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이마에서 시작된 땀방울이 가비의 뺨을 타고 흘렀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척들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빼꼼.

풀숲 사이로 길고 삐죽한 것이 올라왔다.

가비가 가는 눈을 떴다.

…더듬이?

파삭파삭-

답을 확인시켜 주듯 풀숲을 가르며 거대한 개미들이 튀어나왔다. 아니, 개미가 아니라 개미를 닮은 귀물들이었다.

“미, 미쳤…!”

한 마리. 두 마리. 풀숲을 나온 귀물들이 더듬이를 까딱이며 가비를 응시했다.

“야…, 야아!”

가비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나와봐, 당장!”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어쩌면 가버렸을지도 모를 반소를 향해 소리쳤다. 억울하게도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건 반소뿐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나오라고!”

사사사사사삭-

괴물들이 빠른 속도로 가비에게 다가왔다. 지네처럼 많은 다리가 춤을 추듯 움직였다. 쩍 벌어진 입으로 끈끈한 침이 떨어졌다.

‘귀물은 결코, 동족을 먹지 않아.’

반소가 했던 말이 가비의 뇌리를 스쳤다.

‘허니 네 놈이 귀물이라면 그냥 둘 테고, 사람이라면 뜯어 먹겠지.’

“이 개자식아 당장 나와!”

무려 여섯 마리다. 여섯 마리가 가비를 먹겠다고 미친 듯이 기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제일 먼저 당도한 녀석이 나무에 매달린 가비를 물어뜯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입을 벌렸다.

“아악!”

질끈 눈을 감은 순간,

끄엑-!

괴물의 머리로 무언가가 날아와 박혔다. 반소의 반월도였다.

그걸 시작으로 바람처럼 몸을 숨겼던 귀물경비대가 다시 바람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귀물들을 공격했다. 모두 단칼에 베였다.

남은 귀물 한 마리가 가비를 향해 캬악, 입을 벌렸다.

그 사이로 반월도가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놈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꺽-!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툭!

피 묻은 반월도가 나무에 묶인 가비의 밧줄을 잘랐다.

“악!”

뚝 떨어지는 가비를 반소가 받았다.

풀썩-

반소의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강했다. 하지만 조금의 위안이나 안정도 주지 못했다.

그런 걸 느끼기에 반소는 너무도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위압감에 거부감이 일었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었지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연달아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이가 부딪칠 만큼 몸이 떨렸다.

잔뜩 위축된 가비를 내려다보며 반소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명되었다. 네가 귀물이 아니라는 것.”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한다는 소리가…,

“…이!”

욕을 퍼부으려던 가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두 볼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이 품이 소름 돋게 싫었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 * *

몰골은 엉망이었다. 진창에 굴렀지, 귀물의 피로 범벅이 됐지, 거기에 두 줄로 선명한 눈물 자국까지.

가비는 지금 전쟁통의 피난민 같은 꼴로 나무 밑동에 묶여 있었다.

“야.”

가비가 저만치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무리에게 외쳤다.

“야아!”

정확하게는 반소를 향해서였다.

화가 섞인 외침에 놈들이 깡그리 가비를 돌아봤다. 그 눈초리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자기네 우두머리에게 반말지거리를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봤자 저희들에게나 우두머리지, 가비에겐 미친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고 해도 너무 건방진데요? 혼 좀 낼까요?”

가비를 지켜보던 곤이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신경 쓰지 마라.”

말 그대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놈이든, 얼빠진 놈이든 반소에겐 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반소의 말 한마디에 귀물경비대의 시선이 다시금 흩어졌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 했다. 태황국의 수도인 ‘온’으로 돌아가려면.

하룻밤을 지새우고 가까운 마을에 맡겨두었던 말을 타고 달려야 했다.

“야! 귀먹었어? 눈도 장식이고 귀도 장식이냐!”

반응이 없자 약이 올랐는지 가비가 버럭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피식, 반소가 웃음을 흘렸다. 턱에 수염 자국도 없는 애송이.

태초에 내려온 기록서를 보면 하늘의 후손, 즉 ‘천족’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이 태황국이었다.

그 은혜로 태황국은 단 한 번도 흉년을 맞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빈부의 격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나라의 외곽으로 가면 극심한 가난에 배를 곯는 자들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제때 성장하지 못한 사내놈들도 빈번히 볼 수 있었다.

반소는 가비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일 거로 생각했다.

그래도 저런 깡이면 죽지 않고 뭘 먹고 살아도 살겠다.

허나 귀물의 땅에서 본 자를 그냥 풀어줄 순 없었다. 만에 하나가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야영을 준비하는 부하들을 두고 반소가 가비 쪽으로 향했다.

가비의 갈색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사람인 거 알았잖아.”

“그런데?”

“왜 계속 묶어 놓는 건데?”

아, 그게 불만이어서 그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군.

반소의 눈이 가비의 차림새를 다시 한번 훑었다.

“네 놈이 사람이라 쳐도, 미심쩍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미심쩍은 거?”

