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또 다른 준비. (2)
“돈이 들지 않는 선원이라니 그런 선원이 있나?"
"네. 있습지요. 바로 천인(賤人)들 입니다."
"천인? 그럼, 노비들을 선원으로 해서 배에 태우지는 말인가?"
“네. 물론, 노비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것은 가르치고 배에 태워야 하겠지요. 그리고, 배에 필요한 기술 외에 이미 다른 것을 배운 노비들도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배운 노비? 어떤 노비들을 말하는 것인가?”
“폐족(廢族)의 후손들입니다."
“아!"
조상이 죄를 지어 노비가 되거나 상민으로 신분이 떨어진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가깝게는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자들이 있으며, 멀게는 선대왕의 계유년 일에 연루되어 노비가 된 자들이 있사옵니다.”
"오, 그렇군.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군."
한마디로 역적의 후손들을 선원으로 쓰면 돈이 들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대항해 시절 유럽도 선원들의 사망률이 높고, 배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어 선원을 구하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항구의 술집을 덮쳐 술에 취한 이들을 강제로 선원으로 배에 태우는 경우가 있었고, 죄를 지어 징역을 받은 이들을 징역만큼 배를 타게 하는 처벌도 있었다.
조선에도 의금부에 투옥된 자들과 역적에 연루되어 노비가 된 이들이 있으니 그런 이들을 선원으로 쓰면 돈이 들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신대륙으로 가서 공을 세운다면 신분을 복권(復權)시켜 주겠다고 포상을 건다면,목적의식 또한 확실해질 터였다.
그런 포상을 약속하고 폐족의 후손들을 선원으로 쓰기 위해서 한명회를 찾아갔다.
"계유년 일에 연루되어 천인이 된 이들을 선원으로 쓰고 싶다고?"
“네. 계유년 일과 이시애의 난으로 신분이 노비로 떨어진 이들을 쓰고자 합니다.”
“대우가 좋은 선원이 되기 위해 힘든 수군이 되려는 이들도 많은데 왜 굳이 그들을 써야 하는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네.”
“그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연이 있어서 그들을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선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봉급이 없을 것입니다.”
"천인이니 그건 당연하지."
"그리고 가장 요한 것은 이제까지 다녀온 중국과 남방의 말라카가 아닌 그 반대되는 북방으로 배를 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북방? 대동강을 지나 1년 내내 춥고 눈이 내린다는 북쪽 말인가?"
“네. 맞습니다.”
1년 내내 눈이 내린다는 한명회의 말은 틀렸지만, 북방 항로의 위험성을 인식 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북방의 바다는 그 물의 차가움이 비수와 같고, 물에 한번 빠지면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파도 또한 남방의 잔잔한 파도와 달리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리며 배를 때리옵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길이기에 천인을 쓰고자 한다는 것이군."
"맞사옵니다."
“그럼, 그 북방 바다를 건너면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있기에 배를 보내려고 하는 것인가?"
“비밀이온데, 쌀이 많이 난다는 미국(米國)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하옵니다."
“쌀이 많이 나는 나라라고? 자네는 그걸 어찌 알고 있는 건가?"
이렇게 어찌 아냐고 추궁 할 때는 전가의 보도가 있었다.
“말라카와 여러 곳을 다니며 나이 든 그곳 선원들에게 들은 이야기 옵니다. 태풍에 휩쓸려 다니며 머나먼 바다를 건너게 되었는데, 그 땅에 집채만 한 소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고, 들판은 씨앗만 뿌리면 금세 자라날 정도로 비옥하다고 하였습니다."
“흠. 소문을 듣고 간다라.."
“예전 삼한시대 서라벌까지 배를 타고 왔던 회교인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도 모두 몇 개월을 항해하면 서라벌이 있다는 말만 믿고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말라카가 있다는 말만 듣고 가지 않았습니까?"
