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첫 승리.
명나라의 장수들은 수양제의 패배원인을 알고 있었기에 속전속결을 위해 강을 건너왔었다.
하지만, 언덕이 있음에도 언덕에 진을 치지 않은 조선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지란은 언덕을 내려갈 때 조심스레 진군을 시켰다.
그런 그의 눈에 조선군 진지에서 피어오르는 흰색의 연기 4개가 보였다.
쿠쿵킁! 쿠당탕!
굉음과 동시에 추행진 삼각형 모양으로 진군하던 병사들이 밀짚 인형처럼 쓰러지는 게 보였다.
움직이던 추행진은 멈추어 버렸고, 쓰러진 이들이 내는 비명소리가 가득 울렸다.
“화, 화포다! 화포를 성벽에서 들고 내려온 것이다! 발을 멈추지 마라! 화포는 한번 쏘면 다시 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앞으로 공격하라!”
이지란은 화포를 이미 많이 보았기에 강력한 위력이 있는 만큼 그 재장전이 늦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던 병사들을 닦달해 빨리 뛰어 내려가게 만들었다.
부상자들의 앓는 소리에도 진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다시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200m를 더 가기도 전에 다시 화포 소리가 들렸고 날아온 철탄환에 전면의 10여 명이 떡이 되어 버렸다.
더불어, 조선군의 화살도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각궁으로 무장한 1000여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돌격하라! 우리의 숫자가 몇 배는 더 많다!"
장수들의 독전에 병사들은 화살을 맞아가며 앞으로 꿋꿋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그렇게 많은 수의 궁병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돌격하라! 와아앗!” “죽여라!”
조선군과의 거리가 50m 정도가 되자 돌격 명령이 내렸고, 명나라 병사들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더 가까이 붙으며 화포며 각궁이며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4문의 천자총통에서 굉음과 연기가 피어오르자 앞에서 뛰어 가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꼬부라졌다.
그것도 그냥 꼬부라진 게 아니라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는데, 몸 곳곳에 엄지손톱만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철탄환 대신 쇠구슬 산탄을 넣어 총통을 발포한 것이었다.
총통 산탄에 앞장서던 300여 명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것이었다.
그런 화포의 공격에 다들 무서워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들리는 콩을 불에 볶는 소리에 몸 곳곳이 화끈해 졌다.
파파팡! 타다당탕! 터터텅!
"끄악!"
"아파-!"
나름의 사격 화망을 만들기 위해 선상총통을 든 수군들을 넓게 배치했는데, 화망에 들어온 명나라 병사들의 전열은 납 산탄에 의해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이지란은 화포를 알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재장전이 되어 발사가 되는지를 몰랐고, 콩 볶는 작은 소리는 무엇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넓게 배치해 두었던 10연발 선상 총통 100여 개에서 화약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자 마치 연막탄을 터트린 것처럼 시야를 가렸다.
“재장전! 재장전하라!"
2인 1조의 총병들이 다시 재장전하는 동안 보군들이 앞을 막기 위해 나섰는데, 공격해 오는 명나라 병사들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움직임과 자욱한 연기가 만나 울렁거리게 보여서 명나라 병사들은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 도술이다!”
명나라 병사들은 자욱한 연기에 조선군이 흐려졌다 밝아졌다 하며 보이자 조선군이 도술을 쓰는 것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동료가 몸에 손톱만 한 구멍이 나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으니 제아무리 간이 큰 병사라 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재장전된 화포가 다시 불을 뿜었고 뭔가가 흉흉하며 날아오더니 사람들이 갈기갈기 찢겨 버리자 병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지랑이 연기 속의 적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앞장서던 병사들이 죽어 쌀자루처럼 시체가 쌓여 버리니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공포에 지배당한 이들이 무작정 뒤로 도망쳤고 공포심과 군중심리로 인해 대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오는 병사들은 뒤에서 전진하라고 하니 앞으로 움직이는데, 앞에서는 공포에 질려 도망쳐오고 있었으니 그런 병사들이 뒤섞여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화살과 철환이 몰려든 병사 사이로 날아들자 멀쩡하던 병사들도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서로 앞다투어 도망을 칠 뿐이었다.
