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사혜의 온몸이 무거운 빗물로 젖어 갔다. 운혁의 눕혀진 몸 위에도 차가운 비가 떨어지며 윤곽을 따라 투명하게 번졌다.
“죽여, 사혜야.”
사혜는 날카로운 뼈처럼 자라나는 운혁의 비늘을 꽉 억눌러 붙잡았다.
“어서.”
그 꽉 붙잡은 어깻죽지에 입술을 문질러 비볐다.
“우리의 전생이 그랬듯이 돌고 돌아 다시 해후하게 될 겁니다.”
빗물로 덮인 푸른 눈은 그날, 파도에 삼켜지는 절망을 닮아 있었다.
“설령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전생에서도, 지금도. 아마 나는 당신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던, 그런 운명인 모양이니까.”
떠는 입술을 우그러뜨렸다. 이 악물고 버티려 해도 허무는 표정을 수습할 길이 없다. 이 사람은 대답할 여력도 남지 않았는데, 끝을 알리는 침묵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계속 주절거려야 할 것 같았다.
찡그리듯 웃는 저 얼굴에 대고 곡도를 휘둘러야 하는데, 차마 똑바로 마주보기 힘들었다. 눈을 뜨면 봉마고 뭐고 내려놓고 이 사람이 괴물로라도 살아 주기를 바라는 욕심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었다.
천천히 곡도를 들어 올렸다. 한 번만 그어도 그의 영혼은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 잔념 하나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 정도로 혹사당해 바스러지기 직전의 영혼이었다.
사혜는 울음을 문 입술로 천천히 술을 읊었다.
“……고운 머리카락으로 나그네의 눈을 홀리지 말라. 아이 울음소리로 아낙의 눈물을 탐하지 마라. 네 갈 길은 지상 아닌 하늘에 있으니. 붉은 귀는 신목의 열매가 되고, 새까만 눈은 은하의 별로 빛나며, 푸른 비늘은 옥의 궁에 고이고이 묻어 두리.”
영창을 마치자 손바닥이 찬연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요귀야, 자괴하여 근원으로 돌아가라. 해묵은 원은 내가 달래 줄 테니 이만 그 사람을 놓아주고 제 발로 떠나라.”
손금을 따라 뻗어나간 황금의 실타래가 허공에 얽히고 묶이며 글자가 되었다. 부챗살처럼 퍼지는 글자의 여울 아래에서, 운혁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의 본명과 전생의 기록, 환생하여 저지른 죄까지 모조리 황금의 글자로 기록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그 글자들이 춤을 추며 내려와 사혜의 곡도 위아래로 빼곡히 새겨졌다.
신기가 더해진 곡도는 이제 금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노을처럼 타오르는 광원을 뿜고 있었다.
“기유.”
옛 이름을 들은 운혁의 눈매가 움찔 떨렸다.
실체를 입에 담는 순간에 ‘파삭―’하며 하늘의 꼭짓점부터 시작해 거대한 금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공간의 균열과 함께 비가 멎고, 새하얀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껍데기만 남은 기운혁의 육신도 언 땅처럼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사혜는 손을 뻗어 딱딱한 얼음벽에 덮여 가는 그의 손가락을 얽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굽혀 곱게 내리감긴 운혁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팔랑거리며 날아온 붉은 나비들에 에워싸여 사혜는 검무를 추었다.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는 검무는 천도재의 시작을 알리는 호접무였다.
허공을 휘돌던 검날의 끝은 얼음덩이가 된 운혁의 가슴팍 위였다. 칼날과 부드럽게 맞닿은 몸에 균열이 일더니 틈새로 눈부신 빛살이 흘러나왔다.
파삭, 쨍―!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하늘의 경계 또한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운혁의 가슴을 가르고 빠져나간 푸른 빛의 영혼이 흐리게 떠오른다. 하늘길에 오르기도 전에 형체 없이 부서질 나약한 영혼을 사혜는 조심스레 붙들어 손안에 감쌌다.
“가지 마세요.”
홍보옥 안에 여린 영혼을 담은 뒤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떠나면 어디에도 당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테니.”
그와 동시에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눈이 멀 것처럼 찬연한 빛살이 시야를 휘감는다. 지긋한 어둠을 몰아낸 새하얀 빛무리 속에서, 사혜는 구슬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 * *
“진원 님! 저길 보십시오, 미립굴이……!”
서걱!
나무 혈귀의 근본을 부수고 수살귀의 사체를 수습하던 진원의 칼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뺨에 튄 핏물을 팔등으로 닦아 냈다.
“요굴이 사라졌습니다!”
요귀와의 난전은 끝을 보고 있었다. 오십에 이르는 무녀와 퇴마사들 중 생존자는 고작 열다섯이었으나 요귀는 남김없이 몰살하였고, 탁한 독기는 느리게나마 걷혀 가는 중이었다.
세차게 쏟아지던 빗발의 기세는 수그러졌다. 축축한 풀잎을 밟으며, 진원은 연무에 쌓인 미립굴 방향으로 나아갔다.
“홍사혜는?”
“진원 님. 당장 무녀원으로 복귀하라는 사왕 전하의 명입니다.”
“놔라, 사태를 벌릴 대로 벌려 놓고 이쯤에서 손을 떼란 것이냐? 홍사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확인해야 할 것 아니냐!”
