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항전(抗戰).
조선의 국왕인 성종을 석고대죄하게 하고 길을 들이겠다는 소리에 원종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무슨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을 원하는 거야?
인조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었던 삼전도의 굴욕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명나라의 만귀비는 그런 굴욕적인 조선의 항복을 받길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 태종처럼 최전성기로 올라가는 국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명나라에서 그런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니 웃길 수밖에 없었다.
폐 태자가 아직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주변에 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내가 사신으로 만귀비를 만나 갖은 음식으로 입맛을 맞춰 준다고 해도 출병한 군사들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형님은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우리가 맞서 싸울 이유도 없고, 5만의 병사라면 우리가 싸울 수도 없다. 몸을 피해야지. 너는 배에 실을 수 있는 것을 챙겨서 조선으로 가거라. 나는 배에 태울 수 없는 것들을 챙겨 여진인들과 멀리
달아날 것이다."
형님의 말대로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물자를 챙겨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가장 빠른 배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
원길이 급하게 인근 20여 곳의 여진족 족장들을 모았고, 명나라의 군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알렸다.
"명과 조선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수 있기에 다들 여길 버리고 물러났음 하오.”
“5만이라고 하니 몸을 빼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대관절 그 새우라는 것이 뭐요?"
바다나 큰 호수가 없는 내륙에서만 살아온 몇몇은 고래도 몰랐고, 새우도 당연히 몰랐다.
그런 이들에게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고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원길은 큰 호랑이 싸움에 늑대가 끼면 호랑이에게 늑대가 물려 죽을 수 있으니 도망을 쳐야 한다고 다시 설명을 했다.
“아, 그런 뜻이었구만. 헌데, 그러면 무조건 도망을 치면 안 되는 것인데."
“맞아. 큰 호랑이든 큰 곰이든 서로 싸우다 보면 한 놈이 크게 다친다고. 그렇게 다친 놈을 늑대는 놓치지 않지."
“암암. 늑대도 두세 마리가 있고, 호랑이가 다쳤다면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지."
원길이 속담을 현지에 맞게 설명을 한 것이 이야기 방향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원길도 이야길 듣다 보니 무조건 도망만 치기보다는 틈을 노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몇 년 동안 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여진족들 간의 분쟁 지역을 공존지역으로 만들어 밭으로 개간을 했었다.
애써 개간했던 곳이 명나라군에 의해 황폐해질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여진족의 병사들이 주위를 돌며 남아 있다면 명나라의 병사들이 마음대로 약탈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말 잘 타는 전사들만 모여 두 호랑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봅시다. 그러다 틈이 보이면 노려봅시다."
원길은 명나라의 요구사항이 조선의 점령이 아닌 성종의 굴욕스러운 항복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면전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무조건 도망치기보다는 분위기도 파악하고, 개간한 땅의 피해도 줄여 보고자 말 잘 타는 이들로 군사를 꾸려 별도의 별동대를 만들었다.
***
"이게 정녕 사실인 것이냐?"
동항에서 온 서신을 본 춘봉 상단의 김재원 대행수는 당장 한명회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먼저 상단의 문을 닫게 했다.
“식량의 거래를 최대한 줄인다. 백미는 계속 거래하되, 조를 비롯한 값싼 곡식은 최대한 비축하거라.”
“서.설마 또 군사 파병이옵니까?"
이미 연경으로 2만의 군사를 보내며 군량미 공급으로 고생을 했기에 담당자와 일꾼들이 먼저 반응했다.
"파병이 아니라, 방어전이 될 수도 있음이야. 여러 상단에 뿌려 두었던 곡물을 최대한 모으거라."
상단의 일을 처리시킨 김재원은 급한 일이라고 한명회에게 독대를 요청했고, 춘봉 상단의 대행수가 독대를 요청한다는 말에 한명회도 낮잠을 자다 일어났다.
"그러니깐. 산해관 인근의 안정을 위한 군사 행동이 아니라,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움직인 군사 행동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원종이 보낸 서신을 한명회는 읽고 또 읽어 봤다.
먼저 조선의 왕을 동항까지 오게 해서 항복을 시킬 거라는 명나라의 의도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짓이라 여겨도 될 것 같았지만, 진짜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급히 궁으로 움직였다.
“사신으로 간 병마 절제사의 서신이긴 하지만, 그 근거가 빈약하오. 어린 태감의 말을 무조건 신뢰하긴 힘드오."
"맞습니다. 산해관 북방의 혼란이야 여기까지 알려진 문제이지 않습니까?"
“나도 저 말에 동의하오. 그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여진족의 족장들에게 항복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하오."
“내전으로 아직 혼란스러운데, 우리 조선을 명이 건드려서 뭐하겠소? 마땅히 대비는 하여야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보오이다."
성종도 원종이 보낸 편지를 보았으나, 내부 단속으로 혼란한 명나라가 조선에게 그럴 리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북방을 혼란하게 한 여진족 족장들을 항복시키겠다는 것을 태감이 잘못 듣고 와전된 것이라 여겼다.
"허나, 만사 불여튼튼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비는 해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전원종에게 어서 만귀비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조건을 협의하라 전하고, 제9도인 안동도 관찰사 전원길에게 명나라 장수 이시록을 접대토록 하라.”
***
“조정의 생각처럼 여진족 족장들에게 항복 받는다는 것이 와전되었으면 좋겠군.”
