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또 다른 준비. (1)
“명에 원군으로 출발한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 요동 땅에 들어섰다고 하옵니다."
파발로 전해진 소식에 성종은 안도했다.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기도 한 위화도회군 때문인지 성종은 늘 병사들이 북방으로 움직일 때마다 속으로 걱정을 했다.
특히나, 이번에는 2만이 넘는 대 병력이었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군사 지원 말고도 물자를 지원해 주는 것은 어찌 되고 있느냐?”
“춘봉 상단을 통해서 물자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더해서 물자를 지원해 주며 말라카로 가는데 필요한 항구의 사용권을 얻기 위해 교섭을 한다고 합니다.”
“흠. 잘 진행되고 있군."
성종은 외적인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상단들을 통한 물자의 수급이 마음에 들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리 물산이 풍부하고 남아돌았던 적은 없었고, 유리걸식하는 자들도 줄어 성군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 기뻤다.
물론, 이것들이 교역을 통한 이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좋은 원양 교역을 왜구가 두렵다고 하여 막았었던 선대들의 정책이 아둔해 보일 정도로 성종의 치세에 다들 만족하고 있었다.
“새롭게 들어왔다는 설탕주라는 술의 맛이 색다르다고 하던데, 오늘은 그 설탕주로 연회를 준비하거라."
"네이. 전하."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럼주가 삼식이의 선단에 의해 조선으로 대량 수입되었는데, 그 맛이 색다르고 오묘하다고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었다.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이는 물을 섞어 마셨고, 술을 잘 마시는 이는 춘봉 상단의 선원들처럼 한 번에 들이키며 독한 술이 주는 뜨거움을 즐겼다.
“탁주(濁酒)와 값은 비슷한데 독하기는 몇 갑절로 독하니 이 설탕술이 효자구만 효자야."
“그러게. 매일 탁주로 취할 때까지 먹었다면 집안 기둥뿌리가 뽑혔을 테지만, 이 설탕술은 닭 몇 마리 값이니 이보다 좋은 술은 없지."
이 당시의 탁주는 청주(淸酒)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다시 담는 술이었는데, 그래서 알콜 도수가 5도 정도로 그리 높지 않았다.
해서, 농사꾼들은 아예 음료수처럼 탁주를 마시며 일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 말통으로 술을 먹는다는 술꾼이나 영웅호걸들도 알고 보면 5~6도 정도의 맥주처럼 약한 술을 마시며 술을 잘 먹네 하는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저렴하게 들어온 설탕주는 가격은 탁주인데, 그 술 도수는 증류를 거친 비싼 청주와 같았으니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힘든 생활을 잊고 값싼 술에 취해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고자 하는 이들에게 설탕술은 보배나 다름없었다.
“설탕주가 벌써 만 병이나 판매가 되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다음 달 초에 유구에서 가져온 설탕주가 바닥이 나게 됩니다."
"허허, 아무리 술 먹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이야. 설탕주의 가격을 2배로 올리게. 이건 어쩔 수 없어."
럼주를 조선은 물론이고 여진족과 중국에도 팔 생각을 했는데, 조선에서 소비되는 것만 해도 충당이 어려울 판이었다.
“유구에 술을 구매하러 가려고 해도 자기 병이 모자랄 판입니다."
같은 규격의 자기 술병을 틀을 만들어 찍어내고 있음에도 불에 구워 만드는 것이다 보니 그 제작 수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술을 구매해 갈 때 가져갔던 자기병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자기 병 값을 쳐준다고 하게."
도자기 병 값을 쳐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라 정답이 아니었다.
럼주를 유구에서 사 올 때부터 병이 아닌 오크통에 담아와야 물량도 늘릴 수 있고, 팔 때도 오크통 단위로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200L의 배럴(Barrel) 크기 오크통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향후로도 맞는 방법일 것 같았다.
“이보게. 도성에 마차나 달구지의 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이가 있나?"
“바퀴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이는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주로 대장장이나 소목장이 만드는데, 둘 다 부르오리까?"
“일단, 둘 다 불러보게.”