"보군들의 시간이다! 공격하라! 조선인들을 깔보고 죽인 명나라 놈들을 죽여라!”
"와아!"
내 호위대를 맡고 있던 박치산이 보군을 이끌고 앞장서 나가자 병사들이 기세가 올라 뛰어나갔다.
처음 진을 꾸리고 싸워야 한다고 했을 때는 다들 명나라 놈들에게 죽을 거라고 겁에 질렸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화포 몇 방에 명나라 병사 몇백 명이 찢겨 죽는 것을 보았기에 명나라 놈들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겁을 집어 먹고 도망치는 놈들이라면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쫓아가서 무기를 내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언덕을 내려오는 병사와 도망치는 병사가 뒤섞여 명령이 전달되지 못한 명나라 병사들은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전황을 바꾸기 힘들다고 생각한 장수들마저도 살기 위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자, 명나라 병사들은 피난민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되어 버렸다.
내려올 때는 수월했던 언덕이 이제는 도망치는 명나라 병사들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되었는데,
오르막길에 막힌 명나라 병사들은 개미지옥에 갇혀버린 듯이 때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선군의 모습을 안주성 성곽에서 보던 군민들은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고, 이기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성내의 관병들과 장정들도 모두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삼각지 평야에서 서로가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였었기에 수영에 능한 몇몇은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이들은 물에 막혀 북쪽 지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선의 본대와 이지란 장군이 싸우는 동안 조선의 기마대를 견제하던 왕진우 장군은 패퇴하여 올라오는 병사들을 보자 이게 어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남기일 지네가 저들을 안정시키게!"
급하게 병사들을 풀어 도망쳐 오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뒤에서 조선군이 쫓아 온다는 것을 아는 병사들은 그저 앞으로 도망을 치기 바빴고, 결국 멀쩡하던 부대마저도 혼한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상황을 보던 박 투르안의 기마대가 강과 떨어진 남쪽으로 움직여 길을 터주자 기마대에 반응해 움직이는 병사들과 도망갈 길이 생겼다고 움직이는 이들이 엉겨 붙어 버렸다.
왕진우 장군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본 박 투르안이 바로 기사(騎射) 공격 명령을 내렸고, 화살 공격에 왕진우 장군의 병력은 제대로 대응도 못해 보고 혼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마대가 옆에서 화살을 쏘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뒤에서는 패잔병들이 몰려드니 정신이 멀쩡한 병사들도 버티지를 못했고, 그저 다들 알린 북쪽 지류를 따라 도망을 쳐버렸다.
“와하하! 뒤쫓아라! 최대한 죽여라!"
박투르안과 여진족이 대부분인 기마대는 한번 흐름을 타자 미친 듯이 병사들을 몰아가기 시작했고, 뒤처진 이들은 뒤따라온 조선 보군이 사로잡거나 죽여 버렸다.
청천강 북쪽 지류로 물줄기가 줄어드는 지역이 나오자 그제야 명나라 병사들이 강을 건너 북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박 두루안의 기마대는 강을 건너 계속 추적을 했다.
“우리는 여기까지다. 저놈들은 기마대에 맡기고 삼각지에 가두어진 놈들을 조진다!"
박치산의 명령으로 보군들은 다시 내려와 군데군데 숨어 있는 자들을 잡았고, 부상자들은 숨을 끊어줬다.
원종은 붉은 노을이 지자 징을 쳐서 병사들을 돌아오게 했는데, 다들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경하드리옵니다. 그 옛날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 버금가는 승리이옵니다!"
박치산 권관의 낯간지러운 찬사가 나오자 병조좌랑 이득길과 다른 관리들도 몰려들어 축하를 해주었다.