사신단으로서 그대로 일을 진행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원종은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괜히 지금 갔다가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우선은 동항의 모든 물자를 다 실어서는 목포로 움직이게 했다.
마누라와 형수는 물론이고, 안동도 소속으로 있는 어린아이들은 모두 다 목포로 보내었고, 혹시 모르니 희재나 삼식이의 선단도 목포 인근에 다 모이도록 명을 내렸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은 북방 이민족들이 모여 거래를 했던 심양이 이시록 장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갈 것인데, 너는 어찌할 것이냐?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목포로 가지 그랬느냐."
“그렇게 되면 또 문제가 생기기에 어쩔 수 없이 남았습니다. 헌데, 2천의 여진인들이 남기로 했지 않습니까?"
"여진인 2천에 안동도 소속의 조선인 400여 명이 남을 것이다."
"그럼 그들과 움직이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만귀비에게 가든지 아니면 조선으로 돌아가든지 하겠습니다."
원길은 9개 여진 부족을 데리고 북쪽으로 올라갔고, 원종은 여진인들과 노숙을 하며 사흘을 보내자 명나라군의 선발대가 동항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전쟁이 난다고 대부분의 동항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기에 명나라의 5만 군세가 마을로 들어와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의 사신단이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움직였는데, 당연히 명나라의 사신단이기에 평안도의 관리들은 이들을 환영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하지만, 이번 사신단은 그런 연회를 반기지 않았으며 관리들보다 장수, 병사들이 많아 조선의 관리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느낌은 장계로 조정에 급히 보내어 졌다.
"평안도에서 장계가 계속 올라오고 있사온데, 다들 기존의 명나라 사신단과는 다르다고 하옵니다."
"정말, 여진 부족의 족장들처럼 우리 조선도 굴복을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설마, 우리 조선을 그렇게 할 리가 있나."
“하오나, 올라오는 장계를 보면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그때 주워들었다는 태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해야 합니까?"
올라온 장계를 보고 있던 도승지 홍귀달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전 정전에서 있었던 한명회 대감의 말에 다들 말도 안 된다며 왜 명나라가 조선을 그리 대하냐며 와전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명나라의 사신단이 예전과 다르다는 말에 기분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사신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어 기존에 정해진 연회를 베풀고 사신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신단이 한양에 도착하자 성종이 친히 나와 경회루에서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제야 사신단이 황제의 어지를 내밀었다.
[기년에 있었던 원병 출진은 폐 태자에게 보낸 것이었기에 이는 황제인 짐에게 불충, 불효한 것이니 조선의 왕은 직접 나를 찾아와 그 행실에 대해 사죄를 하라.]
설마 했으나, 전원이 보낸 서신과 같은 내용의 어지를 받자, 성종은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고, 화가 나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 잡놈들을 잡아라! 이 말도 안 되는...”
“전하 아니되옵니다. 전쟁 중에도 사신을 가두거나 죽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옵니다. 그리고, 명의 사신을 가두거나 했던 예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되돌릴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 예의를 따질 때요? 조선이 저 여진족의 족장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데, 이것이 예의를 따져야 하는 것이오?"
“전하. 저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알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선 연회를 하고, 저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옵니다.”
성종은 마음 같아서는 사신단으로 온 자들의 목을 베거나 가두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모욕적이더라도 최악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화를 누그러트렸다.
“저들에게 당장 조선을 떠나라고 전하라. 조선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그 값을 다 받아 내도록 하라. 위장이 금군과 더불어 저자들을 호송하라!”
성종의 명에 사신들은 쫓겨났지만,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한양을 떠나버렸다.
“이제 명에서 오는 사신단은 환대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라.”
"전하 그리되면...."
“예판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오? 우리를 여진족과 같은 야인으로 취급을 한다면 우리도 같은 취급을 저들에게 해줘야 하는 것이오."
“하오나, 그것은 문화인다운 모습이 아니옵니다.”
"그럼 그 문화인다운 명나라가 주는 이런 굴욕을 참으라는 소리요? 그대는 어느 나라의 신하요?
감히 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다니.”
화가 난 성종은 당장이라도 군사를 끌어모아 이런 굴욕을 준 이들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폐 태자를 돕기 위해 2만 명을 보내었던 조선은 여유 병력이 없었다.
"전하. 명나라와 싸운다 하더라도 지금은 여유가 없사옵니다. 다행히 안동도 관찰사 전원길은 감영의 병력을 이끌고 몸을 피했다고 하니, 그에게 여진족을 끌어모아 명나라군의 발목을 잡게 하옵소서.”
병조판서 이계손의 복안을 들은 성종은 옳게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봉황성 인근에 안동도 감영을 설치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종은 안동도에 여진인들을 정착시키고, 부족장들을 아전화시키는 작업을 해서 안동도를 온전히 조선의 도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준비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전쟁부터 치르게 되었지만 말이다.
“북방군 도독으로 전원길을 임명하고, 안동도에서 명나라 군사와 싸우라고 서신을 보내라.
그리고, 5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구성하여 5위의 군사들을 모으라.”
"전하. 그전에 일이 이렇게 되게 만든 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옵니다.”
"책임?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의 일은 황제와 폐 태자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황제에게는 기병 천명을 보내었고, 폐태자에게는 2만의 병사를 보낸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오니 그 일을 주도한 상당부원군을 내쳐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