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6화 (6/95)

[6화]

꼬박 이틀이 걸려 수도 ‘온’에 도착했다. 그 사이 수레 한편에서 쪽잠을 자고 먹은 거라곤 주먹밥 한 덩이가 고작이었다.

수레 주인은 생각보다 더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신발과 옷 외에는 줄 것이 없자, 그 이상은 베풀지 않았다.

어쨌거나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는 광경을 보자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앞날이 막막해졌다.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다.

그것도 이세계에서.

도움받을 사람은커녕 당장 이 거지꼴을 모면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말과 글자가 통하니까 망정이지. 그것마저 달랐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가비는 보부상처럼 보이는 사내들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골목 어귀에 누군가가 버린 것처럼 보이는 모포를 주워 몸에 둘렀다.

당장 묵을 곳부터 찾아야 하는데.

이대로 밖에서 밤을 보내면 얼어 죽을 게 분명했다.

온은 드넓은 성곽 도시였다. 정확하게 성곽 문을 넘자마자 혹한이었다.

이쪽 세계는 어찌 된 게 날씨조차 중도가 없었다. 어떤 지점만 지났다 하면 날씨뿐 아니라 환경까지 휙휙 하고 바뀌었다.

춥다….

더러운 모포가 바람을 막아주는 건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장터로 들어섰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사극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가비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런 것에 감탄할 처지가 아니었다. 가비의 머릿속엔 오직 ‘춥다’와 ‘배고프다’만 가득했다.

장터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가비가 버려진 천 조각 몇 개를 발견했다.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벌겋게 부어오른 발을 감싸 신발을 대신했다.

그나마 발바닥을 찌르는 냉기는 조금 가셨다.

이쪽 세계 여자들은 다 머리가 길구나.

사람들을 살펴보고 보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긴 머리를 땋거나 묶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가비처럼 숏커트인 남자는 간혹가다 한두 명 정도 볼까 말까였다.

이러니 날 보고 단번에 남자라고 오해를 하지.

문득 반소와 그 무리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녀석들도 긴 머리였어.

남자들인데 올려 묶은 머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특히 반소라는 그자는 차가운 외모와 반머리 묶음이 찰떡처럼 어울렸었다.

설마 여기서 다시 만나지 않겠지….

가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레에서 내리기 전 주인이 이곳 ‘온’이 태황국의 ‘수도’임을 알려주었다.

놀라긴 했지만, 미리 알았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디로든 가야 했으니까.

“후우…, 다리야.”

수레에서 내린 뒤 족히 두 시간은 걸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납작한 배가 이제는 등가죽에 붙기 직전이었다.

결국, 골목 한쪽에 주저앉고 말았다. 불현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도대체 왜 나야? 내가 왜 여기 온 건데.

육체적인 한계가 찾아오자 근본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말한 다른 세계가 여기야? 영문을 모르겠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가상공간일 거라고. 헛된 기대감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변하는 건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도, 뺨을 스치는 칼바람도 그대로였다.

“…미치겠다. 진짜.”

현실 자각 타임과 멘탈 붕괴가 동시에 찾아왔다.

“…하아.”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는데,

댕그렁-

바닥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가비가 눈을 들자, 작은 황색 동전 하나가 가비 앞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세상에. 이 추운 날씨에.”

두툼하게 옷을 걸친 여자가 가비를 불쌍한 듯 바라봤다. 이내 쯧쯧, 혀를 차더니 사람들 사이로 멀어졌다.

가비가 멍한 눈으로 제 앞에 떨어진 동전을 바라봤다.

그러다 누가 볼 새라 냉큼 주워서 앞뒤를 살펴봤다.

뒷면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궁(宮)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앞면에는 ‘100’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 지금 동냥 받은 거야?

거지로 보였다는 것도 잠시.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몸을 일으킨 가비가 다시 장터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전을 손에 쥔 채 여러 노점상을 기웃거렸다.