안주성의 백성들도 다들 몰려나와 승리를 축하했다.
오늘 패했다면 안주 평야에 널브러져 죽었을 이들이 바로 자신들이었기에 살아있다는 것에 다들 기뻐했다.
하지만, 원종은 죽었거나 산탄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 수천 명을 직접 보고 명령을 내렸기에 고통스러웠다.
“죽은 이들을 모아 장사지내 주게나. 스님들을 불러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도록 하게나."
"그렇지 않아도,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스님들이 승병으로 참여를 했었습니다. 장사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성민들까지 나서서 죽은 이들을 정리하고 장사를 치를 때 화약 소모분과 불량이 나서 이제 쓰지 못하는 총통의 숫자를 파악했다.
"북쪽으로 올라가실 겁니까?"
"오늘 이겼다고 한양에 파발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네. 우선은 박 투르안의 기마대가 돌아오면 정찰을 보내고 천천히 올라갈것이니 준비하게."
다음날 오후 늦게 기마대의 일부가 돌아왔는데, 청천강 상류를 통해 도망간 이들과 본래 명나라 기마대가 북쪽으로 도망을 치고 있고, 그 수가 대략 6천 정도라고 했다.
2만에 가까운 명나라 병사들을 죽인 것이었다.
박 투르안에게 압록강까지 계속 쫓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공적을 늘리기보다는 이놈들이 도망치다 여러 곳을 털고 가지 못하게 빨리 압록강으로 도망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배로 화약을 보급하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 하니 의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여러 절에서 승려들도 모여들어 그 숫자가 2천 명에 달했다.
"그럼, 잃어버린 동항을 되찾고 안동도를 점령하러 올라가자!"
***
평양에서 도성으로 오가는 길로 파발마가 세네 마리 뛰어다니자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도성의 사람들은 안주성에서 어떻게 승부가 났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다, 궐에서 나온 내시들이 안주성에서 병마 절제사 전원종이 대승을 했고, 명나라 병사들을 수만 명이나 죽였다고 알리자,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원종이 주인인 춘봉 상단에서는 승리 떡을 해서 나눠주기까지 했고, 배를 통해 정보를 들은 상인들은 차액 실현을 위해 사재기를 해두었던 물건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단 사람들을 통해 전원종이 청야전술을 펴면 백성들이 고통스럽다고 청야전술보단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다들 전원종을 칭송하기 바빴다.
"근데, 전하께서는 왜 잡혀간 이후 아무런 일도 없는 거지?"
“양반네들은 왕자를 새 왕으로 세운다고 하던데. 왜 진척이 없는 거야?"
"허허, 나라님이 없는 상황이라니 원, 망조가 들었나."
"쉿 말조심하게나. 큰일 나네."
대승을 했다는 소식에 도성은 겉으로나마 금세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정전에서 벌어지는 기세 싸움은 평상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승을 했다고는 하나, 이걸로 주상전하를 돌려받는 것이 힘들어졌소이다. 작은 승리를 했거나
대치 상황이 되었다면 전하를 돌려받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수만 명의 명나라 병사를 죽였으니 이제는 주상전하를 모셔올 수가 없게 되었소이다."
“괴변이오! 패하거나 대치 상황이 오래되어 청야전술을 펼쳤다면 조선의 백성들이 더 힘들었을 것이오. 속히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명나라를 공격하여야 하오!"
"승리를 하였으니 이제 전쟁을 끝낼 사신을 보내어 전쟁을 끝내고 주상전하를 모셔와야 하오!"
대신들은 자신이 이득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안을 내고 있었다.
문제는, 정확한 답이 없었기에 다들 한명회의 입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거정 대감이 직접 사신으로 가도록 하시오. 전쟁을 끝내고, 주상전하를 모시고 오시오."
한명회의 말에 서거정은 궐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임무가 막중했기에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