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대륙의 혼란.
“태후께서 중추절을 맞아 태조의 릉에 참배하고 싶다고 주청을 올렸다는 말입니까?"
“네 귀비마마. 허락을 해드려야 할지요?"
만귀비는 상서성을 통해 올라온 태후의 남경행 소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까지 하지 않더니. 태자는요? 동행하는가요?"
“태자 저하께 오선 궁에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상서성의 말에 만귀비는 웃음이 나왔다.
“오호호홋. 웃기는군요. 태후의 치마폭 안에 있어야 겨우 명을 이을 수 있는 태자가 궁에 남는다라. 상서성이 보기에는 이게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너무 얕잡아 본다고 생각되지 않소?"
상서성 문규형은 이마에 식은땀만 흘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태후만 간다고 해두고는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태자를 몰래 데리고 가려고 하겠지요. 좋아요. 허락한다고 하세요."
“네? 그, 그래도 되겠사옵니까? 귀비마마의 말처럼 태자를 빼돌리려는 수법일 수도 있습니다.”
“네, 압니다. 알고 있어요. 남경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 하세요."
상서성 문규형은 이리 쉽게 귀비가 태후의 남경행을 허락할지 몰랐기에 기쁘기보다는 기분이 떨떠름했다.
하지만, 분명 남경행을 허락한 것이었으니 그는 급히 태후궁으로 향했다.
"태후와 태자를 놔주어도 되겠습니까? 태자를 따르는 세력들이 남경으로 몰려들 수 있습니다."
상서성이 떠나자 뒤에서 나온 동창의 수장 왕직이 말했다.
"누가 남경까지 가도록 놔둔다고 했느냐. 궁을 나가 암수를 피해 보겠다고 생각을 하는가 본데, 그 반대를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궁이었기에 정도가 있었던 것인데."
"하긴, 궁이기에 폐하의 눈이 있어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폐하가 없으시다면 여러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동창을 총동원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태자를 죽여라. 일에 휘말려 태후가 죽어도 상관없다."
“충,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태후의 행차가 북경을 벗어나자마자 매일 밤 괴한들이 난입하기 시작했고, 머무는 곳마다 독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후의 행차는 아침마다 시체를 치우는 것이 하루 일과의 첫 시작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태원을 지날 때는 화적떼에게 공격을 당해 태후의 행차가 궤멸하여 버렸다.
들판이 시체로 뒤덮였으니 태후와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중간에 빠져나간 것인지 태후와 태자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이들을 찾기 위한 동창의 난동에 중원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경에 태자와 태후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창의 난동에 피해를 당한 이들이 태자를 지키기 위해 남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늘은 남경의 협의지사들이 동창의 암살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그것 다행이구랴. 이번에는 피해가 크지 않았소?"
"피해가 컸소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암살자가 숨어들어 오니 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오."
"더는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아니 되오. 군사를 일으켜야 하외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황제 폐하께서 북경에 계신데, 군사를 일으키다니요."
"허나, 계속 이렇게 있으면 결국 병력이 소모되어 죽게 될 것이오. 이제는 태자 저하의 위치를 모르게 되자 대신들을 찾아가 죽이는 지경이지 않소."
대신들은 군사를 모아 거병해야 한다는 편과 그것은 역적질이니 아니 된다고 하는 편으로 나뉘어 언성을 높여 다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태사 원익환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곤경에 처한 태자와 태후를 남경까지 모셔온 이가 바로 원익환이었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은연중에 남경에 모여든 세력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배에서 태자를 떠올려 보았다.
먹을 것에 욕심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둔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에 반해 지금 황제는 만귀비의 손아귀에 잡혀 차남이었던 주우극이 독살당했을 때도 만귀비에게 뭐라고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잠시 슬퍼하고 넘겼던 사람이 지금의 황제인 성화제였다.
마음은 이미 성화제를 떠나 태자에게 와 있었지만, 앞으로가 녹록지 않았다.
물론, 시간은 태자의 편이기에 남경에서 암살만 막아 내면 될 것 같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동창의 부랄 없는 놈들이 보내오는 암살자가 태자를 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사를 일으키기에는 황제가 살아 있으니 명분이 부족했다.
“황제 폐하가 북경에 계시지만, 군사를 일으켜야 하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소. 만귀비가 암살자로는 태자 저하를 죽이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면, 우리보다 먼저 군대를 보내올 것이오.
그때가 되어서 후회할 것이오?"
“하지만, 명분이 없지 않소? 폐하께서 살아 계시는데, 어찌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이오?"
“조나라 무령왕의 예가 있지 않소."
"흐음."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은 장남인 태자를 폐하고 차남을 태자로 삼으며 난을 초래했는데, 결국 실권을 잡은 태자가 아비인 무령왕을 건물에 가두어 굶겨 죽인 일이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직접 죽일 수 없으니 감금하여 굶겨 죽인 것인데, 어찌 보면 지금과 가장 어울리는 고사였고, 명분을 만들어 주는 이야기였다.
“허나, 한나라 무제와 여태자의 일도 있지 않소이까.”
한나라 무제와 여태자 역시도 부자간의 싸움이었는데, 무고의 난이라고 불린 이
싸움에서는 아비인 한무제가 이겼었다.
무고의 난이라 불린 여태자의 고사는 아비가 아무리 불의해도 아들이 검을 들면 안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는 고사였다.
“허나, 한무제와 여태자의 일은 후에 여태자의 억울함이 밝혀졌지 않았소이까.”