노점상 주인들은 하나같이 가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뭘 훔쳐 갈까 봐 손을 저어 내쫓았다.

“이 약과 한 봉지 얼마예요?”

가비가 동전의 앞면을 보여주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리 가, 이놈아! 택도 없어!”

주인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가비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른 노점상으로 향했다.

“이 떡 한 개 얼마예요?”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납작한 쑥떡이었다.

“이백 냥.”

이걸로는 떡도 못 먹어? 패스.

가비가 그 옆에 있는 노점상으로 갔다.

“이 사탕 하나 얼마예요?”

“백냥.”

가비가 동전을 내밀자 주인이 냉큼 받아들고 사탕 하나를 주었다.

“그거 말고 그 옆에 있는 노란색으로 주세요.”

가비가 주인이 주는 걸 밀치고 다른 색깔을 선택했다.

보아하니 노란색이 제일 맛있어 보였다. 다른 색깔보다 현저히 적게 남아있는 걸 보니 그랬다.

가비의 생각이 맞았는지 주인이 멋쩍은 얼굴로 마지 못해 노란색 사탕을 주었다.

가비가 그것을 한입에 넣었다. 금세 한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달짝지근한 단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진심 어린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라고. 살겠다.

당이 들어가자 살만해진 가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선 숙식 제공이 가능한 곳을 알아봐야 했다.

이런 몰골로 힘들겠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무작정 부딪쳐 보는 수밖에.

‘녀석아, 넌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도 잘 살 거다. 할아비는 그게 맘에 들어.’

언제고 할아버지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까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나한테 거짓말 한 게 하나도 없네.

때론 손녀를 너무 투박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지만, 가비에겐 그게 더 큰 애정으로 느껴졌고 심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두고 봐, 할아버지. 여기서도 잘 살아 낼 테니까.

일단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는 살아내야만 했다.

결심을 굳힌 가비의 입안에서 사탕이 작아질 무렵, 장터 한쪽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가비가 걸음을 멈추고 그곳을 기웃거렸다.

열 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와 중년의 남성 하나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뚫고 가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가비에게서 풍기는 구린내 탓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덕분에 상황을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소년이 따져 물었다.

“분명히 나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이것만 달여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요!”

“그래 이놈아, 난 맞게 처방했다니까 그러네?”

“헌데 우리 어머니가 이걸 먹고 열이 더 나요. 펄펄 끓는다고요!”

“그럼 네 엄마가 다른 병이 있었나 보지! 왜 나한테 와서 난리야!”

듣자 하니 남성이 약초를 팔았고, 그걸 먹은 소년의 어머니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소년이 씩씩거리며 남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장 우리 집으로 가요! 아저씨가 책임지라고요!”

“아니 이 자식이 버르장머리 없이!”

“아저씨가 태황궁의 ‘태어의’였다면서요! 그거 다 거짓말이죠!”

“이거 미친놈 아니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서 이거 나한테 팔았잖아요!”

소년이 바락바락 대들며 남성의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꺼져 이놈아! 재수가 없을라니까!”

남성이 소년을 팍 밀쳤다. 소년이 뒤로 자빠지며 가비의 발치 앞으로 쓰러졌다.

소년의 거뭇거뭇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억울한 듯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씩씩거리는 소년 앞으로 가비가 쪼그리고 앉았다.

“이건 온열초잖아.”

가비가 소년이 들고 있는 약초 다발을 가늘게 뜬 눈으로 살폈다.

“해열초가 아니야. 열이 많은 사람한테 잘못 주면 오히려 열병을 앓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가비가 남성을 쳐다봤다.

“아저씨 이거 혹시 해열초랍시고 온열초로 준 거 아니에요?”

“뭐, 뭐야?”

남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따져 물었다.

“얌마, 넌 또 뭐야? 어디서 거지 같은 게 끼어들어서는. 네 놈이 약초에 대해서 뭘 알아? 이게 어떻게 온열초냐! 해열초지!”