서양의 경우에는 귀족들이 마차를 타며 승마를 했기에 자연스레 마차나 승마 용품을 제작하는 공방 장인들이 생겼는데, 조선은 가마를 타고, 승마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런 류의 장인이 없었다.
오크통을 만드는 방식이 둥근 나무 바퀴를 만드는 것과 비슷했기에 서양에선 와인을 담는 오크통을 만들 때 바퀴 장인이 주로 일을 했다.
그렇게 김재원이 데려온 대장장이와 소목장이 다섯 명이었는데, 다들 젊은 축에 들었다.
“자네들이 만들 것은 나무를 조립해서 만드는 물통일세. 거기에 물을 담아도 새지 않아야 하네.”
그림으로 그려준 것도 있지만, 참나무 판을 둥글게 세워 바퀴처럼 둥근 쇠테를 씌어 모양을 잡는다는 설명을 다들 금방 알아들었다.
“대장장이는 둥근 쇠테를 크기별로 만들어 오고, 목장들은 2~3년 잘 말린 참나무 판을 가져오게."
“말씀 중에 송구하오나, 이 나무통을 몇 개나 만드실 것이옵니까?"
"지금은 100개를 만들 것이네. 문제가 있는가?"
“흠. 알려주신 크기를 보면 이 참나무 판이 곧고 크기가 길어야 하온데, 이런 나무를 구하기가 힘이 듭니다. 2~3년 잘 말린 이 정도 크기의 참나무 자체가 잘 없사옵니다.”
목장이 하는 말을 듣자 조선의 산림 사정이 떠올랐다.
200리터 배럴 크기의 오크통은 성인 남자의 가슴까지 오는 높이인데, 여기에 들어가는 120cm 정도 되는 길고 곧은 참나무 판 자체를 조선에서는 구하기 힘들었다.
물론,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크통이 집안 가구들보다 더 고가의 물건이 될 터였다.
“우선 목장들이 가지고 있는 나무로 소량을 만들게 되면 내가 수를 내어 보지 가진 것으로 작업부터 하게나.”
대장장이가 둥근 쇠테를 만들어 오자 그 쇠테를 바닥에 두고 목장들이 나무를 둥글게 세워 원형으로 놓았다.
오크통의 아랫부분이 쇠테에 맞게 오목하게 되자 그 반대로 윗부분은 벌어졌는데, 대장장이들은
굵은 쇠줄을 가져와 벌어진 윗부분에 감더니 쇠줄을 당겨 나무들을 쪼았다.
그러자, 윗부분도 아랫부분처럼 오므려 들었고, 쇠테를 씌어 대충이나마 오크통의 모양이 만들어졌다.
둥근 나무 바퀴에 쇠테를 씌우는 작업방식이 오크통을 만드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위쪽에 쇠테를 씌울 때 안쪽으로 불을 피워 나무의 온도를 올려주면 쇠줄로 쪼아줄 때 좀 더 부드러울 거네."
이후, 목장들이 둥글게 말린 나무 사이사이에 갈댓잎을 쪼개어 밀어 넣기 시작했다.
물을 넣어도 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밖의 틈새를 벌려 안쪽을 더 밀착시키는 작업이었다.
유럽에서는 여기까지 만들면 와인이나 위스키 등 넣는 내용물에 따라 속을 불태우는 작업을 했지만, 그렇게까지 럼주에 공을 들이려는 것이 아니었기에 살균을 위한 작업 정도로만 불을 태웠다.
그러곤 오크통의 양쪽에 홈을 파고 둥근 나무 뚜껑을 날 준비를 했는데, 여기서 목장들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리, 양쪽에 물이 새지 않게 나무 뚜껑을 달아 버리면 물은 어찌 넣고 빼실 것입니까요?"
"그건 이 나무판 중에서 가장 넓은 판에 구멍을 뚫어서 물을 넣고, 나무 마개를 만들 것이네."
“아, 그런 방식이군요. 그럼 됩니다."
목장들은 통의 양쪽에 나무 뚜껑을 고정할 홈을 파서 나무 뚜껑을 넣었고, 아교와 밀랍으로 밀봉작업을 준비했다.