"하긴, 명나라의 태감 정화의 기행문을 나도 읽어보았지. 곤륜노를 넘어 온 몸이 먹처럼 검다는 묵인이 있다고 해서 저 멀리까지 갔고, 그게 진짜라고 했었으니깐, 뱃사람들의 소문이라고
무시할 것은 아니지. 암."
동창의 태감들에게서 받았던 정화의 기록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찍어 퍼트렸는데, 그걸 한명회도 본 것 같았다.
“내일 전하께 이야길 올리겠으니 자네도 등청하게."
***
"계유년에 있었던 폐족의 후손들 중 남자는 42명이 있으며,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남자는 28명이옵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났기에 계유정난에 연루되었던 후손들이 많이 줄어 있었다.
“70명이면 누전선 2척을 채울 수 있는 수인가?"
“전하. 북방의 바다는 서해의 잔잔한 바다와 달리 누전선으로는 갈 수가 없사옵니다. 해서, 부산포에서 새로운 배를 건조 중에 있사옵니다. 그 배가 건조 된다면 3척까지도 충분히 운용 가능한
숫자이옵니다."
부산포의 조선(船) 장인들을 데리고 북해도를 갔던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조선과 명에서 데려온 장인들은 새로운 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방식은 배의 크기를 키우되 최소의 선원으로도 운용 할 수 있게 하는 네덜란드의 배들과 닮아 있었다.
영국식 배들은 선원을 많이 태워 갑판 백병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넓은 갑판을 가진 배로 발전을 했고, 네덜란드는 배의 길이를 늘리고 폭을 좁혀 최소한의 인원으로 배가 움직이게 발전을 했었다.
배의 갑판 크기에 따라 세금을 받는 지중해 세법을 피하고자 이런 방향을 선택하기도 했는데, 바다의 마부라고 불릴 정도로 점도 많이 실을 수 있었고, 25%의 운용 인원만으로도 최고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배들이었다.
그런 배가 조선에서도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배까지 만들었다라.. 북방 항로를 위해 준비 한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 지도를 봐주시옵소서."
원종은 중국 땅은 크게 그리고, 왜와 사할린 너머 북미 땅을 중국 크기로 그린 전지 크기의 지도를 올렸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경우에는 그냥 둥글게 표현하였지만, 미국 땅의 크기는 중국과 비슷한 크기로 그려 중국에 버금가는 대국이 있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말라카로 가는 거리의 3배 거리를 가게 되면 닿는 땅이 온대, 살아 돌아오기가 힘들지도 모르는 험한 길이옵니다.”
큰 바다를 건너야 하는 지도를 보는 성종은 그 길이를 쉽게 헤아리지 못했다.
“여기 미국에는 가치 있는 물건이 있느냐?"
"소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나이다. 다만, 곡식이 잘 자라고 집채만 한 소가 돌아 다닌다고 하였기에 그걸 수확해 배에 실어 온다면 충분히 이득이 날것이옵니다."
“전하. 쌀이 많이 난다는 미국과 통교를 하게 된다면, 조선 땅에서는 보릿고개가 사라지게 될 것이옵니다. 이는 중국의 어느 왕조들도 하지 못한 업적이 되는 것이옵니다.”
성종은 중국의 왕조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말에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좋다.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보릿고개를 없앨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폐족의 후인들을 모두 데려가 쓰도록 하라. 그래도 사람이 부족하다면 의금부를 비롯한 지방관아의 죄수들도 데려가 쓸 수
있게 하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다만,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미국 땅에 도착을 하게 되더라도, 그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없사옵니다."
" 그렇지. 돌아와야 하는 법이지."
“해서 다시 위험한 길을 돌아온다면 과거의 죄를 씻어준다는 포상이 필요하옵니다. 그래야 만이 그들이 미국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럼, 그들의 신분을 복권시켜 달라는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죽을 수도 있는 항해로 공을 세웠으니 윗대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감해 주시옵소서."
