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전초전. (1)
“맞사옵니다. 국구께서 애초에 예의만 갖추면 된다고 하여 황제에게 기병 천명만을 보낸 것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폐 태자가 득세했을 때 같은 숫자만 보내었다면 지금의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국구께서 이미 결판 난 전쟁이니 2만의 병사를 보내야 한다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만귀비가 그때의 2만 병력을 꼬투리 잡고 있으니 그것이 가장 큰 실책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명회는 황당했다.
그게 왜 자신의 책임인가?
정전에서 다 같이 상의를 하고 원군을 보낸 것이었고, 2만 명의 군사를 보내자고 한 것도 늦게 보내는 만큼 숫자라도 많아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주상이었다.
헌데, 그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다 쏟아지자 한명회는 황당하면서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병마 절제사인 전원종을 만귀비에게 사신으로 보낸 것도 상당부원군이십니다. 애초에 다른 이를 보내었다면 몽골인들에게 납치되지도 않았을 터였고,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인연이 있다고 하여 사신으로 보낸 것부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만귀비의 화를 달래야 했음에도 연경까지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발이 계속 묶였으니 병마 절제사의 과도 크옵니다. 부원군께서 인선하셨으니 그 과도 있습니다."
"허허, 그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탓이오?"
한명회는 같이 상의하고 원병을 보낸 것을 왜 다들 기억 못 하냐고 이야기를 토해내려 했다.
하지만, 성종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원군께서는 그만, 자중하셔야겠소이다."
성종은 분분히 터져 나오는 대소신료들의 말을 듣게 되자, 명나라와의 피할 수 없는 분쟁의 책임을 국구인 한명회에게 돌리는 것이 가장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눈치 빠른 한명회는 성종의 한마디에 자신을 정치적 희생물로 선택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여기서 자신이 부연하여 이야기를 하고 파벌이 호응해 준다고 해도 명나라와의 분쟁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고, 성종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말을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후로 이어진 대책회의에서 한명회는 자연스레 배척될 수밖에 없었고, 한명회는 자신이 실각한 것을 씁쓸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權不十年)이라 했던가...
정전을 나서는 한명회의 어깨가 처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
“동항에 5만 군세가 머무르고 있다고는 하나 그 병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여력은 명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과 전면전으로 싸우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맞사옵니다. 싸우고자 했다면 이미 압록강을 넘어 움직여야 했을 것이옵니다."
"그럼, 명나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나?"
“예물을 가지고 항복을 했다는 명분을 원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하오나 그 내용이 내용인지라..."
그들이 원하는 명분대로 항복을 해주면 아무 문제 없이 지금 그대로의 평화가 이어질 터였다.
하지만, 조선의 왕이 평화를 위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라고 했으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불가. 그 외의 방법은 무엇이냐?"
“폐 태자가 황보정 장군에게 패하여 도망은 쳤지만, 중국 남부에서 여전히 할거(割據) 중입니다.
폐 태자에게 2만의 병력을 보내었던 적이 있으니 폐 태자가 다시 세를 일으켜 전세가 뒤바뀌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불가하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그대로 상황을 유지하며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있사옵니다."
“상황을 유지한다?"
“네. 전하, 압록강 인근인 의주에 병사를 모아 명군이 쉽게 도발하지 못하게 견제하는 것이옵니다."
“같은 군세를 모아 백중세(伯仲勢)를 유지하여 시간을 끄는 방법입니다. 하오나, 이렇게 되면 유지비가 문제가 되옵니다.”
성종은 일견하기에 이 의견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서로 힘이 같으니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서로 쳐다보고만 있게 되는 대치 상황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을 듯했다.
어찌 보면 그런 보고만 있는 관계가 중국과 조선의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상황을 유지하다 보면 명나라 내 상황이 또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만귀비가 마음을 돌려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서로 없던 일이 되어 물러날 수도 있으니 시간을 버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옵니다.”
성종은 명나라가 내전 중이니 그 상황의 변화가 조선에 긍정적으로 돌아오길 원했다.
"좋다. 그럼. 상황의 유지를 하며, 명이 어찌 움직일지를 지켜보기로 한다. 오위도총부 총관 허종은 3만의 병사를 모아 의주에 주둔하도록 하고, 전라 수군통제사 이극균은 전라와 충청의
수영 배들을 강화에 모으도록 하라.”
***
어명이 떨어진 오위도총부에서는 각 도에서 장정들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졸지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정남들은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곡물 생산량이 떨어질 것이고, 식량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봉 상단은 일전에 이미 경험했기에 미리 곡식들을 목포로 옮겨두었고, 전시 체제로 물자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보낸 파발마가 원종과 원길을 찾아 동항 인근을 떠돌았는데, 근 한 달 만에 만나 어명을 전해줄 수 있었다.
“한명회 대감이 실각하셨다고?"
명령서에는 안동도 관찰사인 원길이 명나라의 군사들을 견제하고, 원종은 배를 모아 서해를 건너오는 이들을 견제하라는 명령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한명회의 실각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조정의 방침이라고 하자, 원종은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중국 내의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었지만, 텅신황과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오위도총부의 오순 절제사가 4천의 군사를 이끌고 의주에 주둔하고 계시니 그쪽과 병사를 합치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뭉치면 강하나, 군세는 크면 클수록 유연성이 떨어지네. 그리고,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서로가 호응하여 도울 수 있네. 나중에 보급이 필요할 때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시게나."
여진인과 안동도의 노비들로 이루어진 군사들이었기에 오위의 정병들과 섞이게 되면 군사 지휘권을 잃을 수도 있어서 아예 합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
“조선이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병사를 의주에 주둔시켰다고 합니다.”