“아저씨.”

가비가 황당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어떻게 해열초예요, 온열초지.”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성 앞으로 약초를 들이밀었다.

“아저씨 약초꾼 맞아? 여긴 뭐, 약초는 아무나 파나? 자격시험 같은 것도 없어?”

가비가 목소리를 높이며 약초를 흔들었다.

“이게 아주 비슷하게 생겼단 말이죠. 요 이파리 뒤에 줄기가 쫙 뻗어 있잖아, 이거 개수에 따라 온열초냐 해열초냐가 구분된다고. 아저씨 그것도 모르고 팔았죠?”

“뭐, 뭐야!”

“‘뭐, 뭐야’만 하지 말고 대답을 해보시라고요. 이거 얘한테 팔았어요, 안 팔았어요. 뭣도 잘 모르면서 판 거, 맞죠?”

“이…, 쌍으로 미친놈들이,”

남성이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가비가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약초 살 돈 없는 사람들한테 아무거나 싸게 후려쳐서 막 팔지?”

저쪽 세계든 이쪽 세계든, 어디든 돌팔이는 있는 법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아픈 사람 등쳐 먹는 게 제일 나쁜 놈이라고 했어.”

가비가 남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돈 내놔요.”

“뭐?”

“얘한테 약초 판 돈 다시 달라고요.”

“이제 보니 이것들이 사기꾼이네!”

남성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가비와 소년을 사기꾼으로 몰고 갔다.

“너희 이런 식으로 약초도 빼돌리고 돈도 다시 돌려받았지? 이 괘씸한 놈들 좀 보게나!”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어느 쪽 말이 맞는지 관망했다.

가비가 입술을 꾹 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아프다는 어린 소년을 등쳐 먹다니.

게다가 약초였다. 처방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이봐요, 아저씨!”

가비가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눈을 부릅뜬 그때,

“여기, 이 소년들 말이 다 맞는 것 같은데.”

삿갓을 쓴 남자 한 명이 인파 사이로 걸어 나오며 가비 옆에 섰다.

“당신은 또 뭐야!”

웬 사람이 끼어들자 약초를 판 남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삿갓을 쓴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가비가 들고 있는 약초를 바라봤다.

“네 말이 정확하다. 이건 해열초가 아니라 온열초야. 보는 눈이 아주 좋구나.”

남자가 삿갓을 들어 올리며 가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삼십 대 초 중반쯤으로 보이는 훈남이었다.

“이것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구네?”

약초를 판 남성이 침까지 튀기며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너희 한통속이지? 다 같이 짜고 이러는 거 아냐! 이것들이 어디서 감히…,”

“그러는 그대는 어디서 감히 약초를 팔아.”

삿갓 쓴 남자가 온화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남성의 말을 잘랐다.

“약초는 본래 약초방으로 허가받은 곳에서만 팔 수 있는데, 그대는 이 귀한 것을 지식도 없이 길거리에서 팔고 있지 않나.”

뜨끔한 남성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삿갓 쓴 남자가 말을 이었다.

“궁에 신고하면 경비대가 잡아갈 것을 모르는가? 하물며 태어의를 사칭했으니 그 죄가 더욱 무거울 테고.”

“이, 이보시오. 대체 댁은 뭔데 남 일에 끼어드는 거요!”

살짝 겁을 먹은 남성이 삿갓 쓴 남자에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왈가왈부하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오! 괜히 나서서 험한 꼴일랑 당하지 말고.”

“내가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나.”

삿갓 아래로 눈을 빛낸 남자가 가슴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나를 사칭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걸 내세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데.”

남자의 손에는 붉은색 인장이 찍힌 호패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허억-’ 놀라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납죽 엎드렸다.

가비가 호패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태황궁의…, 태어의?”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글자를 읽자, 남자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 자리에서 태황궁의 태어의 ‘서문’과 눈을 맞추며 서 있는 건 오직 가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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