“맞소. 하지만, 전쟁에 패한 여태자의 식솔 3만 명은 그날 다 목이 잘려 나갔소이다. 목이 떨어진 이후 진실을 알게 되어 복이 되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떨어진 목이 다시 붙기라도 하오?”
여태자의 난처럼 만귀비가 관련자들을 모두 다 죽이라고 한다면 여기에서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없었다.
쉽게 생각한 거병이었지만, 그 이후에 닥쳐올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고,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들 목숨이 그리 귀하시면 이만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가시오. 청명(淸名)의 이름을 걸고 만귀비를 몰아내기로 한 이들이라고 듣고 왔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소이다.”
양주의 상인이자 남경에서 활동하는 상인 텅신황은 목숨을 아까워하는 이들을 보며 비웃었다.
태사 원익환은 대신들의 용기 없음을 비웃는 상인의 말에 부끄러웠다.
“저 상인의 말이 맞는다. 목숨이 아까웠다면 아예 남경으로 오지 않았어야지. 그리고, 지금 겁을
먹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결국 만귀비에게 잡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를 일으켜 불의한 황제를 몰아내고 태자 전하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합시다!"
영향력이 가장 컸던 원익환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자, 대신들의 의견도 한쪽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렇게 1477년 가을. 태자 주우탱의 이름으로 만귀비를 토벌하고자 군사가 일어났다.
황제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태자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
"허허. 말세네. 말세야. 아니지, 우리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이니 땡큐네. 땡큐야!"
명나라 남경에서 태자가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은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대만에서 해적을 같이 토벌했던 양주 상인 텅신황이 빠르게 소식을 알려줬다.
아직 황제와 태자의 군세가 서로 맞붙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세를 늘리기 위해 도지사나 태수들을 서로 줄 세우고 있다고 했다.
그 덕에 중원이 반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본래 역사에는 없던 인물이 태어나고, 그 인물로 인해 중국이 반으로 갈라지게 되자 원종은 신선로 음식으로 인해 이리 되었다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어 낸다는 말처럼 원종 자신이 만귀비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해준 음식들로 인해 임신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더구나, 세를 불리기 위해 황제 측에서 조선에게 파병을 요청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그 여파가 조선으로도 몰려오고 있었다.
“저, 전하! 명나라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것이 진짜였사옵니다. 파병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이ㅇ조선으로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허허.”
성종은 소식을 듣자 그냥 웃기만 했고, 중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조선만 해도 태조가 살아 있을 때 태종이 군사를 일으켰었으니 명나라에 대해 뭐라고 욕을 하면 결국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관 철폐와 이전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논의를 했으니 남은 자잘한 것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처리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말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처리하라는 것이었지만, 이제 왜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생겼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이었다.
원종이 대마도를 먹은 지 8개월, 대마도의 도주인 아비루 촌음이 조정에 방문해 조선식 관포를 입고 알현한 지 4개월 만이었다.
명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중국을 오가는 관치무역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고, 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후쿠에섬에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중원의 혼란은 자유 무역 상관이 열리는 대마도에게는 호재였다.
그리고, 원길 형이 개척해서 상관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동항에도 전쟁특수가 돌기 시작했을 터였다.
***
"희재의 선단과 삼도 수영의 배들이 있으니 대마도와 그 인근은 이제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제주도에 있는 수군 훈련원의 배들은 모두 다 동항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겠습니까?"
김재원은 병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라 걱정을 했다.
“수군 훈련원의 훈련을 위해 움직인다고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사실, 훈련을 위해 배를 띄워 북방으로 가든 남방으로 가는 그걸 알아낼 방법도 이 시대에는 없었다.
“전쟁의 추이를 보고 따르려면 동항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다. 그리고 여차하면 다 태워서 조선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 수군 훈련원의 모든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보급에 문제가 없게 하겠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곡물값이 오를 것이니 삼식이는 왜의 규슈 지역에서 곡물을 모으고, 염호진의 선단은 안남 지방과 대만에서 곡식을 모아오게 하게나. 곡물 가격이 많이 오를 것이네."
원종이 전쟁특수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명나라에서 보내온 사신이 도착했고, 3만명의 병사를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두고 정전에서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파병을 하셔야 하옵니다!"
세종 때부터 중신인 승지 정효상이었다.
“태자가 남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고는 하나 태자의 연치가 이제 일곱 살에 불과하옵니다. 그 뒤에서 태자를 조종하는 이가 있을 터 모리배의 농간에 태자가 이용당하는 것은 그 미래가 밝지 못하옵니다."
“승지께서는 명나라에 다녀오지 않았기에 그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에 다녀오고 궐의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보고 온 입장에서는 절대 파병을 하면 아니 된다고 생각되옵니다."
이번에 사신과 함께 돌아온 노사신이었다.
조선의 숙수들을 데리고 명나라로 가서 몇 개월간 체류했었기에 지금 명나라의 속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이였다.
“전하. 조선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오나, 만귀비의 악정과 내시들로 만들어진 동창의 폐악에 민심이 이반되어 있사옵니다."
“허나, 황제가 두 눈을 뜨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 태자의 편을 들 수 없지 않은가?"
"전하 송구하오나, 당금의 황제는 성화제가 맞사오나, 실지로는 만귀비가 황제와 다름없사옵니다.”
“허허허. 어찌 그런 일이."
천하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황제가 아니라, 만귀비라고 하니 성종은 고개를 저을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온 그대의 의견은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만귀비의 악행이 쌓여 있기에 그녀를 도우면 아니 되옵니다."
성종은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민심이 돌아섰다면 파병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여겼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그리하면 아니 되옵니다."
이제는 영의정에서도 물러난 한명회였다.