"좋다. 그렇게 하겠다. 북방 항로 개척에 공을 세운다면 복권 시켜주겠다고 약조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흔히 지칭하는 사육신(死六臣)의 후인들은 20년이나 지난 이후라 그런지 다들 나이가 들고 비쩍 말라 양반이던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계유정난에서 세조와 반대편이었던 자들의 후손 또한 완연한 천인이 되어 있었다.
“이 중에 한자나 언문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손을 들게나.”
4명이 손을 들었는데, 그중 하위지의 손자인 하청일을 지적하여 조정에서 내린 글을 읽게 했다.
“...이에 북방 항로를 개척하여 쌀이 많이 난다는 미국(米國)에 도착했다는 증거를 듣고 돌아온다면, 조상의 죄를 씻고, 사족(士族)으로서의 신분을 복권 시켜주도록 하겠다.”
하청일은 자신이 읽어보고도 이게 진짜 인지 믿지 못했다.
해서 언문으로도 쓰인 글도 재차 읽어보았다.
당연히 둘 다 같은 내용이었고, 그도 익히 아는 춘봉 상단의 배를 타겠다는 증서도 있었다.
“배를 타고 위험한 북방 항로를 개척하는 일이네. 배 타는 것을 거부한다면 계속 조선에 남아 천인으로 살 것이네. 하지만, 배를 타고 항로를 개척한다면, 다시 사족(士族)으로 돌아갈 수 있네.
여기에 지장을 찍게."
"사족으로 돌아가면 뭐합니까? 돈이 있어야지 사족이지 가진 것 없는 사족도 사족입니까?"
유성원의 조카인 유원상이었다.
“복권이 된다면 당연히 보상이 있을 것이네. 우리 춘봉 상단에는 3개의 선단이 있는 것을 다들 알 것이네."
유구의 '케하루 선단'과 왜의 본토를 공략 중인 '히로타 선단'이 있었지만, 염호진의 '말라카 선단', 삼식이의 '남방 선단', 희재의 '조운 선단'이 3개만이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북방 항로 개척으로 미국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면 내가 어찌 하겠나? 당연히 이미 미국에 다녀온 이들로 해서 선단을 구성하지 않겠나?"
“저희들에게 선단을 맡기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그때가 되면 다들 복권이 되었을 테니, 그 누가 자네들을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원종의 말에 하청일과 유원상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애초에 양반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 이들이라면 노비로 신분이 떨어졌을 때도 크게 상실감이 들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양반으로 떵떵거리던 삶에서 노비로 떨어져 천인이 되었으니, 다시 양반이 될 수 있고, 자본력까지 가질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정녕 이게 진실이라면 어서 배를 태워 주십시오. 북방이든 백방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흑흑흑.”
"그전에 다들 헤어진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알고 있다면 여기에 써주게."
“서, 설마 가족들도 찾아 주신 다는 말이옵니까?"
“그렇네. 1년 어쩌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는 길이네. 목숨을 내놓고 멀리 떠나는데, 가족들이라도 있어야 지탱이 되지 않겠나? 최대한 데려올 것이니 알고 있는 것을 여기에 쓰게나."
사내들은 다들 공노비가 되었지만, 계집들은 기생이 되거나 공신들에게 하사되었으니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돈만 있으면 되었다.
더구나 성종의 명으로 공을 세우면 복권이 된다는 서류도 있었기에 계집들을 하사 받은 공신들에게 잘 이야기 하면 되돌려 줄 것 같았다.
가문의 복권보다도 가족들과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험난한 베링해를 건너 알레스카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흩어진 가족들은 우리가 데리고 올 터이니 너희들은 이제 물에 빠져도 살 수 있게 수영부터 배운다. 수영을 배운 이후로는 수군이 받는 훈련을 받고, 배를 움직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원종은 새로운 배가 나오기 전까지 이들을 훈련시켜 제대로 된 수군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데리고 베링해를 건널 선장을 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