절제사 오순이 4천의 병력과 왔다는 소식이 명나라 이신록 장군에게도 전해졌는데, 이신록장군은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만귀비에게 명을 받을 때 전쟁까지도 허락을 받았으나, 그는 전쟁 없이 임무를 끝내고 싶었다.
폐 태자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전선을 늘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저렇게 병사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또 없었다.
조선의 대응이 어떠한지 한번은 떠봐야 할 것 같았다.
“양두충 자네가 4천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가 보게 저쪽의 대응을 살펴보고 군사들의 수준을 파악해 보게.”
"충!"
홍농 사람인 양두충은 기병을 이끌고, 동항을 나섰는데, 그런 군사행동이 여진인들과 있던 원종에게도 알려졌다.
그리고, 다시 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오순 장군에게도 통보가 되었다.
오순은 기병이 압록강을 건너면 상대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압록강에서 기병이 건널 수 있는 모래톱을 찾아 미리 매복을 했다.
양두충의 기병은 모래톱이 이어져 얇아지는 물길로 압록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강 너머에서 조선의 병사들이 나타나자, 행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 변은 조선의 영토인데, 왜 명나라의 군사들이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것이오?"
“그대는 누구요? 나는 홍농 사람으로 무위 장군인 양두충이라 하오. 그대는 조선의 누구요?"
“병마 절제사 오순이라 하오."
양두충이 거느리고 있는 여진인이나 조선인들에게 오순이란 장수에 관해 물어보며 정보를 들었는데, 그런 모습이 오순에게는 시간을 끄는 모습으로 보였다.
“원군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어찌할까요?"
병마 절제사 오순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오위도총부 총관 허종 장군에게 명을 받을 때는 본대가 오기까지 최대한 싸우지 말고 위치를 지키라고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본대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고, 지금은 기병 4천이지만, 그 뒤로 얼마나 더 많은 병사들이 올지도 알 수가 없었다.
보군 위주인 자신의 병력이 기마병을 이기려면 이런 모래톱이 깔려있어 기병들이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어야 했다.
“2려를 움직여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1려에 125명이었으니 250명을 움직여 반응을 보려는 것이었다.
오순은 미끼로 쓴 2려를 따라 많은 수의 기마병이 떨어져 나간다면 각개격파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양장군! 조선군의 일부가 도망을 칩니다."
"뭐?!"
양두충은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조선군이 도망을 친다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미리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정보를 모을 때 조선의 군사는 농민을 징집해 급조한 병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그리 급조한 병사라도 지휘관이 제대로 되었다면 병사 관리를 제대로 할 터였다.
헌데,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 도망을 쳤다고 하니, 궁금하던 오순 이란 장수의 밑천을 확인한 것 같았다.
“가볍게 전초전을 가져보자. 기마대를 둘로 나눈다. 1대는 도망치는 조선군을 쫓고 다른 2대는 자리에서 반응을 본다."
"기병들이 움직였습니다!"
절제사 오순은 명나라의 기병들이 둘로 나누어져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기병들이 최정예는 아니지만, 훈련은 제대로 받은 병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들과 싸우려면 기마대에게 약점으로 작용하는 지금의 모래톱이 가장 알맞은 전장이었고, 최대한 강변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 생각되었다.
“창수가 앞으로 나서며, 기마대는 양익으로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라!"
오순의 본대가 방어를 준비하는 동안 양두충의 1대는 도망치는 조선인들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이들이 소수였고, 기마대에 따라 잡힐 것 같으면 아예 강물로 뛰어들거나 해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미끼인 것 같습니다."
"흥! 조선군은 미끼로 낚아 싸우는 것도 어설프구나. 되돌아가 조선군의 뒤를 친다!"
떨어져 나갔던 1대 기마대가 돌아서 조선군의 측면을 노리자 오순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끼로 쓴 2려가 이리 빨리 잡혀 처리될 줄을 몰랐던 것이었다.
오히려 양쪽에서 기마대가 공격하려 하니 오습과 조선군은 생각했던 각개격파가 아닌 포위가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장군님! 저기 보십시오!"
급박하게 병사를 다그쳐 화살을 쏘게 하고 버틸 방안을 찾는데, 부장이 압록강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길 명의 원군이 더 온 것이냐?"
“아닙니다. 조선군입니다. 태극 문양의 깃발입니다.”
“태극? 아, 춘봉 상단의 표식이구나. 그럼, 안동도 관찰사의 병졸들이겠구나.”
오순은 구원병력이 왔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구원병이 왔다는 소식은 병사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리고, 조선군의 반응을 본 양두충도
뒤를 돌아보곤 조선군이 더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제길. 저놈들은 어디서 온 것이지. 앞뒤로 포위되지 않게 강변을 벗어나 되돌아간다."
양쪽에서 공격하던 양두춤의 기마대 중 정면에서 싸우던 2대가 물러나려고 하자, 오순은 지금이 기회라며 군대를 앞쪽으로 움직였다.
강을 얇게 만드는 모래톱을 지키기만 하면 미끼에 낚여 강을 건너왔던 1대 기마대가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오순이 악다구니를 쓰며 병사들을 닦달해 모래톱을 지키게 만들자 1대 기마병들은 강 건너에 고립될 것 같은 두려움에 강물로 말을 뛰어들게 했다.
모래톱을 지키려는 조선군과 강을 벗어나려는 일군의 기마대.
그리고, 앞이 막히자 강물로 뛰어들어 강물에 휩쓸려 가는 기마대까지.
앞뒤로 뒤죽박죽인 싸움터를 보며 원종은 어찌할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