"먼저 밀가루 반죽으로 밀봉작업을 해야 하네. 밀랍이나 아교는 더운 여름에 그 접착력이 떨어지거나 할 수 있으니 밀가루 반죽으로 밀봉을 하고 그 위에 아교를 발라야 하네."
아교와 밀랍도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지만, 동남아의 찌는 듯한 더위에 혹시 떨어질지도 몰랐기에 밀가루 반죽으로 먼저 밀봉하게 시켰다.
제작이 끝난 통에 목장이 손으로 돌려서 구멍을 뚫는 뚫쇠(드릴)로 구멍을 내었는데, 구멍을 뚫었음에도 통이 으스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나무통에 깔때기를 대고 물을 가득 담고, 참나무로 만든 나무 마개를 꽂아서 망치로 두드리니 나무통을 굴려도 물이 새지 않았다.
삼식이는 물론이고 원양 교역에 참여했었던 이들은 나무통을 보고 다들 만족스러워했다.
“이제까지는 큰 장독에 물을 담아 다녔으나, 그게 깨지게 되면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헌데, 이런 나무통이 있으면 잘 깨지지도 않고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걸 쌓을 수도 있으니 배 안쪽 공간 활용에도 이득일 것 같습니다."
배를 몰고 다녀본 이들은 다들 오크통의 등장에 좋아했고 얼른 수십 개를 만들길 원했다.
하지만, 이 사이즈의 나무통을 만들 참나무가 부족했다.
"이 작업에 들어가는 쇠테를 만드는 대장장이나 나무를 다듬는 목장이 되려면 얼마나 수련을 쌓아야 하는가?"
“다른 거 없이 이 쇠테를 만들고, 나무만 다듬는 작업이라면 5개월이면 넉넉할 것입니다요.”
“그럼, 자네들 5개월의 시간을 내가 사지. 자네들은 배 타고 멀리 가 보고 싶지 않은가?"
“조선 밖으로 가서 일을 하는 것이옵니까?"
“그렇네. 바다를 건너가서 일을 하게 될 것이야."
갑자기 배를 타고 멀리 가 보겠냐는 말에 대장장이나 목장은 난처해했다.
하지만, 5개월 일을 하면 도성 밖에서 3칸짜리 초가집을 살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하자 바로 승낙했다.
“부산의 희재에게 보내어 저 다섯 사람을 북해도로 보내게."
"숲이 많아 나무를 구하기 쉬운 북해도에서 저 나무통을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벌목을 하고 나무판을 만드는 것은 북해도에서 충분할 것이네. 대장장이와 목장에게 나무통 만드는 것을 배우게 하여 생산하게 한다면, 북해도의 특산물이 될 것이야."
액체를 담는 나무통뿐만 아니라 산림자원이 풍부한 북해도의 목재도 수입해 온다면 산림자원이 부족한 조선에서는 이득일 터였다.
"그렇게 만든 나무통으로 술을 대량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확실히 도자기 병으로 일일이 담아오는 수고가 줄어들 수 있겠군요.”
"그래야지. 그리고, 말라카보다 더 멀리 가는 선원들을 뽑으려고 하는데, 지원하는 이가 있겠나? 말라카로 가는 길의 3배는 더 먼 거리이고, 안전하지 않은 항로네."
말라카에 다녀오는 데도 4~6개월이 걸리는데, 그 3배의 먼 거리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길고 긴 항해였다.
"큰 보상을 걸면 나서는 이들이 있긴 있겠으나, 배 한 척을 채울 선원들을 구하는 데만 해도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의 비용을 감당할 만큼의 교역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재원은 멀고 험한 항해를 하더라도 그만큼의 이익이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사실 원종이 지금 생각하는 북방 항로를 통한 신대륙 발견은 직접적인 이득이 없었다.
북미에서 인디언이라 불리게 될 원주민을 만나더라도 이익이 될만한 교역품은 없었다.
북미를 발견하고, 남미까지 내려가야 도움이 될 작물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인데, 단기적으로 보면 무조건 적자일 수밖에 없는 항해였다.
“먼 곳에 간다고 해도 크게 이익이 나지는 않을 것이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무조건 이익이 될 거네."
“흠. 그렇다면, 돈이 들지 않는 선원들이 있어야 하겠군요."
"돈이 들지 않는 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