진원을 붙잡은 건 전쟁이 끝나갈 즈음 뒤늦게 급박한 걸음으로 나타난 사왕의 수족이었다.
“애초에 이곳까지 걸음 하실 필요 없었습니다. 홍 무녀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주군의 명령도 어기고 멋대로 참전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둘러 잠행을 나가시라는 밀명입니다.”
또 ‘그것’인가.
‘그래, 계속 그리 살 생각인 모양이지. 하면 그리하렴. 너와 사왕의 죄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으니 훗날 응당한 죗값을 치를 터. 제 잇속 채우기 위해 죄 없는 이를 해하고 생을 난도질하고. 언제까지 그리 살아 보렴. 내 딸은 어디에 있지? 그 애도 네가 죽였니, 응?’
예상대로 남자가 품속에서 몇 겹의 잎으로 꽁꽁 둘러싼 약포지를 은밀히 내밀었다. 풀어헤치니, 탄 재처럼 시꺼먼 가루와 함께 포지에 서(西)라고 쓰여 있었다.
진원은 그것을 품 안에 거칠게 쑤셔 넣고는 짓씹듯이 내뱉었다.
“놓아라! 그 애의 생사만 확인하고 출발할 테니.”
안개가 서편으로 물러가고 있었다. 진원은 미립굴이 사라진 터에 덩그러니 웅크려 앉은 까만 인영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미립굴이 사라지기 전까지 끝도 없이 몰려들던 요귀들이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없으니, 좋은 징조일 텐데 가슴은 왜 이리 불안으로 뛰는지 모르겠다. 미동 없는 사혜의 뒷모습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홍사혜!”
한달음에 내달린 진원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툭.
“사…….”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여리디 여린 몸이 풀밭으로 기울었다. 진원은 다급히 사혜의 몸을 붙들어 안았다. 철철 묻어 나오는 피가 진원의 양손을 흠뻑 적셨다.
잠시간 창백하게 질려 있던 진원이 이내 피 마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기가 점점이 묻은 피는 사혜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해냈구나, 사혜야.”
아득바득 주인을 살리려는 신력으로 상처는 지혈되었고, 옷에 묻은 것은 지혈 전 흘러나온 옆구리의 피와 그보다 많은 요귀의 피였다. 그저 진력을 다해 기절한 것이다.
식은땀과 눈물이 괸 작은 얼굴, 고통스럽게 찌푸려진 입술과 꽉 움킨 주먹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봉인구.
진원은 젖은 사혜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찌푸려진 눈썹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바로 펴 주고, 고통스럽게 쥐어진 사혜의 손아귀를 펴 홍보옥을 빼내었다.
그런 뒤 그녀의 목에 걸린 헝겊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뒤 사혜를 품에 안아 든 진원이 큰 소리로 호령했다.
“홍사혜의 부상을 치료하는 즉시 복귀한다! 주운, 네가 사혜의 비호를 맡아 줘야겠다.”
“따로 이동하시는 겁니까?”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어.”
잠시간 개었던 진원의 낯빛이 다시 어둡게 가무러졌다. 조심스럽게 주운의 품 안에 사혜를 넘겨준 진원은 주운이 붙잡기도 전에 말의 옆구리를 박차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어느 날 꿈속에 그 사람이 걸어왔다. 연분홍 꽃잎이 유유히 흐르는 새하얀 밤. 달 뜬 강가의 다리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말기를 바랐는데 막상 홍운영을 마주하니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 여자도 내게 할 말이 있으니 꿈까지 찾아왔지 않나 싶었다. 꿈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이렇게 침착하게 얘기할 수 없을 테니 한편으론 기껍기까지 했다.
“네 원대로 기운혁이 죽었으니 속이 후련하겠구나.”
“…….”
“하지만 죽기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
강가에 비친 두 여자의 잔상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바람을 따라 얕게 팔락이는 옷자락이 수면에 비쳤다.
“알고 있어. 진정 나와 당신이 같다면 그의 죽음을 진실로 바랐을 리 없으니까.”
“…….”
“악 받친 슬픔보다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래서 죽어서도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운혁의 천도를 바란 것이잖아.”
그토록 내게 기운혁을 멀리해라 종용한 것도, 그가 내게 묶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처음으로 홍운영의 얼굴을 올곧게 마주 보았다. 스무 살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앳된 얼굴, 고아한 눈매와 겸허한 산수유색 눈동자. 악의가 사라진 얼굴은 바람이 비껴간 호수처럼 잔잔했고, 내리깔린 눈매는 이 이상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늘진 살기를 떼고 본 우리는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고, 나는 완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가 내 아픔을 간직한 전생임을.
여자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더는 아무런 사념도 남아 있지 않을 수 있겠다. 텅 빈 동공을 눈앞에 두고서야 산 사람이 아님을 실감했으니까.
나는 홍운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한을 풀었으니 이제 그녀는 떠돈 세월만큼 멀고 먼 여로에 오를 것이었다.
하늘에 닿아도 기운혁의 영령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기운혁이 사람을 해치며 반복한 삶을 괴로워한 만큼, 곁에서 그것을 계속 지켜본 홍운영의 애한 역시 그만큼 깊었을 것이다. 그만 편안히 떠나기를 바랐다.
홍운영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손끝으로 전해지는 슬픔과 안도를 느꼈다. 운영이 붉은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웃는 듯 마는 듯 희미한 미소.
우리의 마지막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