“그 옷, 신발. 사는 곳도 부모의 이름도 대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날 모른다는 사실.”

“푸하-”

이쪽 세계에 온 이후 가비는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나 널 알아야 할 정도로, 네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반소가 걸친 피갑(皮鉀)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가비가 알 턱이 없었다. 가비의 눈에 그들은 그저 도적 떼, 아니면 귀물들을 잡아주는 사설 집단 정도로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귀물경비대가 북쪽 땅에 와서 경계를 지키며 귀물들을 사냥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고 있었다.

궁을 떠날 때 말끔했던 모습들은 야인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변해 있었다.

“넌 나와 함께 수도로 갈 거다.”

“수도?”

“경비대에서 네 놈이 누군지 알아내겠지. 만에 하나 숨기는 게 있다면…. 글쎄. 그땐 내 손이 아니라 다른 손에 죽을 테고.”

“뭐?”

가비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반소가 등을 돌렸다. 제게서 멀어지는 반소를 보며 가비가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반소가 말하는 경비대가 보통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귀물이 아니라 사람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달아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 * *

여기저기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거기에 둘러앉은 무리는 경계심이 풀린 모습이었다.

피갑을 벗고 서로 웃고 떠들기 바빴다. 도무지 귀물들을 반쪽 내던 사내들로 보이지 않았다.

무리 중에 제일 연차가 어려 보이는 남자 둘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비는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임시로 뚝딱 지어낸 막사.

그곳에 반소가 있었다. 투박한 사내들이 제 우두머리만큼은 성심성의껏 챙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반소는 막사 안에 있었고, 부하들은 한껏 늘어진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곳은…,

가비가 눈을 굴려 해가 진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숲에서 한참을 걸어 나오자 신기하게도 모든 환경이 바뀌었다.

바닥도 푸석푸석하긴 했으나 정상적인 흙바닥이었고 하늘도 익숙한 파란 색이었다.

듣자 하니 귀물의 땅을 벗어난 듯했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 꽃이라니.

가비가 살던 저쪽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계 역시 겨울이었다.

찬 바람에 손이 시렸고 입만 열면 하얗게 입김이 올라왔다.

헌데 그런 날씨와 상관없이 주변에는 싱그러운 꽃과 풀이 가득했다.

기분이 묘했다. 집 마당에 있던 나무들이 생각났다.

동네에서, 아니 어쩌면 전국에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우던.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도망쳐야 해.

이대로 무리를 따라 수도로 갈 순 없었다. 짐작하기로 반소가 말하는 경비대가 사극에서 보던 의금부 같은 곳이 아닐까 싶었다.

정신 차리자, 은가비. 일단 주위에 뭐가 있는지부터 살펴.

마을 같은 건 없는지. 해서 도움을 청할 사람이나 몸을 숨길만 한 장소가 있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저기!”

가비가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남자 한 명을 불렀다. 무리와 어울리지 않게 다소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였다.

“나 일이 좀 급한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다리를 꼬자, 남자가 알았다는 얼굴로 저만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 두 명에게 다가갔다.

얼핏 들은 이름은 곤과 풍.

아마도 반소라는 남자의 오른팔과 왼팔 격인 모양이었다.

남자에게 얘기를 들은 곤과 풍이 가비를 돌아봤다. 곤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했고, 풍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남자가 가비에게 다가와 밧줄을 풀어주었다.

오랜 시간 쪼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가비가 저릿한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나 큰일 볼 건데.”

그 말에 남자가 가비를 끌고 풀이 우거진 곳으로 데려갔다. 가비가 묶인 팔을 내밀었다.

“손이 묶여 있으면 뒤처리는 어떻게 하라고. 대신 닦아줄 거야?”

남자가 질색한 얼굴로 손목에 묶인 밧줄마저 풀었다. 그리곤 몇 걸음 물러나 등을 돌렸다.

가비가 바지를 내리는 척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부러 ‘끄응’ 힘주는 소리를 내자,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조금 더 멀어졌다.

“아-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힘드네.”

엄한 소리를 하며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살폈다.

눈에 띄는 집도, 사람도 없었다.

어쩌지. 일단 더 가야 하나?

말을 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럼 어쨌든 마을로 간다는 소린데, 여기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망쳐야 할지 일단은 마을까지 더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 순간,

…어?

눈에 익은 식물이 보였다.

수면초?

분명 약초도감에서 보았던 식물 중 하나였다. 잎사귀의 모양, 줄기의 형태, 미세한 특징까지.

분명 수면초였다. 그것이 가비의 눈앞에 흐드러지게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허구이자 판타지로만 생각했던 약초가 지금 이곳, 이세계에 정말 실존하고 있다니.

놀란 것도 잠시.

가비는 얼른 그것을 뜯어 손안에서 공처럼 말아쥐었다.

제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아도 귀물들을 단박에 잡는 저 무리를 피할 순 없었다.

마을로 간다 해도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지 미지수이고.

그럼 정공법이 아니라 편법으로 가는 수밖에.

수면초를 손에 쥔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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